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신돌석씨는 집에 도착해서 형한테 전화해 볼까 생각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형은 설득하기 힘든 대상이었다. 이 지역으로 옮겨 온 뒤 처음 형이 신돌석씨 집을 방문한 것이 1992년 대선 직전이었다. 그때는 김영삼과 김대중 그리고 정주영이 삼파전을 벌일 때였고, 민중후보로 백기완이 출마했던 때였다. 형은 신돌석씨 집에 도착하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층집에서 이층 구석에 있는 방은 화장실과 부엌이 같이 있었는데 아무리 애들이라고 해도 네 식구가 살기에는 비좁았다. 형도 어렵게 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형이 보기에는 아마 신돌석씨의 상태는 극빈자로 보였을 것이다. 더욱이 산비탈 바로 밑이라는 집의 위치도 그렇고, 제수씨가 일 나가고 동생이 집에서 애나 본다는 현실도 그랬을 것이다.

형의 그런 판단은 노동운동이라는 것에 대한 반감과 맞물려 나타나는 것이었다. 형은 분명히 노동자였다. 그런데도 노동운동을 싫어했다. 아니 싫어하는 것을 넘어서서 증오한다고 봐야 했다. 신돌석씨는 그 까닭을 정확하게 알기가 힘들었다. 다만 형처럼 어려운 가운데서 일어서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쏟아 붓는 지배계급의 이념 공세가 먹혀 든 것이라고 추측할 따름이었다. 그 날도 형은 김대중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증오를 퍼부었다.

“세상이 혼란스러우면 고생하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뿐이야. 김대중이 그 사람은 선동만 해서 세상을 혼란스럽게만 만들었지 한 게 뭐 있냐.”

그렇게 시작한 김대중 비판이 30분을 넘어 갔다. 어쩌면 그렇게 언론을 통해서 군사정권이 떠들어대던 이야기와 똑같은지 신기할 정도였다. 신돌석씨는 처음에는 딴청을 부리다가 점점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신돌석씨에게 형은 아직도 어려운 존재였다. 정면으로 반박하며 대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정리되어 있지 않아서 괜히 소리나 지르고 쌈을 하게 될까 두려운 것도 있었다.

신돌석씨는 형에게 백기완을 찍으라고 말할 생각이었었다. 신돌석씨가 없는 동안에도 조직은 연결 구조를 가지면서 굴러 가고 있었다. 그런데 대선이 닥치면서 조직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역시 운동조직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타격보다 내부의 동요 때문에 와해되기 쉬운 법인 모양이었다. 처음에 조직은 민중당에 입당해서 백기완 후보를 밀자는 견해로 모아져 갔었다. 그런데 그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탈하는 사람이 생겼다. 윤주환이었다. 그는 민중당을 기회주의라고 보는 사람이었다. 사회주의를 확실하게 내걸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던 사람이었다. 한편 반대 견해도 나왔다. 몇몇 사람들이 김대중을 밀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들은 3당 합당이라는 보수대연합을 실질적으로 분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을 밀어서 당선시키는 것이 그 길이고, 만약 당선이 되지 않아도 강력한 야당으로 보수대연합에 파열구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직의 대표인 조철구는 양비론이나 양시론만 내놓을 뿐 결정적인 선거 방침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결국 조직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각자 갈 길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들을 신돌석씨는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때는 조직이 이전과는 달리 어느 정도 민주적 의사 결정을 도입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면 모여서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물론 노동자 출신들도 많이 참여하였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출소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기 때문에 거기에 참석하지 못했다. 신돌석씨는 김배영과만 연락이 닿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김배영의 견해가 많이 반영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김배영은 그때까지도 전위조직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합법정치에서는 민중당 후보를 미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하였다. 신돌석씨 생각에도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 형에게도 백기완을 찍으라는 주장을 하려고 했었는데, 형이 김대중 욕부터 하고 나오니까 이야기는 김대중을 옹호하는 것으로 펼쳐졌다.

