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는 없다. 때문에 “생각 좀 하고 살라”는 말을 타인에게 던지는 것은 무례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타인에게, 직접적이든 혹은 내심으로라도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내 앞에 있는 타인은 ‘생각이 없어 보이는’ 존재인 것만 같다. 한심해 보이지만, 때로 거울 앞에 서 있는 내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다운로드 받아두기만 하고 정작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던 영화들을 목록별, 연도별로 정리했다. 물론 합법적으로 비용을 지불하고 다운로드 받았다. 그런데 각 영화들의 연도를 보다가 문득 떠올랐다. 2013년, 2014년, 2015년 그리고 2016년. 난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마음으로 그 시간들을 살아냈던가. 그리 오래전 시간이 아님에도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올해 초 국내에 개봉되었던 <The Post>라는 영화가 있다. 메릴 스트립, 탐 행크스 등 연기파 배우들의, 그야말로 명연기를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영화는 1971년 미국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뉴욕 타임즈>의 ‘펜타곤 페이퍼’ 특종 보도로 미국이 뒤집힌 때였다.

<뉴욕 타임즈>는 ‘펜타곤 페이퍼’를 바탕으로 미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잘못된 이야기들을 국민들에게 전해왔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마치 이기고 있는 것처럼 호도하며 미국 청년들을 끊임없이 사지로 내몰았던 것이다. 이후 미 정부는 신속하게 이와 관련된 보도를 금지시키는 등 언론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한편 <뉴욕 타임즈>의 경쟁지인 <워싱턴 포스트>지의 편집장 벤(탐 행크스)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이 담긴 ‘펜타곤 페이퍼’ 입수에 사활을 걸고, 결국 4천 장에 달하는 정부기밀문서를 얻게 된다.

이후가 문제다. 벤은 정부가 개입하여 베트남 전쟁을 조작한 사건을 세상에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신문의 발행인 캐서린(메릴 스트립)은 주저할 수밖에 없다. 진실을 공개하면 닉슨 행정부와 정면으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다. 회사와 자신,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자칫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 벤 편집장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보도하지 않으면, 우리가 지고, 국민이 지는 겁니다.”

가짜 뉴스 문제로 시끄럽다. 하지만 가짜 뉴스 문제는 사실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었다. 사실을 왜곡하고 조작하고 덧씌우는 뉴스는 그동안 너무나 많았다. 비단 군사독재정권 시기만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기에도 수없이 많은 가짜 뉴스를 봐야만 했다.

<The Post>의 기자들과 지금 우리 언론의 현실을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미국이지만, 아무리 문제가 많은 국가이지만, 적어도 민주주의 역사에서 우리보다 앞서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트럼프가 문제아라고 해서 미국 민주주의의 역사마저 쓰레기라 할 수는 없다. 물론 여전히 문제점이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언론이 정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전체 언론 모두를 싸잡아 말할 수는 없지만, 권력 앞에, 자본 앞에 스스로 무장해제된 언론들의 민낯을 우리는 너무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아울러 스스로 언론이라 착각하는 포털 권력과 사이버 언론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쯤에서는 과연 이 시대 언론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점점 힘겨워지는 지금이다. 알아서 무엇이든 대신 처리해주는 기계들이, 로봇들이 날이 갈수록 무섭게 진화하고, 급기야 대신 운전까지 해주겠다고 나선다. 여기에 경외가 아닌 공포를 느끼는 것은 나 혼자 만일까. 4차 산업혁명은, 무지한 나에겐 그저 인간 소외의 절정으로만 보인다. 그 혁명의 끝은 평화로울까.

삶은 과거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졌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신기루와 같은 행복을 찾아 헤매고 있을까.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왜 우리는 하루하루 쉽지 않은 삶을 이어가는 것일까. 미래는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아름답고 행복할까. 그 미래는 누가 만들어가는 것일까. 그 미래를 누릴 권리는 누가 부여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언론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기자 역시 인간이고, 때문에 당연히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생각한다’고 믿는 것과 그들이 생산해내는 기사에는 깊고 깊은 심연과 같은 간극이 존재한다.

기사는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시대의 정신을 담아낸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삶을 드러낸다. 민중의 삶이 보다 행복해질 수 있도록 권력을 견제하고 표현의 자유를 지켜낸다. 자신의 펜이 누군가의 심장을 찌르는 칼이 아니라, 누군가의 생명을 구해내는 동아줄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기자의, 언론의 역할이자 의무이다.

하지만 이젠 언론마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해 가는 것 같다. 사법부를 비롯해 지난 정권 하에서 온갖 불의를 자행했던 관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스스로 정당하다고,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판단하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진정 누구의 생각인가.

어느 분이 최근 우리 대학교육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떠오른다. 그는 대학의 존재 이유를 먼저 물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우러나온 문제를 붙잡고 ‘우리의 언어’로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스스로 답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현실은 “‘남의 삶’에서 나온 ‘남의 이야기’를 주워섬기며 ‘제 이야기’인 양 우쭐대는 허깨비가 수두룩하다”고 한탄한다.

비단 대학교육에만 국한된 이야기일까. 나는 지금 대한민국 전체의 ‘무상’을 느낀다. 길고 긴 ‘불의’에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정의’로 가기 위해서는 여전히 많은 고통과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이내 우리는 지쳐버렸다. 촛불 정부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남북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자부심은 충분히 누릴 만 하지만, 그 외에도, 또 그 안에도 여전히 불통과 적폐는 살아 꿈틀거린다. 징그러운 생존력이다.

▲ 강국진, 『철학을 하지 않는 닭』, 봄풀, 2017. 7. [자료사진 - 통일뉴스]

여기 편한 닭장에서 살아가는 닭이 있다. 닭은 자신에게 정기적으로 주어지는 물과 모이에 만족한다. 하지만 어느 날 닭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디로 가는가. 살이 포동포동하게 찐 다른 닭들은 매일 아침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왜 인간들은 우리를 추위와 더위, 그리고 배고픔과 온갖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일까.

생각을 하게 된 닭은 닭장을 뛰쳐나와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며 바깥세상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 닭은 이내 철학을 하는 닭이 되어간다. 철학을 하는 닭은 이미 그 이전의 닭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길을 찾아내려, 삶의 근원적인 목적을 찾으려 긴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인류의 역사는 말하고 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도, 밝게 빛날 수도 없는 존재임을.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말한다. 우리의 유한성을 깊이 자각한 후에야 무한의 불멸을 얻을 수 있음을.

언뜻 생각 없는 삶은 편하게 느껴진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면 고뇌할 이유마저 소멸된다. 하지만 그야말로 동물적 생존본능과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로 대한민국을 쓰레기통으로 집어넣은 기성세대가 요즘 젊은 세대에게 ‘생각 없이 산다’고 비난하는 것은 그야말로 소가 웃을 짓이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은 생각할 여유마저 박탈당한 세대다. 우리는 극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묻는다. 이 시대 기자는 어디에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제대로 보도하지 않으면, 국민이 지고, 권력이 이긴다”는 비장함으로 글을 써내려가는 기자는 누구인가. 약자의 고통에 눈감지 않고 권력의 오만함 앞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언론인은 누구인가. 냉전에 기생해온 권력의 앞잡이가 아닌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다시 말하지만,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은 언뜻 편안해보일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말했다. 위대한 것은 결코 쉬울 리 없다고, 편안할 리 없다고. 위대함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나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 닭장 안에 갇혀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물과 모이를 기다리고 싶지 않다. 이 시대 언론도 이제 그만 닭장 밖으로 뛰쳐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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