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998년부터 북녘에 나무심기 사업을 해 온 성재경 제일유통 대표. 최근 정부의 남북경협기업에 대한 피해지원 과정에서 지원은 커녕 억울한 오명을 뒤집어쓰고 울분을 삭이고 있다. 성 대표가 북에 보내기 위해 키우고 있는 우산고로쇠 나무를 어루만지고 있다.[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동해안 최북단 강원도 고성군 대진항에는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낮밤을 가리지 않고 나무심기와 정치망 어장사업에 몰두하고 있는 성재경(74)이라는 농사꾼이 살고 있다.

그는 한때 전기, 건설자재상을 업으로 삼기도 했지만 나무 심는 일을 너무 좋아해서 32년 전에 이미 경남 사천 2만평 임야에 편백림을 조성했고, 산청군 지리산에도 1만2,000평에 나무를 심었다.

‘나무쟁이’를 자처하는 성재경씨의 운명은 1996년 황해남도 옹진이 고향인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고향 땅에 나무 심는 일을 당부하면서 자연스럽게 북으로 이어졌다.

1998년 처음엔 중국 훈춘에서 북으로 1,450만주(그중 150만주는 백두산과 나진지역)의 묘목을 넘겼고, 황해북도 개풍군 묘목장에서 1,450만주의 어린 나무를 키웠다. 평양의 내버려진 땅 11군데 41헥타르를 수습해 5만5,000주의 과수를 심었다.

그는 ‘통일부 승인번호 제2005-45호 남북경제협력사업자’인 제일유통을 세워 당시 엔지오(NGO)들이 하던 무상지원 방식이 아니라 철저히 남북경협사업 방식으로 나무심기를 시작했다.

북쪽이 토지와 인력을 대고 성재경 대표는 묘목과 비료, 농약 등 초기투자와 관리비, 기술을 전적으로 책임진 후 목재로 팔 때 수익을 나누는 독창적인 방식이었다.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대규모의 장기적인 투자였지만 ‘나무가 기본’이라는 믿음이 강했던 그는 ‘사람에 앞서 나무부터 통일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일에 매진했다.

소 목장과 버섯농장으로 확대되던 경협사업은 2005년 북 강원도 고성에 정치망 어장을 설치하는 사업에 합의함으로써 또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그러나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중단된 금강산관광과 연이어 터진 2010년 5.24 대북제재 조치는 경협사업으로 향했던 그의 운명에 돌이키기 어려운 상처를 입혔다.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사업의 앞날이 뿌옇게 흐려지고 가족을 비롯한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은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자라는 나무가 있었고 매일 나가는 동해 고성 앞바다 정치망에서 걷어 올리는 고등어가 있어 견딜만했다.

올해 들어 남북 사이에 조성된 평화분위기와 관계개선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묵혀 두었던 북측과의 계약서를 들여다보는 날이 많아졌다.

지난달 초 정부가 5.24조치와 금강산관광 중단 조치로 인해 피해를 당한 남북경협기업에 1,200여억 원을 지원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재기의 의지를 가다듬었다. 

앞서 영국으로 건너 간 막내딸을 불러들여 묵은 서류도 다시 정리하고 자신은 직접 중국 단둥으로 건너가 북측에 있는 나무 등 자산 확인서도 받아서 제출한 터였기 때문에 다 잘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국가의 책임성 차원의 지원’이라는 정부의 발표도 있었기 때문에 여러 현실적인 상황을 감안해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협조하자는 생각이 컸다.

그래서 피해 규모를 줄이고 줄여서 서류를 제출했는데 최종 지원액을 확정하는 심사평가위원회로부터 제출한 서류가 가짜라는 날 벼락같은 통보를 받았다.

피해 입증 서류를 발급해 줄 수 있는 단둥 민경련 대표는 과거 개풍묘목장 사업 담당자였던 만큼 사업경과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류 보완요청을 했을 때에도 다른 기업들에는 해주지 않던 민경련 명의의 확인서(2018년 3월 23일자)까지 발급해 주었고, 이걸 심사평가위원회에 제출했던 터였기 때문에 충격은 더 컸다.

2005년 북측 강원도 고성 앞 바다에 정치망을 설치하기로 했다가 금강산관광 중단으로 지금까지 표류하고 있는 어장사업과 평양과수농장, 평양 중화군 소 목장 등 피해 청구조차 하지 않은 사업도 많았다.

사실 피해지원을 받아봐야 실제 피해를 복구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었지만 최소한 자식들에게만큼은 아버지로서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진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하다 보니 오히려 정부 돈 받아내려고 가짜 서류나 들이미는 이상한 늙은이 취급을 당한 것이 두고두고 분하고 억울했다.

이제 곧 북에 가서 마무리하지 못한 사업을 재개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러다간 모든 게 무너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면 마음이 아득했다.

지난 2일 오후 철조망 사이로 하늘과 동해 바다가 보이는 강원도 고성 대진항에서 만난 성재경 대표는 정치망 어장 사업하는 이곳 선원들과 먹고 자고 하면서 새벽 2시면 일어나 배를 타는 ‘금수’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고개를 떨구었다.  

“정말 억울한 것은 제가 전쟁 물자를 취급했습니까? 저는 나무심기, 소 목장, 과수농장, 고기잡이(정치망 어업), 묘목장사를 했습니다”라고 꾹꾹 담아두었던 억울한 심경을 토로했다.

