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 [삽화 - 김윤기]

“김일성 장군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

웬 60대 여자가 소리치면서 달려들었다. 신돌석씨는 재빨리 막아서며 그 여자를 몸으로 저지하였다.

“나라가 망하려니까 이런 것들이 설치지. 니들이 원하는 게 바로 그거 아니야. 김일성 만세, 아니야? 태극기도 싫어하는 것들.”

그 여자의 손에는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낯이 익었다. 전철 역 앞에 텐트를 치고 박근혜 구명운동인지 뭔지 하는 무리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훨씬 전부터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90년대 후반에 지역 단체가 사무실을 구하기 어려울 때 보증금도 없이 싼 월세로 임대해 준 사람이었다. 어쩌다 저 지경이 되었을까?

“그러는 당신들은 왜 성조기, 이스라엘기 들고 설쳐요?”

신돌석씨가 그 여자를 온몸으로 막으며 한마디 하자 아내가 나서서 신돌석씨를 옆으로 밀어 내었다. 아내는 여자와 맞서는 일은 여자가 해야 한다는 것 같았다. 하긴 신돌석씨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자들과 말싸움해서 이긴 적이 거의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동네나 학교에서 여자애들과 말싸움하다 혼자 부글부글 끓고 마침내 주먹이 올라간 경우도 있었다. 아내는 그럴 것 같다는 생각에 재빨리 옆으로 밀어낸 것 같았다.

아내가 그 여자를 막아서자 아름이가 달려들어서 이런 저런 말로 그 여자의 말을 막았다. 이럴 때 보면 아름이는 내 딸이지만 참 똑똑하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하였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 대체공휴일이다. 신돌석씨는 언제부터 대체공휴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대체공휴일이 나온 뒤 정부도 이랬다저랬다 한 것 같다. 처음 대체공휴일이 생겼을 때는 그건 우리와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일해야 했다. 하지만 공장장이 당연하다는 듯이 괜히 딴 생각하지 말라고 한 것이 긁어 부스럼이었다. 노조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마자부터 현장 안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일상투쟁에 들어갔다. 결국 대체공휴일에 노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올해도 추석이 월요일이라서 수요일이 대체공휴일이 되었다. 신돌석씨는 이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는 분이 하는 공장의 자재 창고를 관리해 주는 일을 한다. 대체공휴일이면 공장도 놀고 자재 창고는 물론 쉰다. 추석 전 날에 힘찬이가 왔고, 추석 날 저녁에는 아름이와 사위가 왔다. 다음 날까지 술도 마시고 고스톱도 치고 텔레비전에서 영화도 봤다. 이제 슬슬 무료해지려고 하는데 지역 단체 연석회의에서 실무를 맡고 있는 강성욱한테서 연락이 왔다. 대체공휴일에 별 일 없으면 판문점 비준 촉구 서명을 하자는 것이었다.

판문점 비준 촉구 서명은 온라인으로 했었다. 엽서를 만들어서 지역구 의원에게 보내는 운동을 하는 단체도 있어서 신돌석씨 가족은 모두 했었다. 그런데 지역에서 새로운 제안이 나왔다. 다른 지역이나 전국 단위에서 어떻든 우리 지역은 가두로 나가 서명을 받자는 것이었다. 좋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물론이고 힘찬이도 아름이도 하겠다고 했다. 아름이는 집에 가야 한다고 하더니 이 제안이 나오니까 하겠단다. 힘찬이나 아름이나 이 지역에서 자랐기 때문에 지역 활동가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고향 같은 이 지역에서 한 번 뭔가 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전철역에서 가까운 곳에 서명대를 설치하고 오전 10시부터 받기 시작했다. 오후 6시까지 하기로 했다. 오전에는 다니는 사람도 드물어서 한산했다. 그러다가 점심때가 가까워 오면서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관심을 많이 보였고, 적극적으로 서명을 하고 최고라는 손동작을 해주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다가 2시쯤 된 모양이었다. 이 여자가 달려들면서 난장판이 된 것이었다. 아마 오전에는 자기들도 시비 걸기 뭐하니 그냥 두었는데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서명을 많이 하니까 안 되겠다 싶은 모양이었다. 깽판을 놓으려고 한 것일 게다. 그런데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고, 아름이의 논리적인 말에 밀리고 있으니 속이 타는지 소리만 고래고래 질러댔다.