▲ [삽화 - 김윤기]

김대중 하면 생각나는 일들이 많다. 김대중과 박정희가 대선에서 맞대결을 펼칠 때 신돌석씨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그때는 초등학교 교실까지도 온통 대선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4학년 때부터 반 애들은 김대중 지지파와 박정희 지지파로 나뉘어서 설전들을 벌였다. 김대중이 예비군을 폐지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하면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도 대선 문제가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왜냐하면 그때는 예비군 훈련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하는 일이 많았다. 아이들은 예비군들 때문에 축구를 할 수 없는 것이 상당히 불만이었다. 더욱이 예비군복만 입으면 사람이 개차반이 되는 법인지 예비군들은 아이들의 공을 빼앗아서 멀리 차 버리기도 하면서 낄낄대곤 하였다. 그런데 예비군을 폐지한다니 아이들에게 얼마나 솔깃한 말이냐.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애들이 지지하는 사람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애들의 지지는 철저하게 자기 부모의 뜻에 따라 나뉘어졌다. 신돌석씨네 학교에서는 김대중 지지가 많았다. 그 지역 자체가 변두리라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고, 김대중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사람들 속에서 지지층을 확보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신돌석씨가 사는 망태산 동네는 그 지역에서도 가장 못 사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곳인데도 오히려 박정희 지지가 많았다. 아마 피난민 출신들이 많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동네에는 경상도 출신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그때부터 지역감정이 영향을 많이 미쳤던 모양이었다.

신돌석씨는 그때 박정희 지지파였다. 신돌석씨 아버지는 김대중을 지독히 싫어하였다. 아버지의 고향은 경상도였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아버지가 고향이 경상도라서 그런 것은 아마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고향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 고향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만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된다는 듯이 공산당을 싫어했는데, 김대중이 빨갱이라는 것이 아버지의 주장이었다.

“대중이 그 놈은 빨갱이임에 틀림없다. 내 눈은 못 속이지. 빨갱이들이 그렇게 자기를 위장하면서 사람들을 사로잡지. 정말 못 믿을 놈이야.”

정치 이야기는 거의 하는 법이 없는 아버지였는데 김대중이 대선 후보가 되자 입에 거품을 물면서 욕을 해댔다. 형이 김대중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것은 그런 분위기에서 컸다는 점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었다. 아버지나 형은 자신들의 가난한 처지에 대한 분노와 소외감을 누군가에 대한 불만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풀어야만 했는데, 아마 공산당이나 김대중이 그 대상으로 선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신돌석씨는 나중에 생각하였다.

신돌석씨도 그런 집안 분위기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좀 색다른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대선이 치러지기 한 해 전부터 신돌석씨 반 애들은 김대중 지지와 박정희 지지라는 두 패로 나뉘어서 서로 싸웠다. 처음에는 말로만 하는 싸움이었다. 그러다가 점점 분위기가 격해져 갔다.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김대중 지지파는 전라도 출신이고, 박정희 지지파는 경상도 출신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못 사는 집 애들이 김대중을 지지하고, 잘 사는 애들이 박정희를 지지했던 것도 아니었다. 아주 부자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신돌석씨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조금 괜찮게 산다는 집의 애들 중에서 그 당시 정부에 비판적인 애들이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었다. 경상도와 전라도로 지지 세력이 확실하게 나뉘는 것은 대선 유세 기간 중에 일어난 일이라고 신돌석씨는 나중에 들었는데, 아무튼 그 때에는 87년이나 그 이후처럼 그렇게 심하게 나뉘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김대중을 지지하던 파의 핵심에는 박준범이라는 애가 있었는데, 반에서 싸움깨나 하던 애 중의 하나였다. 그때는 싸움을 제일 잘 하는 애를 첫째 가다, 그 다음을 둘째 가다 이런 식으로 불렀는데, 서로 대결을 해서 그 순위가 뒤바뀌기도 하였다. 박준범은 첫째 가다는 아니었다. 키가 좀 작은 편이어서 땅딸한 애였는데, 키가 더 크고 힘이 훨씬 더 센 축구 선수 애도 있었고, 태권도 2단으로 태권도 대회에 나갔던 애도 있었다. 이 둘 중 하나가 첫째 가다가 될 법한데 이 둘은 서로 싸우는 것을 꺼려하였다. 그리고 이 두 애는 박준범과도 될 수 있는 대로 싸우지 않으려고 하는 듯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박준범이란 애는 좀처럼 제압하기 힘들 정도로 지독한 성질을 지녔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었다. 게다가 박준범에게는 형들이 있었는데, 그 동네 깡패로 꽤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이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박준범에게 힘으로 이길 수 있다고 하여도 함부로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었다.