또 “그동안 저는 정부에서 돈 한 푼 지원받지 않고 저와 가족의 자금으로 사업을 했습니다. 이 사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남과 북 당국에 호소했다.

아래는 일문일답. 가급적 성 대표의 입말을 그대로 살렸다.

나는 나무 심는 사람...아버지 당부가 북으로 이끌어

▲ 몸은 굽었지만 강건한 정신은 형형한 눈빛과 표정으로 여전히 표표하다.[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통일뉴스 : 북쪽과 경협사업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 성재경 : 1997년에 중국에 들어가서 1998년도부터 시작했죠.

□ 1998년부터 처음 시작한 일이 나무심기 사업인가.
■ 나무 심는 것부터 했는데. 처음에는 북한에 신경도 안 썼어요. 우연치 않게 연길 연변대학과 연결이 되어서 3년 동안 거기에 가지는 않고 장학금만 조금씩 주었죠. 그러는데 우리 얘가 중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이왕이면 아는데 가보자고 해서 중국에 가게 됐어요. 딸 둘이 연변대학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나는 나무 심는 사람이니까 거기서 나무를 심었어요. 98년부터 나무 심을 땅을 구했죠.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에 이렇게 까지 빠져들 생각은 없었어요. 처음엔 북쪽을 목적으로 한 일이 아니었어요."

□ 그때는 진주에 계셨던 때인가.
■ 그렇죠. 그걸 검증 많이 받았어요. 정보기관에서 따라 붙어서는 전기사업을 하던 당신이 어째서 나무 심는 일을 하겠다고 북쪽에 가느냐며 뒤를 캐기 시작했어요. 그게 말이 안 되지 않느냐는 거였죠. 그땐 부산에서 두 사람이 왔었어요. 나도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어서 답답하더라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가 나무 기르던 곳(경남 사천, 지리산 산청)이 있어서 거길 알려주었더니 그 사람들이 양복에 구두 차림으로 지리산 속을 다 타고 다녀보고 나서는 '당신 나무 심는 사람 맞다'고 인정하더라고요. 

나무는 거짓말을 못하지 않아요. TV나 냉장고처럼 옮겨 놓을 수도 없는 것이고 시간이 지나야 크니까. 그러고 나서는 북쪽에 보낼 목적으로 중국에 묘목장을 했는데 정보기관에서 거기까지 와서도 확인을 하더라고. 거꾸로 북쪽에서도 똑같은 의구심을 가지고 '네가 나무 심으러 오는 목적이 무엇이냐'며 직접 오지는 않고 전화로 다 확인을 했어요.

□ 중국 농장은 어디 있었나.
■ 주로 훈춘이죠. (북쪽과)가까우니까.

□ 북과의 사업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 96년에 돌아가신 아버님 고향이 황해남도 옹진군입니다. 내가 거기서 국민학교 1학년 때 나와서는 연평도로 피난 와서 교육을 받았어요.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고향에 나무 심는 일을 당부하셨어요. 처음에는 그다지 심각하게 듣지 않았었는데... 

중국에 나무를 심다보니까 그때는 거기 사람들도 나를 좀 이상하게 생각했었어요. 무슨 공장을 하던지, 뭘 갖다 내다 팔던지 하는 것도 아니고 나무를 심겠다고 하니 이해가 안 되었던 모양이라. 한국 사람이 내가 처음인 것 같더라고. 

□ 쉽게 이해가 안 되는데, 중국에 땅을 구해서 나무를 심으면 어떤 이익이 남나.
■ 여기서 나무를 심으려면 땅을 사야 되는데, 땅값이 비싸지 않아요. 그런데 거기는 땅을 공짜로 주지 않아요. 그때 중국 훈춘 쪽에 계약한 땅이 김포공항(약 300만평) 10개 정도 면적이었어요. 원대한 꿈을 꾸고 들어갔죠. 

전부 임업만 한 것은 아니고 소, 양도 키우고 해 나가면서 임업도 한 부분으로 진행했는데, 실제로 중국 사람들하고는 사업이 잘 안되더라고. 

그래서 그 너른 땅에 철조망을 얼추 다 쳐주었잖아요. 내가 친 철조망만 1,000~2,000 헥타르 정도 됐어요.

□ 원래 계획은 그곳에 묘목심어서 크고 나면 중국에 팔려고 했던 것인가.
■ 그렇죠. 그런데 묘목심어서 판다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해요. 그때는 그 사람들이 나무를 잘 몰랐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나무가 쌀보다 수확이 낫다는 걸 알고는 '아 여기에 도리가 있다'고 하면서 나를 따라서 나무를 많이 심었죠.

□ 소나 양 키우는 일도 직접 하셨나.
■ 내가 직접 했죠. 그런데 한국에도 사업체가 있으니까 자주 못가지 않아요. 이 사람들이 자꾸 잡아먹고는 병들어 죽었다고 하는데... 

북쪽에도 소 농장이 있지만 거기도 똑 같은 원리이더구만요. 안되겠더구만. 그렇게 투자는 실컷 하고 손해는 많이 봤어요.

□ 그때 투자해서 얼마나 손해를 보셨나.
■ 손해 많이 봤죠. 중국과 북한을 140번을 갔습디다. 얼마 전까지 단둥 민경련 대표부하고 북쪽의 묘목장 다닌데다가 훈춘 농장하고 베이징도 다녔죠. 중국 쪽에는 토지를 30년 쓸 수 있도록 계약이 되어 있었으니까. 요즘은 중국엔 안다닙니다.