“이제 김정은이한테 속아서 우리나라 다 넘겨 줄 거다. 문죄인이 그런 놈이야. 정신들 차려야지. 아니 니들도 원래 그런 족속들이지.”

“뭘 넘겨요. 언제는 통일대박이라더니. 지금 남북이 화해하고 협력하면 평화와 번영이 올 텐데 그게 그렇게 싫어요?”

“평화와 번영? 좋아하고 있네. 김정은은 지금 땅 속 깊숙이에서 핵무기를 계속 만들고 있다고. 그 자금을 문죄인이 김정은에게 주고 온 거야. 이제 곧 서울이 불바다가 되고, 동경도 불바다가 되고, 미국도 불바다가 될 거야. 두고 보라구.”

이 여자는 어디서 가짜 뉴스까지 듣고 와서 떠드는 것이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지금은 이들이 훨씬 더 SNS를 통해 자기들 주장을 전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거의 가짜 뉴스였다. 그것을 전파하려는 의지는 정말 대단했다. 형도 선옥이도 수구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요즘은 많이 변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저런 주장이 카톡 등을 통해 하도 와서 이제는 카톡을 아예 안 보게 됐다고 불평을 말했다. 

여자가 악을 쓰면서 힘을 더 내서 서명대로 밀어붙이자 식구들이 다 달라붙었다. 조금 있다가 다른 서명대에 있던 사람들도 오고, 이 여자와 한 무리인 듯한 남자들이 달려들었다. 결국 경찰이 왔다. 젊은 여자 경찰과 의경 하나가 왔는데 경찰들이 폭력이나 위력에 의한 협박 혐의로 연행하겠다고 하자 소리를 치다가 투덜대더니 물러섰다. 경찰이 자기들 편을 들지 않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신돌석씨는 이들이 물러간 뒤 한동안 망연자실해졌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있는데 저렇듯 자기 생각을 고집하고 황당한 행동까지 하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저 여자는 건물주인데 지역 단체에 보증금도 없이 임대해 주어서 그 건물 1층에 있는, 직접 경영하는 호프집을 자주 애용했었다. 그래서 신돌석씨도 그 여자 얼굴을 아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런 행태를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여자 개인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다른 걸까? 공권력의 폭력이 누그러지고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되자 오히려 저런 사람들이 급격하게 수구 쪽으로 다가가는 경향도 보였다. 이른바 태극기 부대를 돈 주고 동원한 것으로만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신돌석씨가 주변에서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물론 돈 받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기 소신대로 행동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것을 소신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나라에서나 이념으로 갈리는 경향들이 있겠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분단의 현실과 전쟁의 경험이 이런 문제를 낳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돌석씨 자신도 저런 사람들처럼 막무가내는 아니더라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자랐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인지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는데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분명히 인식하기 어려웠다. 그런 걸 보면 저런 사람들이라고 해서 바뀌지 말란 법도 없다. 하지만 저 여자는 오히려 반대로 간 것 아닌가? 그건 왜 그런 것일까? 신돌석씨는 오랫동안 간직해 오면서도 일부러 외면했다고도 볼 수 있는 의문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북한은 무엇인가? 이런 점은 아직도 신돌석씨에게는 명쾌하게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어쩌면 앞으로도 오랜 시간 동안 풀리지 않을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시원스럽게 답해 줄 사람을 간절히 바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뭘 좀 알아 가면서 신돌석씨는 시원하게 아는 것보다는 순간순간에 정직하게 사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단칼에 베듯이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견해를 송두리째 버리고 반대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우리 사회 자체가 꼬여 있는 판에 이런 문제가 쉽게 풀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처음 공장에서 노조를 만들 때 북한을 의식해서 그런 일 못하겠다고 하던 사람도 있었다. 노조를 만드는 데 함께 하지만 조금이라도 좌경 용공으로 흐르면 자신은 노조 분쇄에 앞장서겠다고 못을 박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북한 정권과 군사 정권이 한 편이라는 논리까지 폈다. 그래서 북한이 군사 정권의 유지를 위해 자꾸 긴장을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신돌석씨 역시 북한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하지만 노조 만드는 문제와 그것을 연관시키지는 않았다. 신돌석씨에게 북한이라는 곳은 아주 먼 나라이고, 그냥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곳이라고 생각한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노조 만드는 데 지장이 생기는 것은 모두 노조 만드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방해 공작 때문이라고 여겼다.