박준범은 그런 집안 분위기 때문인지 애들을 몰고 다니면서 놀기를 좋아하였다. 그런 그 애가 대선 기간에 김대중 지지를 밝히면서 분위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박준범이는 자신이 김대중을 지지하는 까닭을 김대중이 똑똑하고 깨끗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부패한 정권이라는 것이 박준범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애들은 박준범이 김대중을 지지하는 것은 고향이 전라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박준범의 고향은 전라남도 어디였는데 정확한 곳이 어디인지는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원래부터 몰랐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뒤에 잊어 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에 맞서서 박정희 지지를 주장하는 애는 부반장을 했던 애로 자기 아버지가 중령인 애였다. 이름은 김동환이었는데, 이 애 아버지는 그때 월남에 가 있었다. 이 애는 틈만 나면 자기 아버지가 월남에서 싸운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말했었다. 베트콩이 던진 수류탄을 발로 차서 다시 베트콩 쪽으로 가서 터지게 한다고도 하였고, 베트콩 백 명을 상대로 혼자 싸워서 모두 전멸시켰다고도 하였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베트콩은 그야말로 왜소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종자들이었다. 그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그 뒤로도 확인하지 못했으며, 그런 베트콩에게 왜 미군이 져서 물러났는지도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김동환을 중심으로 박정희를 지지하는 아이들이 한 편을 이루고 있었는데, 싸움으로는 박준범과 상대가 안 됐겠지만 부반장이라는 위치와 담임으로부터 받는 엄호 때문에 맥없이 밀리지는 않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신돌석씨가 별 생각 없이 끼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신돌석씨가 가세하면서 두 패의 대결은 물리적 충돌로 발전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신돌석씨도 박준범만은 못 해도 싸움 좀 하는 애로 애들한테 인식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 지지파들은 신돌석씨의 싸움 실력에 은근히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리고 박준범으로서도 다른 애들을 힘으로 누르기에는 좀 찜찜한 점이 있었겠지만, 신돌석씨 같으면 싸워서 이겨 볼 만한 상대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두 패의 충돌은 아주 사소한 데서 시작되었다. 대선이 있기 전 해 11월 어느 날이었다. 점심 시간에 축구를 하다가 박준범과 가까운 윤남우라는 애와 김동환과 가까운 서인성이라는 애가 몸싸움을 하다가 시비가 붙었다. 그러다가 그것이 치고받는 싸움으로 발전하였다. 한두 명씩 가세를 하여 뜯어 말리다가 드디어 패싸움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희한하게도 양 편이 김대중 지지파와 박정희 지지파로 나뉘어졌다. 그러나 정작 더 이상 싸움으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서로 갈라져서 으르렁대기만 하였다. 그것은 박준범이 나서서 서인성을 두들겨 팼기 때문이었다. 박준범과 맞서 싸울 자신이 있는 애가 없었으므로 싸움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은 것이었다. 김동환은 그저 씩씩대면서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애 역시 박준범이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자연히 박정희 지지파들의 눈길은 신돌석씨에게로 몰렸다. 신돌석씨가 한번 나서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신돌석씨도 박준범과 싸운다는 것은 너무 부담이 되었다. 좀 더 정직하게 말하자면 겁이 났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신돌석씨는 달려들어서 박준범의 얼굴을 주먹으로 냅다 갈겼다. 기습적인 공격이었으므로 박준범은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애들이 달려들었고 박준범도 그 자리를 도망치듯 피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은 크게 번지게 되었다. 수업이 끝난 뒤 박준범이 신돌석씨에게 맞짱 뜨자면서 건물 뒷마당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신돌석씨네 학년은 본관과는 떨어져서 수십 계단을 올라가는 높은 곳에 있는 신관에서 배웠는데 그 뒷마당이 있었다. 신돌석씨로서는 겁나는 일이었지만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날 따라 찬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뒷마당에 이래저래 삼십 명 가량이 모였다. 한쪽에 십여 명씩 양쪽으로 나뉜 가운데에 박준범과 신돌석씨가 마주 보고 섰다. 구경하는 애들 가운데는 양쪽 편이라고 딱히 말하기도 곤란한 애들도 있었다. 어쨌든 애들에게는 재미있는 구경이어서 모인 것이었다.