그때 연길에서 교회에 다닐 때 보면 예배 마칠 때까지 북에서 온 분들이 문 앞에 있곤 했었는데 당시에는 예사로 생각했어요. 뭐 고향이 거기니까 다른 사람보다는 많이 생각을 했었지만 나무를 심으러 북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중국에서 나무를 심다보니까 북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내가 북쪽에 나무를 심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무가 기본이라요. 뭐이든지. 내가 지금 고기 잡고 있지만 북쪽에도 산에 나무를 심어야 고기가 많습니다. 숲이 우거져야 거기서 뭐가 나오지, 맨 흙탕물만 나오면 그게 뭐이 되나요. 아무 영양분이 안 내려오는데. 그래서 아하! 내가 할 수 있는 게 나무구나 하는 걸 빨리 캐치했죠. 나무를 해야겠는데 우리 쪽에서 나무하시는 분들은 그냥 주더만요. 무료로. 그래서 나는 그때 통일부에 들어가서 경협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협력과와 의논했습니다.

나무를 경협으로 한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그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말을 안 할려고 하데요. 무슨 사업 같은 게 경협이지, 나무가 경협이 되겠냐고 그래요. 

나무가 기본, 나무 심기는 지원 아니라 경협으로 해야

▲ 성재경 제일유통 대표.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대부분 나무심기 사업은 지원사업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 나무를 지원으로 하게 되면 계속 죽어나는 것으로 끝이 나지 않습니까. 나무는 주었다고 해서 끝이 나는 게 아니고 한 5년 동안 돌봐줘야 돼요. 그런데 그냥 주고 끝나버리니까 여기서 준 나무가 근 90~95% 정도 죽었습니다. 다 실패작이에요.

(단호한 어조로)그냥 주는 것은 안 되죠. 내 자식같이 돌봐야 되는데. 그래야 나무가 한 대 서는 거요. 그것도 내가 직접 가야 돼요. 그런데 묘목장에서 심어가지고 북쪽으로 넘기니까 경비가 무지무지하게 들어요. 

2000년도에 그때는 내가 중국에서 북쪽으로 1,450만주 정도를 넘겼는데, 북쪽에선 나무가 죽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300만주는 모르겠다고 하면서 1,100만주(과수 10만주는 별도)만 인정해 줍디다. 그래서 (정부 피해지원 실태조사에서)타협을 했죠. 나무를 한 개인이 1,000만주 넘긴다는 건 간단치가 않거든요. 내가 알기로는 나처럼 심은 사람이 아직은 없어요.

성 대표는 나중에 산림청 관계로부터 나무심기를 경협 모델로 진행한데 대해서 평가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발상이 좋았다고 하더라구요. NGO는 나무만 주면 끝이 나는데, 나는 나무를 살리기 위해서 계속 왔다 갔다 해야 되잖아요. 매번 가서 잘못되면 이야기를 하고 다시 시정하고 또 오고 이래 해야 되잖아요. 무슨 벌거지가 있으면 약가지고 가서 싹 쳐야 되고. 내 나무인데. 그렇지 않아요. 그게 왜 죽어요. 그런데 그걸 아는 사람도 그렇게 안했어요. 그러니까 고생은 많지.

□ 그럼 나무는 돈을 받고 넘긴 건가요.
■ 아니죠. 나무를 키워서 목재로 팔 때 몇 대 몇으로 나눈다고 되어 있죠.

정부의 피해지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성 대표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빠르고 높은 말투로 답변이 치고 들어왔으며 때로 공허한 듯 허공을 응시하기도 했다.

□ 피해 기업중 유일하게 북측 민경련에서 확인서를 써주었다는데.
■ 그런 게 아니고 거짓말이라고 그러죠. 북쪽에서 1,100만주 심었다고 보내준 서류도 전부 가짜라는 거예요.

□ 통일부에서 인정하지 않는 건가.
■ 중국 서류는 인정하는데, (옛날부터 원산지증명서 같은 걸 가짜로 많이 발행했기 때문에)북한에서 내려온 서류는 전부 다 가짜라고 그럽디다. 나보고.

□ 결론적으로 피해지원금으로 나온 금액 중에 한 푼도 못 받은 건가.
■ 네. 가짜라고 하는데 뭐 방법이 있나요.

□ 서류를 제출은 하셨네요.
■ 제출했죠. 그런데 가짜라고 그러잖아요. 기업 중에 단둥 민경련에서 확인 서류를 떼 준 곳은 피해지원 대상기업 중에 나 하나 밖에 없거든요. 경협은 민경련 아닙니까. 민경련에서 인정한다고 (확인 도장) 찍은 건 나 하나 밖에는 없어요.

□ 민경련 확인서류도 제출하셨나요.
■ 냈죠. 다른 사람들은 그것 하나도 못 받아왔어요. 그걸 내가 어떻게 받았느냐 하면 예전 개풍묘목장을 담당하던 사람(계봉길)이 출세를 해서 단둥 민경련 대표가 되어 있더라구요. 내용을 훤히 다 아니까 확인서를 써 준거에요.

피해금액에 대해 구체적으로 확인을 하려고 하자, 울컥 했는지 "아휴 뭐 피해금액이고 뭐고 전부 다 가짜라고 하늗데"하고 하면서 말을 끊는다. 울화가 치미는 모양이다.

