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완전히 잊어버린 줄 알았던 김대중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은 군대 갔다 온 뒤 들어간 공장에서 조철구란 사람을 만나서였다. 물론 그 사이에 김대중이 복권되고 다시 잡혀들어 가고 한 것을 언론을 통해 언뜻언뜻 들었지만 신돌석씨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조철구를 만나서 같이 술 마시면서 즐겁게 지냈다. 그러다가 횃불이라는 친목회를 조직했다. 신돌석씨는 조철구를 그저 좋은 사람이고, 뭘 좀 많이 아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대학까지 다녔던 사람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더욱이 그가 데모를 해서 감옥에 갔다온 사람이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쾌활하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조금이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여자 있는 술집에 가도 그는 여자를 건드리는 일이 없었다. 그냥 옆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농담을 하는 정도였다. 그러므로 그가 감옥에 갔다 왔던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언젠가 술을 마시다가 조철구가 김대중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자기가 어렸을 때 김대중 유세를 구경 갔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80년에 동국대학교에서 있었던 대중 집회에서 김대중 연설을 들은 이야기도 했다. 신돌석씨는 조철구 이야기를 들으면서 묘한 흥분을 느꼈다. 오랫동안 기억 저편으로 묻어 두었던 일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뒤에 생각해 보니 아마 조철구는 그런 점을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꺼낸 것 같다. 노동자들의 기억 저편에 묻혀 있는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생각을 끄집어내려고 하였을 것이었다. 나중에 조철구가 학생 출신이라는 것이 알려진 뒤에 그 술집의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조철구가 김대중 이야기를 할 때부터 뭔가 인텔리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조철구의 말이 상당히 조리 있더라는 것이었다.

▲ [삽화 - 김윤기]

그렇다고 해서 조철구가 그런 이야기를 티나게 시작하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 전날이 일요일이었는데 신촌에 나갔다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신촌에서 볼 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버스를 타고 영등포로 가는데 길가에 경찰이 쫙 깔려 있더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동교동이더라고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김대중에 관한 자신의 추억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조철구는 이런 이야기를 일장 연설식으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도중에 적절하게 끼워 넣었다. 만약에 듣는 사람들의 반응이 시큰둥하면 얼른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신돌석씨는 조철구가 말하는 방식에 익숙해져서 인텔리라면 누구나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끄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인텔리들을 많이 대해 보니 조철구처럼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었다. 자기주장만 계속 하면서 남의 이야기는 잘 들으려 하지 않는 인텔리들이 더 많았다. 그런 사람들을 대하면서 조철구처럼 말하는 것을 익혀야 하겠다고 했지만 좀처럼 되지 않았다. 타고난 성품도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조철구처럼 말하기 때문에 주장하는 바가 분명하게 전달되지 않고 듣는 사람이 자의적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철구가 있던 조직에서 같이 일하게 된 뒤 87년을 맞이했고 대선 기간 동안 김대중은 신돌석씨에게 풀지 못할 숙제를 던져 주었다. 신돌석씨가 속해 있던 조직만이 아니라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김대중을 공공연하에 지지하지는 않았다. 김대중을 내심 지지하고 있던 사람들도 이른바 ‘비판적 지지’라는 말을 썼다. 그 상대편에 독자후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 대세는 ‘후보 단일화’였다. 후보 단일화를 주장하는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중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양김씨가 단일화하여 군부독재를 끝장내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신돌석씨는 그 점에 관해서는 세월이 흐른 지금 생각해 보아도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후보 단일화의 한 축에 김대중이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진정으로 후보 단일화를 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김대중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독자후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진정 후보 단일화를 바라는지 의심이 드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해 겨울에 신돌석씨는 16년 전에 보았던 것과 비슷한 광경을 중랑천변에서 있었던 김대중 후보 연설회에서 볼 수 있었다. 그날 따라 날씨가 몹시 추웠다. 중랑천변은 하천가였으므로 체감 온도가 훨씬 더 떨어졌다. 군중이 중랑천변을 가득 메운 지 두 시간이 넘도록 김대중은 오지 않았다. 해가 지기 전에 이미 사람들이 꽉 들어찼는데 해가 지고 깜깜한 한밤중이 되어 버렸다. 세 시간 가까이 지났을 때 김대중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때까지 집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여론은 ‘후보 단일화’라는 대의명분을 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유세장에서의 광경은 그러한 대의명분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듯하였다. 내가 아니면 여러분들의 한을 누가 풀어 주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김대중은 선동을 하였다. 신돌석씨도 분위기에 젖은 때문이었을까, 김대중의 말에 공감이 갔다. 그리고 군중과 함께 흥분이 됨을 느꼈다. 하지만 그 자리를 벗어나서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그것은 후보 단일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길로 가는 것이었고, 결국 대선 패배와 군부의 재집권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신돌석씨가 속해 있던 조직은 노동운동단체들이 모여서 구성한 ‘노동자선거대책본부’(노동자선대본)라는 조직과 함께 움직였다. 거기에서는 노동자의 관점에서 대선을 치러야 한다는 것만 합의된 상태였다. 극단적인 비지파(비판적지지파)는 배제하였고, 독자후보론을 주장하는 단체나 정파들은 들어와 있기는 하였지만 전체적인 견해가 그렇게 모아지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노동자선대본의 결정은 대단히 추상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 가능한 것이었다.

