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을 체험한 영혼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빛나는 변형을 이룬다 (야스퍼스)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수 십 년 동안 결혼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부부들치고 ‘사랑과 전쟁’을 치르지 않는 부부가 얼마나 될까?

 ‘행복한 결혼생활’은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전쟁의 원인을 남에게만 돌릴 때 일 것이다.

 며칠 전 만난 대학 후배가 술에 취해 푸념을 할 때 너무나 절망스러웠다.
 ‘나와 전혀 관계없는 것이 왜 내게 이렇게 큰 고통을 주는 거야?’

 앤디 앤드루스는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들지 않은 인생은 없다./다만 행복한 이는 행복하기를,/불행한 이는 불행하기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 후배는 계속 아내만 탓했다. 수 십 년 동안 아내 때문에 사는 게 너무나 힘들었단다.

 고통은 왜 고통에게 다가갈까? 아마 동병상련의 마음일 것이다. 어릴 적 고통의 짙은 그림자를 지닌 그 후배는 짙은 고통의 그림자를 지닌 아내의 고통을 용케 알아보고 그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고통은 자신이 짊어질 수밖에 없다. 누구나 ‘짊어진 짐이 한 짐(김현)’이다.

 그 후배는 남의 고통을 짊어지겠다는 행(行)의 과보(果報)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고통은 온전히 그 후배의 몫이다.

 이제 와서 그 고통을 피하려고 할 때 그 고통은 점점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올 것이다.

 백석 시인 앞에 ‘흰 바람벽’이 영화 자막처럼 펼쳐진다.

 그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고통들을 응시한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이 흰 바람벽에/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이 흰 바람벽엔/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한다. ‘인간은 종교적 단계로 올라가지 않고는 삶의 불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는 ‘종교적 단계’는 인간이 자신을 완전히 버릴 때 온다고 한다. 예수가 ‘다 버리고 내게로 오라!’고 했을 때의 ‘다 버린 인간’이 종교적 인간이다.  

 ‘다 버린 인간’은 자신의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모든 고통을 그대로 수용한다. 백석 시인처럼.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처럼. 

 키에르케고르는 쾌락만 추구하는 인간은 언젠가는 절망에 빠진다고 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이 병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기적이 일어난다고 한다. 절망은 인간을 한 단계 도약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절망의 힘으로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에서 스스로 윤리를 세워가는 인간, 나아가 종교적 인간으로 상승해간다고 한다.
 
 그 후배의 몫은 온전히 그 후배의 몫이라 우리는 각자의 술잔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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