■ 내가 또 다른 생각을 해 봤어요. 기자님이 오신다길래 무슨 생각을 했느냐면 내가 지금 소 목장도 있고, 평양에 과수농장도 있고, 또 1,100만주 나무 심은 것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5.24조치로) 쫓겨나올 때 (묘목장에) 묘목이 1,450만주 있었어요. 전부 2,550만주가 되죠. 통일부에 보고한 것은 1,100만주에요. 10년 만에 단둥에 가서 계봉길 씨를 만나서 쫓겨나올 때 1,450만주가 있었던 것은 당신이 담당자이니까 잘 알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대로 인정을 해 주더라고요.

민경련 확인서 제출했는데 ‘가짜’라니...

□ 제일유통의 피해규모는 어느 정도 되나. 1,700억 원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 더 되지요. 그런데 처음에는 70억 원까지 인정한다고 하더니 맨 마지막에는 35억 원까지만 지원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청구 안했다 아이요. 나무 값이 한 10~20년 크니까 지금 보면 1,100만주라고 해도 한해에 크는 게 60억~70억씩 크더라고. 내가 자는 동안에도 나무는 클 것 아니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처음에 들어간 묘목 값만 준다고 하기에 그것도 100억이 넘지만 30 몇 억만 요구를 했거든요. 그것도 못주겠다고 하는 것이고.

□ 그 이전에 피해 확인 서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 그렇죠. 내가 서류를 보완했죠.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들과 계약하고 한 것이 다 있잖아요. 그런 서류가 뒷받침이 되고 하니까 (통일부에서) 말 못하다가 심사평가위원회에 나와 소명하라고 하더니 (피해지원을)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 뒤에 어떻게 바뀌었는지 피해지원 발표가 나기 며칠 전에 전화가 와서는 못준다고 하더라구요.

▲ 북측 민경련 단둥대표부가 지난 3월 성재경 대표에게 발급한 북측 투자자산에 대한 확인서. [사진제공-성재경 대표]

□ 못준다는 이유는 뭐라고 설명하나.
■ 가짜라 그러는 거죠.

□ 어필을 하셨겠는데.
■ (흥분해서) 강하게 어필을 하나마나 그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요. 처음엔 1,700여억 원을 피해금액으로 이야기했다가 이건 뭐 내가 봐도 그렇더라고. 그래서 묘목 값만 말하라고 거기서 그러길래 최소한 경비만 쳐서 백 몇 십억으로 고쳐 써넣었는데 100억 원은 인정을 못한다고 하고 35억만 인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내가 1천만 주를 심었을 때 묘목 값 포함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얼마를 쳐주는지 알아봤더니 330억 준다고 그러더라. 그 뒤로 말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이야긴 합니다.

□ 묘목장에 백합나무를 심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 다른 사람들은 정부 지원금 같은 걸 받아서 일을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질 못하니까 북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문사 하나하고 방송사 하나를 데리고 와서 묘목장을 촬영을 해서 이걸 퍼뜨리라고 하더라고. 나라는 사람을 다른 사람들이 좀 알게끔. 그래서 내가 교회 다니니까 국민일보하고 방송국은 CTS를 데리고 가서 5.24조치 전에 촬영하기도 했어요. 그때 나온 기사일거요.

□ 지금까지 말씀을 정리하면, 훈춘 묘목장에서 키운 묘목 1,100만주를 북측에 넘겼고, 이건 북에서는 인정하지만 통일부는 가짜라고 하는 상황이다. 또 개풍묘목장 등에도 1,450만주가 있다는 것이다. 
■ 개풍쪽 1,450만주는 제출할 증빙서류가 없어서 넣지도 못했다 아이요. 그런데 1,100만주는 북쪽 민경련에서도 확인을 해 준 일입니다. 그것도 사실은 나는 안받았을텐데, 통일부에서 자꾸 나무는 심어놓고 왜 북쪽에서 인수증을 안받아오느냐고 하길래 '그러면 한장 보내 달라'고 해서 평양에서 통일부로 팩스를 부쳤어요. 그래서 통일부에서 전화가 왔더라고. 북측에서 나무 심었다는 인수증 왔으니까 찾아가라고. 그것 때문에 인정을 받은 거요. 

□ 인수증 날짜는 언제인가
■ 거기 다 적혀 있어요. 

민경련 개선총회사는 2009년 11월 24일자 제일유통에 보내는 ‘묘목반입정형’ 팩스에서 2000년 4월부터 2009년 4월까지 제일유통이 이깔나무 1,054만 그루, 과일나무 10만 그루를 보냈다고 확인했다. 심사평가위원회에서 북측 민경련과 우리 통일부가 직접 확인한 이 서류를 보완하라고 해서 지난 3월 단둥 민경련에 다시 의뢰해 재확인서를 발부받았다. 재 확인서에는 2009년 11월 24일 팩스와 함께 2004년 묘목협력 종자 파종실적과 2007년 과수협력 등을 추가로 확인했다.

□ 묘목은 나무 심기를 해서 전량 보낸 것이고 이걸 목재로 판매할 때 남는 수익을 나누는 방식으로 계약이 되어 있는데, 이런 경협방식은 처음인 거죠.
■ 북쪽은 토지와 인력을 대고 나는 묘목과 비료, 농약 등 관리비와 기술을 대도록 되어 있는데, 누구도 나무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할 줄을 몰랐어요. 묘목을 사다가 주면 끝나는 식이었죠. 내가 왜 거저 가져다주는 그런 방식을 더 무섭게 생각했느냐 하면 북쪽 사람들보고도 그랬어요. '(NGO들에게)나무를 올리지 말라고 그러시오. 나무를 올리면 안 됩니다. 우리(북)쪽에 나무가 있으니 이걸 사다 쓰시오' 라고 제안을 했어요. 