후보 단일화가 좌절되자 결국 노동자 선대본은 아무 결정도 못 내리게 되었다. 이 조직은 대선 이후 88년에 노동운동단체들이 협의회를 만드는 초석이 되기는 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무능한 모습을 보여 주고 말았다. 신돌석씨가 속해 있는 조직도 아무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후보 단일화의 결렬이 기정사실로 되자 그 중 나은 사람을 지지하자는 이른바 ‘선택적 지지’를 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소수의 견해에 머물렀다. 일부는 독자 후보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독자 후보였던 백기완 후보가 사퇴하자 그것마저 물 건너 가 버렸다. 신돌석씨가 보기에 조철구는 김대중 지지 쪽에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선 기간 중 언젠가 조철구와 단 둘이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나도 김대중의 한계를 알지. 하지만 그를 딛지 않고 우리가 어디로 갈 수 있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그와 김영삼을 동격으로 치부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어. 김영삼이야 시류에 따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극단적으로는 군부와 손잡을 가능성도 있지. 하지만 나는 이런 말 못해. 내가 말하기만 하면 호남 출신이니까 그런다고 하니.”

그랬다. 지역에 있던 다른 조직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조직 내에서도 조철구의 출신 지역을 거론하면서 그러니까 김대중에 우호적이라는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조철구는 고등학교까지 호남에 있는 한 도시에서 다녔다고 했다. 서울 와서 대학을 다녔는데 어린 시절에 김대중에게 받은 강한 영향을 쉽게 잊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가 보기에 김대중은 적어도 중도 좌파 이상은 되는 사람이고, 어쩌면 중도 좌파보다 더 좌쪽일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리고 적어도 좌파를 소상하게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조철구의 이런 분석을 어느 정도는 수긍하였다. 그것은 직접 느껴 본 것이기도 했다. 87년에 6월 항쟁과 7, 8월 대투쟁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서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자 후보가 될 만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강연을 하곤 했다. 특히 그 동안 강제로 활동이 정지되어 있던 김대중은 여러 단체를 찾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람들과 접촉하려 하였다.

10월쯤으로 기억되는데 인천에서 노동운동단체들이 김대중을 초빙해서 강연을 듣고 질의와 토론도 하는 집회를 연 적이 있었다. 신돌석씨는 조철구와 함께 거기 갔었는데, 그 자리에서 김대중이 한 이야기를 듣고 정말 깜짝 놀란 경험이 있었다. 김대중은 그때 영국 노동당에 대해 말했었다. 영국 노동당은 자유당과 손을 잡고 일단 자유당을 밀어 주어서 보수당을 밀어낸 뒤 그 다음에 자유당과 경쟁해서 집권당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영국의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서 우리나라의 노동자들도 자기를 밀어서 군부독재세력을 몰아내고 그 사이에 정치세력화가 되어서 자신과 경쟁하는 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참으로 그럴 듯한 말이었다. 그 말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그 정도의 식견과 시각으로 보수정치인이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움으로 다가왔었다.

▲ [삽화 - 김윤기]

하지만 결국 김대중은 패했다. 김대중만 패한 것이 아니라 민주화세력 전체가 군부독재세력에 패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김대중은 이미 그걸 알고서 후보단일화를 결렬시키려고 했다고 하였다. 그들의 생각을 간추려 보면 이러했다. 김대중으로서는 김영삼을 밀어준 뒤 김영삼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정 지분을 지닌 야당 총재가 되는 것이 낫다고 여겼을 것이다. 따라서 일정 지분을 가진 야당을 만든 뒤 그것을 발판으로 세력 확장을 꾀한다는 것이 김대중의 전략이었다.