해고당하고 활동가라는 사람들과 많이 접촉을 하면서부터 북한은 신돌석씨에게는 고민거리의 하나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돌석씨와 같은 조직에 있던 사람들은 북한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신돌석씨와 같은 현장 출신이면서 같은 조직의 대표격이었던 조철구도 북한 이야기는 좀처럼 하지 않았다. 그들이 원래 북한 문제에 관해 뚜렷한 견해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문제를 신돌석씨에게 말하는 데 조심스럽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신돌석씨의 의식 수준이 북한 문제를 털어 놓고 말할 정도까지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에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고 나중에 되돌아보니 그렇게 생각이 되었다.

▲ [삽화 - 김윤기]

신돌석씨가 조철구와 함께 다닌 사업장은 큰아들이 부장이었고, 둘째 아들이 실장이었다. 두 사람이 상무, 전무를 제치고 실세 구실을 하고 있었다. 노조를 만들려고 하던 노동자들은 이들을 일컬어 정일이, 평일이라고 하였다. 그때 북한 정권을 비아냥거리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그런대로 시청률이 높았기 때문에 이런 별명은 노동자들에게 반응이 좋았다. 그런데 노조 집행부가 회사측의 폭력으로 교체되고 무더기로 해고가 된 뒤 다른 사업장의 해고자들과 함께 복직투쟁을 벌여 나갈 때 문제가 생겼다.

“왜 하필 반북 의식을 고취하는 말을 쓰는 겁니까. 그런 말을 쓰는 것은, 노동자들이 그 회사 사장과 아들을 비판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그 과정에서 북한 정권을 조롱하는 마음이 싹튼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세요?”

가구 공장에서 해고된 학출 노동자 심영석의 말이었다. 신돌석씨는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공장에서 생긴 문제와 반북 의식이 무슨 관련이 있으며, 북한 정권을 조롱하는 마음이 싹튼다는 사실이 그렇게 문제가 될 일인가? 이때까지도 신돌석씨는 활동가들 사이에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둘러싸고 경향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어쩌면 이때의 경험이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한 첫 관문이었을 것이었다.

“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노동자들이 그걸 통해서 사장과 아들들의 문제를 잘 이해하면 되는 거지, 뭐가 문제란 말이요?”

신돌석씨는 발끈해서 소리를 쳤다. 그러면서 조철구를 쳐다봤다. 조철구가 뭔가 멋진 말로 반격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철구는 빙긋 한번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심영석은 신돌석씨의 강력한 대응에 좀 놀란 눈치였다. 나중에 생각한 것이지만 노동자들이 있는 곳에서 그런 문제로 논쟁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그때는 그런 일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해고투쟁과 지역 내 현장지원투쟁에 바쁜 나머지 북한과 관련된 문제는 신돌석씨 머릿속에서 일단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기보다는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해를 넘긴 어느 날 조철구, 장선우와 함께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이때 신돌석씨는 그 동안 궁금했던 문제들을 조철구에게 물어 보았다. 그럴 의도로 술을 마신 것은 아니었다. 말을 하다 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신돌석씨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었다.

“조형,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사회가 사회주의가 맞지요?”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조철구와 장선우가 긴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금세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조철구의 미적지근한 대답이었다.

“사회주의가 맞지요. 사회주의를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본가들이 우리에게 심어 놓은 이데올로기 공세 때문이지요.”

장선우가 이어서 말했다.

“그렇다면 북한과는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신돌석씨는 이 말을 꺼내 놓고 괜히 했나 보다고 후회했다. 이 말 때문에 두 사람과 더 이상의 대화가 힘들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장선우는 확신에 찬 듯 말하였다.

“북한이야 엉터리 사회주의이죠. 그런 사회주의는 우리 생각과는 달라요.”

장선우가 말하는 동안 신돌석씨는 조철구를 쳐다보았다. 신돌석씨는 사실 장선우보다는 조철구의 말을 듣고 싶었다. 조철구에게 영향을 받아서 노동운동을 시작했을 뿐 아니라, 조철구는 단칼로 베듯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신돌석씨의 생각을 한발씩 앞서서 이끌어 주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철구는 장선우의 말에 선뜻 동의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야기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그 날의 술자리는 다른 이야기만 하다가 파하게 되었다.