▲ [삽화 - 김윤기]

“좆만 새끼가 치사하게 갑자기 때리냐? 싸나이답게 정정당당하게 덤벼야지. 그러니까 쪽바리 똥구멍이나 빨던 박정희를 좋다고 하지.”

박준범이 싸움 자세를 취하면서 크게 떠든 소리였다. 신돌석씨는 이때 박준범이 한 말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쪽바리 똥구멍이나 빤다는 게 무슨 말일까? 그 말을 이해하는 데 무려 10년이 넘게 걸렸다. 그렇다고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계속 고민해 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에 걸려서 사라지지 않은 말이었다.

그 날 신돌석씨는 박준범에게 난생 처음으로 신나게 터졌다. 역시 신돌석씨는 박준범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박준범은 노련한 맹수가 날뛰기만 하는 산돼지를 요리하듯이 이쪽저쪽으로 움직여 가면서 신돌석씨의 이곳저곳을 신나게 두들겨 팼다. 결국 신돌석씨는 더 이상 싸울 의욕을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고, 코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입술은 터져서 부풀어 올랐다. 땅바닥에 자빠져서 구름이 드문드문 있는 늦가을의 하늘을 보면서 신돌석씨는 분명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분함과 시원함이 교차되면서 그만 엉하고 울어 버렸다. 그것으로 싸움은 끝났다. 그때 아이들은 먼저 울면 지는 것으로 쳤다. 신돌석씨는 지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이튿날 그 동안의 싸움 관행을 깨고 다시 박준범에게 도전했다. 신돌석씨에게는 박정희니 김대중이니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제는 자신을 짓밟은 박준범을 꼭 이기고야 말겠다는 오기만이 남아 있었다. 애들은 굉장히 놀라는 눈치였다. 박준범은 처음에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지만, 이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 다음에는 여유 있는 자세로 도전을 받아 주었다.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도 첫날과 비슷한 숫자의 애들이 모였다. 박정희 지지파들은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던 모양이었는지 신돌석씨가 끝내 패하고 말자 실망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동환은 신돌석씨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몹시 분하다는 듯 투덜대면서 애들을 몰고 휭하니 떠나 버렸다.

그런데 신돌석씨는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박준범에게 다시 한판 붙자고 하였다. 그렇게 나흘째 되던 날 박준범은 좀 짜증을 냈다.

“이 자식이 돈 거 아니야. 도대체 얼마나 터져야 정신을 차리겠냐. 이 새끼 정말 박정희 같은 놈이네.”

이번에는 박정희 같은 놈이라는 게 욕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더 심한 욕일지도 모르지만, 신돌석씨는 별로 듣기 싫지가 않았다. 어쨌든 그 날도 박준범은 도전을 받아 줬는데 이때는 박정희 지지파는 한 애도 구경하러 나오지 않았다. 김대중 지지파 중에서도 박준범을 따라 다니는 네 명 정도만이 나와서 구경하였다. 결과는 역시 다를 바 없었다. 다만 박준범이 이번에는 별로 신나게 때리지를 않았다. 어쩌면 그도 부담이 가기 시작한지도 몰랐다. 그 다음날 신돌석씨가 또다시 도전을 하자 박준범은 대꾸도 하지 않고 교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야, 새끼야. 거기 서. 싸나이답게 붙어야지. 짜샤. 왜 도망가는 거야.”