김대중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 가능성은 있다고 신돌석씨도 생각했다. 그렇지만 가능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김대중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들은 김대중의 식견이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식견이나 능력이 불신의 이유가 되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김대중은 좌파를 잘 아는 사람이고, 그 자신이 젊은 날에 좌파였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좌파를 궤멸시킬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정권을 잡는 날에는 가공할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두려움 때문에 처음부터 손을 잡는 대상에서 배제한다는 태도가 신돌석씨로서는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되었다.

집에 도착하자 아내는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투표를 하고 여기 저기 돌아다닐 계획이라고 하였다. 아내는 이번 대선에서는 노무현을 지지해야 한다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아내도 정몽준이 어제 한 일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는 그런 일을 앉아서 화만 내고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동네 친목계 사람들에서부터 처남, 처제 들을 만나서 투표하게 하고, 꼭 노무현을 찍게 해야 한다고 하루 일정을 잡아 놓고 있었다. 신돌석씨는 아내의 그런 적극적인 성격을 보고 때로는 덜렁댄다고 핀잔을 주기도 하였지만, 내심으로는 부럽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번 문제는 단순히 성격의 문제는 아니었다.

아내의 견해는 확고했다. 이번 대선에서는 노무현을 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고, 그것을 통해서 현실적인 개혁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것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할 일 없는 사람들의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것이 아내의 말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길 수 있는지 부럽기까지 하였다. 87년에는 아내는 오히려 독자후보를 밀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명쾌하게 정리된 논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는 노동자를 가장 잘 이해하는 노동자 편을 찍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던 아내가 90년을 거치면서 김대중 지지로 바뀌었다. 아마도 90년에 있었던 사건이 아내로 하여금 현실적인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던 것 같았다.

아내도 물론 갈등이 없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전철역에서 목청껏 외치고 있는 민주노동당 청년 당원들을 보고 오는 날이면 왠지 기운이 빠져 있는 듯하였다. 언젠가 한번은 무상 의료, 무상 교육이라는 민주노동당의 구호를 듣고 와서는 진짜 가능할까 라고 신돌석씨에게 묻기도 하였다. 신돌석씨는 그 틈을 타서 당장은 가능하지 않더라도 민주노동당에 많은 표를 주어야 멀지 않은 시기에 가능해질 수 있음을 힘주어 말했다. 힘찬이나 아름이가 어른이 되기 전에 그런 날이 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아내는 잠시 흔들리는 듯하였다. 그러나 금세 고개를 저었다. 이회창이 되면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무현을 지지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묶어세우지 않고서 무슨 변혁이 가능하냐고 되물었다. 이런 식으로 벌어지는 두 사람의 논쟁은 대선 기간 내내 매일같이 되풀이되었다. 물론 아내는 일관된 생각이 있었고, 신돌석씨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므로 논쟁의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항상 신돌석씨는 아내에게 패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신돌석씨도 긍정적으로 보는 점이 많았다. 장선우의 말처럼 노무현이 미국의 분단 관리자라는 역할에 머물 것이라는 따위의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더 기승을 부려서 노동자에 대한 공세가 강화될 것이라는 생각도 역시 수긍할 수가 없었다.

▲ [삽화 - 김윤기]

신돌석씨는 노무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집회가 있었다. 88년 가을에 북한산에서 있었던 노동법 개정 등반대회였다. 87년에 부산지역에서 6월 항쟁에 앞장섰던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노무현을 처음 알게 되었고, 7,8월 노동자 대투쟁 때 노무현이 대우조선 파업 투쟁을 적극 지원하다가 구속되었던 점 때문에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다. 그때 판사가 기각한 영장을 검사가 판사를 쫓아다니면서 청구했다는 이야기는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진 이야기였다. 하지만 노무현을 직접 보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노무현은 그 자리에서 노동법을 개정하지 못하면 금배지를 떼서 던져 버리겠다고 해서 노동자들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다.