(NGO들이)한 주에 5,000원씩 사다 주는 걸 우리는 500원에 주어도 경쟁력이 있단 말입니다. 인건비가 싸니까요.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이야길 해도 내 나무는 아무도 안사가요. 차에 실어서 북쪽까지 옮겨 오는 것 보다 거기서(북쪽 묘목장) 바로 옮겨 심으면 살기도 좋지 않아요. 그런데도 한대도 안 팔아주는거요.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한동안 북쪽에서 묘목농사가 절단이 났습니다. 벼고 배추고 콩이고 일절 농산물은 팍 내려앉은 적이 있어요. 왜 그랬냐면 우리나라(남쪽) 묘목이 넘어 갔잖아요, 이때 진딧물이 같이 갔어요. 그런데 그쪽은 농약이 없다 아이요, 여기는 아주 고독성 농약을 칩니다. 이게 살아서 북쪽으로 갔지 않아요. 그런 농약이 없으니까 이 진딧물이 어지간히 농약을 쳐도 죽지도 않는 거요. 요즘엔 괜찮을 거예요. 그런데 그거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그때 북쪽 사람들이 그랬어요. 어휴 어째서 세상천지가 진딧물 천지가 되었냐고.

농약이 없으니까 진딧물이 기하급수적으로 번졌어요, 개성공단 세관장이 나한테 수동식 농약분무기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었어요,  남쪽에서 심어준 나무에 전부 '벌거지'가 붙었다 이거요. 개성공단은 더 심했죠. 거긴 계속 나무가 들어갔으니까.

□ 지금도 같은 상황인가요.
■ 아니. 이젠 괜찮죠. 이게 이제 몇 대가 지나면 생전 농약을 맞아보지 않은 내성이 없는 후대가 나온다고. 원래 북쪽 진딧물 같은 순한 놈이 된다 이 말이여. 인자 그쪽 사람들이 걱정 안하겠죠. 요새 북에 갔다 온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면 북쪽에서 농약 보내달라는 이야기는 안하거든요. 그동안 나무를 하나도 안주었잖아요. 계속 줬으면 계속 망하는 거요. 그게. 우리 식량 원조 아무것도 안줘도 괜찮아요. 그것만 막았어도 자체적으로 해서 어느 정도 먹고 살건대, 사실 총칼보다 무서운 걸 보낸 거에요.

□ 뭐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요.
■ 아니, 사람이 300만 명 굶어죽었니 어떠니 하지만 우리가 진딧물 같은 것 묻어 들어간 나무 보내서 농사 망친 것도 말해야 하지 않나요. 

□ 북쪽도 경험이 있으니까 검역 같은 걸 신경쓰지 않을까요.
■ 북쪽은 개인 소유도 아니고 우리 쪽에서는 주지 못해 안달인데요 뭘.

□ 현지 토지에 어린 묘목을 가져다가 잘 정착하도록 관리하는 방식이 더 낫다는 것이죠.
■ 무상지원 방식으로 나무를 보내는 건, 주고 나서는 관계 안하는 거요. 그 나무가 죽어도 진딧물은 퍼진다 이거요. 그러니까요 얼마나 이게 무지한 것이, 우리는 북한을 돕자고 하는 일인데 차라리 아무 것도 안주고 나무만 보냈어도 그 사람들 먹고 살았어요. 북쪽도 아직 그걸 몰라요. 알면 큰일 나지. 

‘사람 통일은 늦게 해도 나무부터 통일시키자’ 

▲ 2008년 개풍묘목장을 방문해 나무를 살펴보는 성재경 제일유통 대표. [캡쳐사진-북녘땅 나무심기-4000만 그루의 사랑 CTS 다큐멘터리]

□ 다시 백합나무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난 나무쟁이잖아요. 거기(북쪽) 가보니까 멸종된 나무가 많아요. 고난의 행군할 때 땔나무로 다 써서 그런 것 같애요. 그래서 백합나무 그거, 처음에 1만5,000주를 가져갔어요. 우리 농장에 심었더니 북에서 완전히 난리가 났어요. 거기도 나무를 사랑하는 식물학자들이 있더라고. 나무가 없어서 이렇게 망했다는 걸 아는 사람이 거기도 있어요.

북쪽 전역에 나눠 주려고 보니까 한 곳에 3그루 밖에 못주겠어.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광주로 내려가 백합나무 증식에 성공한 분한테 씨앗을 몇 자루 사서 가을에 갖다 주었어요. 

그 지배인이 나무를 살리려는 의욕이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지배인한테 '백합나무는 추운 곳에 가면 다 죽는다고 하는데 당신이 살려봐라'고 했다. 그랬는데 이 사람이 그걸 살렸더라고. 우리(남) 쪽에서는 그걸 비닐하우스 씌워서 키워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가보니까 파란 싹이 쫙 살아있는거요. 

나는 '사람통일은 늦게 해도 나무부터 통일시키자'는 걸 내걸고 나무심기를 했어요. 그래서 멸종된 것 위주로 가져가려고 하여튼 악을 썼어요. 나무통일을 누군가는 해야 되는데, 우리 제일유통의 슬로건이 '나무부터 통일하자'는 거였어요. 멸종이 되서 없으니까. 그리고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산소도 발생시키고 하는 나무의 이점이라는 건 다 알잖아요.