신돌석씨가 소리치며 뒤쫓아갔다. 박준범은 귀찮다는 듯이 돌아보며 뭐라고 그러다가 그냥 계속 걸어갔다. 신돌석씨는 박준범을 계속 쫓아갔다. 그렇게 해서 박준범네 동네 근처까지 다다랐다. 박준범네 동네는 신돌석씨가 살던 망태산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서 산꼭대기 부근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망태산과는 달리 성당을 비롯한 건물들이 많이 있었고, 산이라고 할 만한 숲 등은 이미 완전히 사라진 곳이었다. 그곳에는 천막집이나 판잣집이 대규모로 몰려 있었는데 대선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그것을 헐어버린 뒤 아파트를 짓고 있었다.

그곳에 짓고 있던 아파트는 당시 유행하던 서민아파트였다. 공중변소를 사용해야 될 정도로,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아파트였는데, 그래도 그때는 그런대로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그때 한동안 공사가 중단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 공사장은 낮이면 애들 놀이터가 되었고, 밤이면 좀 껄렁대는 중고생들이 모여서 시시덕거리며 노는 곳이었다. 그 공사장 한 구석으로 박준범이 세 명의 애들과 함께 들어갔다. 그러자 신돌석씨도 따라서 쫓아 들어갔다.

“이 새끼가 정말 죽고싶나? 왜 자꾸 귀찮게 쫓아오는 거야.”

박준범이가 철근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것으로 내려 칠 듯이 험한 인상을 지으며 신돌석씨를 위협했다. 다른 세 애들도 신돌석씨를 둘러쌌다. 여차하면 몰매를 주겠다는 품이었다.

“좆같은 소리 말고 다시 한 번 붙어 보자.”

“졌으면 깨끗이 물러나야지. 야 이 새끼야 그럼 언제까지 싸우자는 거야.”

“니가 질 때까지 싸우는 거다, 이 씨팔놈아.”

“씨팔놈아? 정말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너 정말 말 다 한 거야?”

“그래 다했다 새끼야.”

“다 했으면 이제 가 봐.”

그러면서 박준범은 킥킥 대고 웃더니 철근을 집어 던지고는 공사장을 빠져 나가서 비탈길로 걸어갔다. 박준범과 함께 다니는 애들도 따라서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그래도 쫓아갔다.

비탈길을 다 올라갔을 때 골목에 있는 집 담벼락에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사람 둘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박준범과 서로 아는 체를 했다. 박준범의 형과 그 친구인 모양이었다. 신돌석씨를 가리키며 누구냐고 물었다. 박준범이 이리저리 설명하는 모양이었는데 벌써 들어서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박준범의 형이 신돌석씨와 박준범을 불러서 함께 세웠다.

“이제 그만 싸우고 친구해라. 좋은 친구 되겠다. 쌈만 한다고 싸나인 줄 알지 마라. 준범이도 사과하고, 돌석이 너도 사과해라.”

신돌석씨는 사과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박준범이 사과를 했다.

“돌석아, 너 팬 거 정말 미안하다. 우리 친구 해 보자. 너 진짜 멋진 놈인 거 같다.”

그 말에 신돌석씨의 마음도 갑자기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신돌석씨는 박준범과 친한 친구가 되어 버렸다. 그 뒤로 신돌석씨는 학교에서 박정희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김대중을 지지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박준범은 여전히 김대중 이야기를 했지만, 신돌석씨 앞에서는 눈치를 보아 가면서 하는 듯하였다.

해가 바뀌어서 대선이 치러지는 71년이 되었다. 신돌석씨는 중학생이 되었다. 희한한 것은 박준범과 같은 중학교로 갔고, 반도 한 반이 되었다. 김동환은 다른 중학교로 갔다. 중학교에서는 국민학교 때처럼 박정희와 김대중을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애들은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떠들었다. 김대중 지지가 좀 더 우세한 것 같았지만, 박정희 지지도 만만치 않았다. 신돌석씨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끼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자기가 박정희를 지지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서까지 애들과 싸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박준범도 그 전 해처럼 김대중 지지로 분위기를 몰고 가지는 않았다. 그것은 김동환이 없기 때문도 아니었고, 신돌석씨 눈치를 보아서도 아니었다. 그런 점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것보다는 반장이 서울시장을 했던 사람의 처조카였는데, 그 애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던 것이었다. 물론 박준범이 그 애와 싸우면 질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그 애 뒤에는 담임뿐만 아니라 교장이 있었다.