그때는 정말 세상이 그냥 저절로 앞으로 나아가는 줄 알았다. 이전의 지하 활동에서 벗어나서 공개적인 사무실을 얻어서 활동한다는 것도 그랬고,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모여서 ‘광야에서’ 등을 부를 때는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었다. 신돌석씨가 다니던 현장에서 처음 파업 투쟁이 벌어질 때는 함께 부를 노래가 없어서 ‘진짜 사나이’를 개사해서 부르기도 했었다. 그리고 노조를 만든 뒤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노총가’ 등을 배워서 불렀었다. 하지만 87년 이후 노동자들이 부를 수 있는 노래는 급속하게 확대되었다. 특히 정치적인 문제가 담긴 노래들을 노동자들이 함께 부르는 것을 들을 때면 왠지 숙연해지기도 하였다. 신돌석씨는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누구와 가든지 마지막 노래를 ‘광야에서’로 부르려고 하였다. 그처럼 감동이 저절로 생기던 시절에 노동자의 편에서 적극적인 발언을 하던 노무현이었으므로 인상이 깊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돌석씨가 노무현을 신뢰하는 가장 큰 계기는 청문회 때 전두환에게 명패를 집어 던지는 것을 보고나서였다. 그때 신돌석씨는 이 사람은 정말 순수한 점이 있구나, 믿어도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점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좀더 나아가서 괜히 말만 앞세우는 노동운동권 인텔리들보다 훨씬 신뢰할 만하다고 하곤 하였다. 그런 말을 할 때면 신돌석씨와 언쟁이 벌어졌다. 신돌석씨도 말만 앞세우는 인텔리들이 노동운동권에 적지 않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마치 노동운동가들은 으레 말만 앞세우는 사람들인 양 이야기될 때는 화가 나기도 하였다.

아내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노무현을 찍어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권영길과 비교를 하기도 하였다. 권영길도 훌륭하기는 하지만 이 시대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은 노무현이라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이 말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노무현은 어쨌든 보수정객들 속에서 개혁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다소 진보적인 성향을 띄었는지는 몰라도 보수정치인이 아닌가? 진보운동을 위해서 온갖 시련을 마다하지 않고 살아온 권영길 대표와 어찌 비교한단 말인가? 하지만 아내는 그런 기준에 대해 냉소적이었다. 그런 말을 하면 인텔리들과 놀더니 공리공론만 늘었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하였다. 아내와의 논쟁은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은 채 서로 다른 소리를 하면서 계속되기만 하였다.

아내와 함께 아침을 들고 투표를 하고 난 뒤 신돌석씨는 회사로 가서 회사 사람들과 함께 대천으로 회를 먹으러 갔다. 대부분 조합원들이지만 간부도 몇 명 끼어 있는 모임이었다. 중소기업이라서 그런지 나이가 좀 든 편인 사람들은 간부와 선을 긋고 지낸다는 것이 어려웠다. 작년에 새로 생산부장으로 승진한 사람은 현장 분위기를 가족적인 분위기로 만들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나이가 좀 든 사람들을 중심으로 함께 놀러 가는 것을 좋아하였다. 신돌석씨도 그 때문에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함께 놀러 가는 것을 좋아하였다. 카니발 두 대 정도에 나눠 타고 밤낚시도 가고, 바다낚시도 갔다. 이 날도 그가 나서서 노는 날이니 대천에 가서 회를 먹자고 해서 모이게 된 것이었다.

회사에서 차를 타고 가면서, 그리고 도착하여 회를 먹으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대선 이야기는 이따금씩 나오다가 맥이 끊긴 채 다른 이야기로 옮겨 가곤 하였다. 서로 피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정몽준이 욕을 했는데, 간부들은 노무현이 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말만 했다. 노무현이 되기 어렵다는 것인지, 아니면 노무현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물론 중소기업의 간부라고 하는 자리가 사실 노무현에게 거부감을 느낄 정도로 기득권층인 것은 아니었다. 특히 신돌석씨 회사는 사장이 재야 운동을 하던 사람들과 어느 정도 친분 관계가 있어서 그런지 간부들이 대부분 한나라당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진보 세력 또는 개혁 세력이 집권하기를 꼭 바라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닌 듯하였다.

점심 때쯤 도착해서 회를 먹고 술을 마시고 있는데 강성욱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출구 여론 조사로는 현재 박빙이라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젊은 층들이 투표를 많이 하도록 전화를 걸자는 것이었다. 박빙이라고 하니 갑자기 힘이 나는 느낌이었다. 모인 사람들에게 말하니 전화해야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술을 마시며 전화를 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아내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형한테 전화를 해서 한 표라도 늘려야 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알았다고 하면서 끊었지만 썩 내키지는 않았다.