그래서 그 지배인한테 물었어요. 비닐하우스도 없는 그 추운데서 당신은 이걸 어떻게 살렸냐고 물었더니 '이걸 심어놓고 위에다 볏짚을 싹 깔았다'고 그래요. 우리는 비닐하우스에 해도 다 죽이는데, 그 사람이 참 대단한 사람이에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하겠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다 살렸더라구요. 

그 뒤엔 간격이 너무 좁아서 이렇게 해서는 나무가 제 구실을 못한다, 가지도 뻗고 해야지 작대기만 올라가면 묘목 구실을 못하니 적어도 30~50cm 이상은 떨어 뜨려야 되니까 다시 옮겨 심어야 한다는 정도로 말했지요.

백합나무 잎은 하나가 굉장히 커요. 학자들 이야기로는 몇 십 미터씩 크니까 그 나무는 한마디로 참 국보죠. 국보.

□ 나무를 잘 아시니까 즐거운 일도 많이 있었을 것 같다.
■ 북한 가기 10년 전부터 길러놓은 나무가 있었어요. 내가 농사짓는 걸 좋아해요. 나무 심는 걸.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풀 베고 또 밥먹고 일찍 또 가게 문을 열어야 되지 않아요. 그러면 옷에 땀이 절어서 짜면 물이 나올 정도라 아이요. 그런 식으로 진주 사천에 편백을 심었어요. 지금은 다 편백 좋다고 하지만 그때는 그게 좋다고 말한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그게 없었으면 나중에 북쪽하고 나무 심기한다고 했을 때 우리 쪽 정보부에 낭패당할 뻔 했어요.

□ 그게 나무심기의 첫 인연인가요.
■ 철쭉의 한 종류인 연산홍이 처음이었어요. 많이는 아니어도 묘목심어서 제법 팔았어요. 논농사, 밭농사는 남한테 내주고, 그런 거는 재미가 없는 거요. 지금 내 나이가 74살이니까 나무 심은 지도 한 35년 됐네요.

□ 공부를 따로 하셨나요.
■ 공부는 따로 안했고 그저 나무 심는 게 재미가 있어서 했어요. 내가 공부를 못했으니까 모르는 게 있으면 진주 임업시험장에 가서 물어보죠. 그럼 잘 가르쳐 주었어요.

그때 인연이 된 금 박사가 울릉도에서 찾아낸 '우산고로쇠'를 지금 강원도에서는 처음으로 여기에 4만평 땅을 사가지고, 그 나무를 동해시로 실어다가 6천주인가 8천주를 심었다니까요. 이건 북쪽에 없으니까 거기다 심을라고. 그럼 내가 또 처음 가는 것 아니요. '나무부터 통일'인거지. 그렇지요. 그게 벌써 9~10년이 되었다 아이요. 

나는 그거 금방 가지고 가려고 했는데 자꾸 못가게 하니까니...저렇게 나무가 크면 안 되거든. 옮기기 힘들어서 안돼요. 아이고 참.

고로쇠 수액에 사포닌 성분이 들어있고 인삼향이 나는 이 나무에 대해서 금 박사는 '누가 빨리 이 나무를 심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빈부의 차이가 생긴다'고 하더라고. 북쪽에 가서도 우리처럼 고로쇠나무가 많이 있는 걸 알게 됐는데 빼먹을 줄 모릅디다. 그래서 내가 고로쇠나무 빼먹는 방법을 다 알려주었어요.

묘향산에도 가보니까 고로쇠나무가 많더라고. 내가 고로쇠 나무를 가져가서 말통에 담긴 고로쇠 수액을 먼저 먹어보고는 20리터 한말에 5만원씩 팔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하면서 이 고로쇠 수액만 빼서 팔면 돈이 이렇게 나온다, 또 건강해진다고 알려주기도 했어요. 지금은 더 비싸죠.

한참 신나게 이야기하던 성 대표는 "나무에 미치면 이렇게 되는 거라요. 돈도 벌도 못하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집안 식구들은 얼마나 울었겠나요"라고 허공을 쳐다본다.

□ 개풍묘목장도 하셨는데 옹진 고향에도 가 보셨나
■ 못갔죠. 전에도 그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 내가 그랬어요. 고향에 갈 것 같으면 빈손으로 어떻게 가겠냐. 쌀이라도 몇 차 싣고 가고 소라도 몇십 마리 갖고 가야 내가 멋이 있지. 어찌 그냥 가겠냐고.

□ 개풍에 나무가 쑥쑥 자라고 있을 텐데요
■ 그러니까 거기 돈이 많잖아요. 이 정부에서도 이리 안 막나요. 그래서 처음에는 숨이 딱 막히고 그랬어요. 그 전에는 내가 간첩신고를 당해가지고...내가 한문도 잘 모르고 중국어도 잘 모르니까 우리 막내딸이 따라다니면서 서류 같은 것 뒷바라지를 좀 해주었거든요. 2007년인가에 결혼하고 곧 가택수색을 당하고는 바로 영국으로 가버렸다 아이오.

신랑하고 영국에 가서 목사가 되어 있는데, 아이 셋 키우느라고 마트에서 일해 가면서 고생하고 있어요. 내가 돈 다 내버리고...진짜 내가 나쁜 놈이지. 내같은 놈 하나 있으니 집안이 안되더라고...또 돈 있어봐야 나무 심는데 다 잡아넣고 말지...