그해 봄에 한창 임금투쟁을 하는 사업장들을 지원하고, 새로이 생긴 해고자들을 조직하느라고 북한 문제는 신돌석씨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더 이상 그런 문제들을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 전해만 해도 반제투쟁을 한다고 하면 학생운동에서도 소수에 지나지 않았었는데, 해가 바뀌면서 새 학기가 되자 대학가가 반미투쟁의 분위기로 확 변해 가고 있었다. 특히 두 대학생의 분신자살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어서 노동운동권에까지 반미운동의 분위기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반미운동이 확산되면서 북한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쟁점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던 중에 더 이상 생각을 미룰 수 없게 만드는 팜플렛이 돌았다. 이른바 강철서신이라는 것이었다. 학생 출신 활동가가 교육선전부장으로 있는 현장에 다니는 노동자 한 명이 어느 날 그것을 소모임에 들고 왔다. 타자로 친 몇 장의 유인물을 보고 별 생각 없이 받아들었는데 내용을 읽어 가던 신돌석씨는 정말 벼락에라도 얻어맞은 듯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동안 이른바 팜플렛이라는 것을 여러 번 봤지만, 이렇게 충격적인 내용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뭐 이런 놈이 있나 생각했다. 혹시 안기부가 뿌린 것이 아닐까 생각도 했다.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라고 하는 내용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신돌석씨는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고, 또 그런 것이 왜 중요한지도 감을 잡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 속에서 불과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노동자들이 살 만한 나라가 있는데 그것을 보여 주면 된다고 하는 말이 있었다. 기가 막혔다. 북한이 그런 곳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이것은 노동운동을 친북집단으로 만들려고 하는 안기부의 공작일 것 같았다. 팜플렛을 들고 온 노동자는 아직 읽어 보지 않은 듯하였다. 어떤 녀석들이 이런 것을 노동자에게 주었는지 분노가 치밀었다. 그래서 소모임을 하는 노동자들에게는 별 내용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면서 주머니 속에 집어넣어 버렸다. 아무래도 먼저 누구와 상의를 해야 할 것 같았다.

▲ [삽화 - 김윤기]

신돌석씨는 다음 날 바로 그것을 들고 조철구를 만나려고 했다. 이때쯤에는 조철구가 지역에서 수배가 되는 바람에 만나기가 어려웠다. 조철구를 만나려고 하는데 뜻밖에도 지역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마리안느 수녀한테서 한번 보자는 연락이 왔다. 그 수도원은 노동자들이 모임을 할 수 있는 ‘함께 하는 집’이라는 곳을 운영하였는데, 현장에서 해고된 뒤 그곳에서 여러 가지 모임도 하고 교육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런 곳이 없었다면 아마 자신의 의식화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 모를 것이라고, 아니 어쩌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신돌석씨는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단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부 노동운동가들과는 달리 수도원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새봄이 되고 임금투쟁이 격화되면서 또 몇몇 사람이 수배되면서 경찰에 노출되어 있는 그곳에 자주 가기에는 좀 부담이 되기도 하였다.

마리안느 원장을 찾아간 시각은 밤이 좀 늦은 때였다. 수녀들만이 있는 수도원이라서 그런지 너무나 조용했다. 원장이 외부 사람을 접견하는 곳인 듯 응접실 같은 분위기의 방에 안내된 신돌석씨는 마리안느 원장이 자신을 왜 보자고 하는지 얼마간 얼떨떨한 마음을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5분쯤 기다렸을까. 방에 들어온 마리안느 원장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거두절미한다고 하면서 신돌석씨를 부른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말에 신돌석씨는 당황하였다. 이때 같은 분위기라면 노동운동을 지원하고 있는 수녀원에서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리가 없건만, 신돌석씨는 자기 고민에만 빠져서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안느 원장을 비롯한 수녀들은 신돌석씨를 매우 좋아하였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노동자 출신을 좋게 생각하였다. 어떤 수녀 하나는 신돌석씨를 우리 바웬사라고 부르면서 추켜 주기도 하였다. 그들은 신돌석씨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낸다고 한 말이었지만, 신돌석씨는 그 말이 별로 듣기 좋지 않았다.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이때부터 신돌석씨는 왠지 바웬사와 자기는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노동자 출신을 좋아하는 이유는, 노동계급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지식인들은 혁명적 의식이 물든 사람들이고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은 순진한 사람들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신돌석씨는 나름대로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요즘 사투라는 말이 한창 유행이라지. 사상투쟁이라는 말말이야. 우리는 노동자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지만, 사투에 무관심할 수만은 없어. 최근에 벌어지는 사투를 보면 자민투도 있고 민민투도 있는 것 같은데, 돌석이나 철구는 어떤 생각인지 한번 물어보고 싶어서 오라고 했어.”