열흘쯤 전에 형을 만난 일이 있었다. 형은 이전처럼 김대중 욕을 했고, 노무현 욕도 했다. 노무현은 김대중 양자라고 하는, 한나라당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참다못한 신돌석씨가 소리를 질렀다. 형은 무엇 때문에 가진 자 편을 드느냐고 하였다. 형이 군대에 가지 않았다면 우리집은 좀더 낫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 집에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형도 비록 현역은 아니지만 방위로 가서 18개월을 보냈다. 그런데 이회창은 아들 둘이 이유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군대에 가지 않았다. 먹고 살 걱정은 터럭만치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형은 가진 자들에 대한 울분도 없냐? 그런 노예근성이 형의 모습이냐? 이런 식이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형과 다소 언쟁은 벌였어도 이런 적은 없었다. 신돌석씨는 자신이 그렇게 말한 것보다 형의 반응이 정말 놀라웠다.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그냥 됐다 됐다 라는 말만 했다.

▲ [삽화 - 김윤기]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데 뜻밖에도 지수가 전화를 했다.
“작은 아빠, 아빠가 투표하러 갔어요. 놀라지 마세요. 노무현을 찍는대요. 어제 정몽준이 한 짓 보고 아빠도 못 봐 주겠대요. 작은 아빠 놀랐지요. 어젯밤에 지훈이와 내가 뭐했는지 아세요? 둘이 나가서 조선일보 무가지들 수거하러 다녔어요. 인터넷에 글이 올라왔어요.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 이후에 조선일보가 윤전기 돌리던 것을 멈추고 새로 특별 사설을 썼대요. 그리고는 무가지를 대거 만들어서 여기 저기 뿌리고 다닌대요. 나와 지훈이는 아깝게도 투표권이 없잖아요. 이런 일이라도 해야지요. 그래서 돌아다녔어요. 정말 여기 저기 뭉텅이로 뿌려졌더군요.

그리고 새벽 3시쯤에 들어와서 아빠와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울었어요. 지훈이까지 나섰어요. 이회창이 되면 군대 안 가고 도망 갈 테니 그렇게 알라고까지 아빠한테 말하더라구요. 말을 끝내고 난 뒤에는 후회했어요. 아빠가 너무 안 돼 보였어요. 그런데 오늘 아빠가 투표하러 가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아직 뭐가 뭔지 확실하게는 모르겠다만 우리나라가 이전 같아서는 안 될 것 같다구요. 옛날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구요.”

지수는 울먹이기까지 하였다. 지수가 학생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인터넷을 통해서 상당히 진보적인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젯밤의 일은 정말 뜻밖이었다. 새삼 인터넷의 위력이 놀라웠다. 그리고 신돌석씨 자신은 그때 술이나 먹고 있었다는 사실이, 공론이나 주고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미어지게 하였다. 이러다가 정말 뒷전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신돌석씨는 이를 악물고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전화기에 등록된 번호를 빠짐없이 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돌석씨는 그때 일을 생각하면서 지금과 무엇이 다르고 변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 뒤 두 번씩이나 수구세력에 정권을 주었다. 물론 김대중, 노무현 때 신자유주의가 더 강해졌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사회 전반의 변화는 확실한 것이었다. 진보세력도 그 사이 많이 전진했다. 하지만 수구세력의 정권 9년 동안 정말 민중은 고통스러웠고, 진보세력도 많은 탄압을 받으면서 위축되었다.

형을 생각하면 수구세력의 세뇌에 완전히 사로잡힌 듯하던 사람들도 변할 수 있다. 형은 그 뒤 점점 더 나아가서 노회찬 의원이 죽었을 때는 진보정당에 가입하겠다고까지 할 정도가 되었다. 이제 정말 거대한 뿌리가 흔들린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뿌리는 저 밑에 친일파에까지 닿아 있다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상식이 되어 있다. 그 뿌리에 한 귀퉁이라도 들어올릴 수 있다면, 아니 들어올리는 사람의 뒤라도 밀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돌석씨는 어쨌든 해묵은 논쟁 같지만 그 속에 모두 진리가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수구세력의 재집권은 무슨 수를 써도 막아야 한다. 나아가서 그들을 궤멸시켜야 한다. 동시에 진보세력이 세를 모으면서 전진해 가야 한다. 그러려면 공동행동을 조직해야 한다. 그렇다! 당장의 적폐 청산이나 판문점 선언 실천을 위한 행동에 우리 가족 모두 나서자고 하자! 아마도 아내도, 아들도, 딸도, 사위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는커녕 좋다고 찬성할 것이다. 그 선에서 우리 가족 모두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공통의 목표를 찾아나가자. 그해 겨울의 매서웠던 바람이 훈훈하게 다가왔던 기억이 신돌석씨를 새삼스럽게 행복하게 하였다.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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