내가 뭐...내가 원래 참 돈 안 쓰는 사람이요. 나를 잘 안 멕이고  잘 안 입히고 좋은데서 안 재우고...죄 짓는 것 같아서 그렇게 안했다 아이오. 여태까지 그렇게 살았다 아이오. 그런데 이번에는 너무 억울해요. 

나도 단둥 계 대표한테 그렇게 이야길 했어요. 계 대표는 그렇게 이야길 하데요. '(서류를)가짜로 넣었으면 체포를 해서 영창에 넣어야 할 것 아니냐. 없는 사실을 가지고 내가 돈 달라고 했으면 잡아넣어야 될 것 아니라요'라고. 왜 수사의뢰를 안 시키는거요.

북쪽에 관리비도 못줬는데 빼앗기는 건 아닐까...깊어가는 시름

▲ 지금도 새벽 2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지만 심신이 예전 같지는 않다. 북에 보내기 위해 심어 놓은 우산고로쇠 나무가 자꾸 커지면 보내기 힘들어지는데...차단봉을 들어올리면서도 고민은 깊어간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북쪽에서 중단된 사업은 어떻게 되었을까.
■ 나무 1,100만주면 큰 것은 2,000억원 규모에요. 그리고 이번에 박근혜 정부 때 북쪽에 전화하지도 말고 받지도 말라고 했거든요. 그렇게 딱 북쪽에서 쫓겨나면서 관리비를 내가 주기로 했는데 비료나 농약 한 톨 못주고 인건비도 못주고 나왔다 이거에요. 

그래서 저 사람들이 이걸 뺏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가니까 인정해 주더라고. 단둥 민경련에 가서 내 묘목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니까 물어볼 것 아니요. 자기 나라에서 보면 국보적인 나무인데, 처음 간 나무니까... 제일유통 묘목장이라고 다 있는데 내가 가질 못하니까 국토부(국토환경보호성 또는 임업성 일 듯)로 묘목을 넘겼다고 그래요. 

북쪽 국토부에서 관리를 해서 그쪽 소유로 했다고 하는데, 2년생 되는 걸 인정하겠다는 이야기를 (서류로) 받아오지는 않았지만, 1,450만주를 준다고 자기가 말을 했어요. 1,450만주만 해도 500억원이 넘는다고.

또 평양과수나무도 있다. 평양은 쭉 다녀보면 평평하더만. 서울같이 악산도 없고. 그런데 '줴버리는' 땅이 많더라. 우리는 노는 땅이라고 하는데. 저기다 나무를 심자고 했더니 좋은 생각이라고 해서, 100% 과일나무를 심고 식료품회사를 만들어서 이걸 외국으로 수출하자는 보고서를 꾸며서 승낙을 받았어요. 나무 빨리 갔다 넣어라 이거라요.
그래서 나무를 5만5,000주를 쫙 깔았다고. 2, 3헥타르씩 노는 땅을 모았더니 11군데 41헥타르가 나오더라고요. 그걸 계산해보니까 5만5,000주 심으면 딱 맞겠더라고.

뭐 필요한지 적으라고 해서 요구대로 사과, 배, 추리(자두) 등을 보냈어요. 이 일도 10년전 일이에요.

□ 과수도 역시 경협방식으로
■그렇지. 갈라먹기죠. 그쪽도 관심 있고 나도 관심 있고 그렇지 않아요. 민경련에서도 거기 밖으로 떠나버리면 그걸 신경 쓰나요. 경협방식으로 하니까 민경련에서도 신경 쓰고 나도 신경 쓰는 거죠. NGO단체는 쌀이니 뭐니 꼭 싣고 가야 되는데, 우리는 아무 것도 없이 농약 몇 병들고 갈 수가 있다 이말이에요. 왜? 나무보러 가야되니까.

또 평양시 중화군에 소목장도 있었어요. 버섯농장도 있었고 황해남도 옹진군에 벌인 바지락농장도 있고 한데 그런 건 놔두더라도...

□ 통일부 피해지원금 1,200억 원을 다 드려도 피해가 회복이 안 될 것 같은데.
■ 자기들이 이렇게 큰 거는 못준다고 처음부터 이야길 합디다. 처음에 투자한 것만 따지자고 하데요. 뒤에 들어간 돈 그런 건 내버려두고. 그렇게 생각해도 규모가 큰데 많이 줄였어요. 우리나라에서는 1,000만주에 330억원으로 평가하더라구요.

□ 통일부에서는 피해지원 금액 한도가 있었으니까 그 범위에 맞추려고 한 건데 그마저도 가짜라고 하면서 인정하지 않았다는 거죠.
■ 얼마 전에 마흔 넘어 결혼한 아들은 한 10년 동안 도청 당한 일이 있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우리 집 새끼들은 아버지를 간첩으로 아는기라. 그러니까 인제 아버지 전화하지 마라고 하고. 공무원인 사위가 있는데, 우리 딸은 퇴직금 갖고 살 수 있으니까 이제 전화하지 말라고, 아 이런단 말이요. 아버지가 들을 때는 어떻겠나요. 이번에도 내가 수리가 어두워서 얘들 도움을 받아가지고 서류를 만들었는데, 정부에서 돈을 준다고 했다가 안준다, 가짜다 이러니까 참 속상하죠.