이 사람들은 조철구에 대해서는 좋아한다기보다 높게 평가했다. 특히 마리안느 원장은 조철구를 노동운동을 이끌고 갈 큰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활동비도 가끔씩 주는 것으로 신돌석씨는 알고 있었다. 그런 사이였으니 이들이 두 사람을 비롯한 신돌석씨 조직 사람들의 생각을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아마 마리안느 원장은 조철구를 만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지금쯤 연락을 취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신돌석씨를 통해서 만나려고 하는 것일 게다.

신돌석씨가 별 이야기를 하지 않자 마리안느 원장은 말을 이어갔다.

“알다시피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야. 친북 세력이나 극단적인 반미주의자와는 함께 할 수 없지. 돌석이네가 자민투와 가깝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도 궁금한데…”

▲ [삽화 - 김윤기]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민투는 그해 봄부터 학생운동의 다수를 장악하기 시작한 이른바 민족해방계열을 말했다. 민민투는 그 전해까지 학생운동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경향을 말하는 것이었다. 마리안느 수녀는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아도 자민투 계열은 자신들이 지원해 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그 뒤에 진행된 일들을 생각해 보면 세상 일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개헌 투쟁이 벌어지면서 마리안느 수녀를 비롯한 종교인들은 자민투 계열과 오히려 가까워지고 민민투 계열과는 멀어졌다. 그것은 자민투 계열이 ‘직선제 개헌’을 주장했고, 민민투 계열의 핵심들이 ‘제헌의회 소집’을 주장하면서 강한 물리력을 동원한 가두시위를 주로 벌여 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87년 이후에 이들은 이전에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반미 주장을 하였다. 신돌석씨는 각 개인이나 세력의 생각이 변해 가는 과정을 보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이나 세력은 드물었다.

안타깝게도 당시에 신돌석씨는 자신이 속한 조직이 어느 계열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자민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민민투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민민투의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여러 명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는 사실 잘 모릅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친북 세력과는 함께 하지 않을 겁니다. 최근에는 만나지 못했지만 조형도 그러리라고 생각해요. 미국은 광주에서 군사독재를 지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군사독재를 미국이 지원하는 한 우리는 미국을 반대할 겁니다. 하지만 극단적인 반미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마리안느 원장은 신돌석씨의 말에 만족스러운 듯 환한 웃음을 지었다. 수도 생활을 해서 그런지 그녀는 얼굴을 보아도 나이를 알기가 어려웠다. 스카프 옆으로 나온 머리가 희끗한 것을 보면 적지 않은 나이일 듯한데, 세속인과는 달리 그런 흰머리에 비해 피부는 매우 깨끗하였다. 그녀의 얼굴을 흘낏 보다가 신돌석씨는 자신이 과연 제대로 말한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어쨌든 마리안느 원장을 안심시킬 수는 있었지만, 왠지 흡족하지 못한 말을 한 듯하였다. 더욱이 자신이 조직의 견해를 대변해도 좋은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마리안느 원장은 신돌석씨가 속한 조직을 ‘돌석이네’라고 불렀지만 그것이야 그들이 신돌석씨와 가장 친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사실 그런 문제야 돌석이보다는 학생 애들이 더 잘 알겠지. 아무튼 내가 철구를 한번 만나 봐야겠어. 경찰에 쫓긴 뒤로는 여기 나타나지 않으니 만날 길이 있어야지. 돌석이가 한번 연락해주지 않겠어? 여기 오는 게 부담스러울 테니까 내가 서울에 있는 수도원을 알려 줄 테니 거기로 오라고 해. 날짜와 시간만 미리 잡으면 될 거야.”

결국 마리안느 원장이 신돌석씨를 보자고 한 것은 조철구와 연락을 하기 위해서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학생 출신 지식인들을 꼭 학생이라고 일컬었다. 이들이 갖고 있는 그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의 표시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만나려고 하던 조철구였는데, 이런 일도 있고 해서 급하게 연락하여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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