얘들은 지금까지 아버지가 묘목 심은 것에 대해서도 알고, 서류작성을 해 왔기 때문에 그게 가짜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현 정부에서 인정을 못 받고 나이는 들었지 소문은 났지 하니까 정부 돈 받아먹으려고 하다가 이런 가짜 서류나 넣고 하는 이런 놈으로 취급당하는 것 같아서 참 어지럽습니다. 

그런데 그건 1,100만주 들어간 건 맹세코 확실합니다. 맞아요. 이거는. 그리고 개풍묘목장에 자라는 1,450만주. 합해서 2,450만주를 인정받은 거죠. 1,450만주 그것만 해도 앞으로 어떨지는 모르지만 북쪽에서 남쪽 나무를 못 오게 하고 우리처럼 나무를 심은 사람들 것 팔아줄 것이거든요. 그걸 남쪽시세로 받는다면 1,450만주가 1,000억 원 가까이 돼요.

□ 가장 최근 방북은.
■ 2010년 5.24이후로는 못 들어갔죠. 

□ 최근 남북관계 분위기로 보면 곧 들어가실 수 있지 않겠나.
■ 단둥 민경련에서는 나를 보내줄려고 난리가 났는데 평양에서... 단둥은 아무 힘이 없다 아이요.

▲ 강원도에선 성 대표가 처음 심은 우산고로쇠나무. 벌써 많이 커져서 힘들긴 하지만 하루빨리 북쪽 묘목장에 보내고 싶은 것이 성 대표의 소망이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남아있는 또 하나의 꿈...동해 정치망 어장사업

성 대표가 관심을 갖고 추진했던 일중의 하나가 정치망 사업이다.

북쪽 동해안에 물고기가 지나다니는 길에 정치망을 설치하면 멸치를 따라 올라가는 온갖 회유성 물고기를 다 잡을 수 있고 여기엔 고래까지 잡힌다고 한다. 기후 온난화로 인해 충무 앞바다에 멍게가 썩어가는 상황인데 지금 북에서는 가능하다는 것도 기회인 셈.  

북에서 관심을 가질 물고기 대풍의 획기적인 솔루션인 셈인데, 이미 2005년 제안을 해서 관계만 회복되면 바로 시행할 수 있도록 준비도 다 되어 있다.

2010년 5.25조치 이후 군사분계선 바로 아래 강원도 대진항에서 양양 쪽으로 8군데 72헥타르 규모의 어장을 운영하면서 정치망 남북협력사업을 준비한 것이 벌써 10년이 다되어간다.

북쪽에는 나진 앞바다까지 100군데 정치망을 설치하면 된다는 구상이다. 실제로 일이 진행되면 정치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북측을 위해 기술지도도 해야 하지만 우선 그물부터 놓아야 하는데, 그동안 바닥이 난 자금 사정 때문에 걱정이 앞서기도 한 상황이다. 
 

▲ 또 하나의 야심찬 계획이 북쪽 동해안에 '정치망' 어장을 설치하는 일이다. 한달에 한번씩 그물을 건져 올려 손질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의 노고가 헛되지 않길 바란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 북쪽에는 정치망이 하나도 없나요
■ 예. 우리가 가서 확인했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뭐 알아듣지도 못하더구만요. 못 알아듣길래 옛날 왜정시대에 어장에서 근무한 나이 많은 사람이 살아 있을 테니까 다음에 우리가 올 때까지 그 사람을 찾아서 어디서 고기를 잡았는지 그 위치를 딱 알아놓으라고 그랬거든요. 거기가 고기길이다. 

그 뒤에, 내가 좀 미숙하니까 우리 선원 세 명하고 해서 네 명이 함께 갔죠. 북쪽 선원 15명하고 한배에 타고 안 나갔습니까.  카~ 여기가 자리다 하니까 우리 선원들이 야~ 했습니다. 물 반, 고기 반 바로 그 자리에서 이야기하데.

□ 나무 심기나 물고기 잡는 일 모두 북쪽에서 관심 있어 하는 사업들인데.
■ 이거요. 그 사람들이 그전에는 모르다가 요새 이해를 했어요. 이거 한 틀만 하면 기름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들어가는 게 없으면서 수확은 많아서 한 도시를 먹여 살릴 수 있어요. 처음에는 못 알아듣다가 요즘 알아들은 거요. 민경련 참사도 이해하고 난 후에는 단둥에 있지 않고 고기 잡는 데 거기서 일하겠다고 하면서 빨리 배가 몇 대 올라올 건지 사업계획서 올리라 이거요.(웃음) 

내가 그 이야기를 듣다가 '야, 유엔제재도 안 끝났는데 그런 걸 올리면 통일부에서 좋아하겠나'하고 말았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성 대표는 얼마 전 강연장에서 받은 질문을 거꾸로 던졌다. 

‘북쪽에 묘목 1,100만주를 심었다고 하는데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났느냐'는 것. 사람들이 그걸 제일 궁금해 하더란다. 

대답은 이렇다. "나는 교회를 다녀서 사람들한테 돈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예수님한테, 하나님한테 돈 달라고 기도했더니 돈 다 주시더라."

답을 듣고 어리둥절해 하는 기자에게 "그렇다고 내가 주식해서 돈 벌었다고 할 수 있나요"라고 적당히 눙친다. 1997년 IMF 사태를 맞아 시중은행 주식이 천 몇 백 원까지 곤두박질 칠 때 사두었던 주식이 효자노릇을 했단다. 다 옛날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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