그 애 이모부가 되는, 서울시장을 했던 사람은 그때 불도저 시장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사람으로 박정희의 측근이라고 하였다. 대선이 끝난 뒤 한 달 뒤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에 이 지역에서 출마하기로 정해진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신돌석씨가 다니던 국민학교도 두 차례나 방문하였고, 졸업식 때는 특별히 와서 연설까지 하였다. 그 사람이 오면 교장은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다녔다. 어린 애들이 보기에도 좀 딱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니 아무리 드센 박준범이라도 그 애와 맞싸우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었다.

그러다가 대선 막바지 유세에 접어들자 반 교실도 대선 분위기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님은 내심 김대중을 지지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는 게 그때 현실이었다. 애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대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였다.

▲ [삽화 - 김윤기]

그러던 어느날 신돌석씨는 박준범과 함께 김대중 유세장에 가게 되었다. 처음부터 김대중 유세를 보러 간 것은 아니었다. 박준범과 함께 놀게 되면서 잘 가던 곳이었다. 교외선이 지나다니던 철길이었다. 찻길 위에 다리가 놓이고 그 위로 철길이 지나다니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을 지나면서 밑을 보면 꽤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가서 큰 쇠못을 철로 위에 놓기도 하면서 놀았다. 때로는 그 철길 옆에 싸구려 극장이 있었는데 그곳에 어른들 좇아서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 날도 그 철길에서 놀고 있는데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 지어서 한곳으로 끊임없이 몰려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왜 그런지 의아하게만 생각하다가 그 부근에 있는 공고 운동장에서 김대중 유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박준범이 함께 가보자고 했다. 마침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고 어두워지면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신돌석씨는 그냥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한 곳으로 몰려가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얼떨결에 박준범과 함께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신돌석씨와 박준범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공고 운동장이 사람들로 꽉 차버렸다. 입구에만 조금 여유가 있을 뿐 그야말로 발디딜 틈이 없는 상황이었다. 연단에는 몇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뒤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연설을 하고 있었는데 김대중은 아니었다. 김대중이 온다고 했는데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연설하기를 두 시간쯤 했던 것 같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산을 펴드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문지로 비를 막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냥 앉아서 비가 오는 대로 그냥 맞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그런 틈을 타서 그때 유행하던 비닐우산을 파는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좁은 틈을 헤집고 다녔다.

그때였다. 연단 옆에 있던 경찰이 마이크로 이제 그만 해산하라고 하였다. 신돌석씨 옆에 있는 사람들이 경찰서장이라고 수군거렸다. 유세를 하기로 계획된 시간이 다 지났다는 것이었다. 군중 속에서 야유가 나왔다. 그러자 경찰서장은 다시 고압적인 목소리로 만약 해산하지 않으면 강제로 해산시킬 것이라고 하였다. 한쪽 팔에 붕대를 감은 사람이 연단에서 내려오더니 비가 내리고 있는 진흙창에 누워버렸다. 그리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인지 신돌석씨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대충 듣기에 탄압하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 지역구의 야당 국회의원이었다.

경찰서장도 곤란했는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입구 쪽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김대중이 도착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댔다. 박준범도 따라서 환호성을 지르며 ‘김대중, 김대중’ 하면서 소리쳤다. 신돌석씨는 따라 하지는 않았지만 뭔가 알 수 없는 흥분이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느낌을 가졌다. 하지만 그 날 신돌석씨는 김대중의 연설을 듣지는 못했다. 비닐우산을 팔고 있던 형과 형의 친구들을 그곳에서 만났기 때문이었다. 신돌석씨를 보자마자 형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때만 해도 신돌석씨는 형이 인상만 써도 벌벌 떨기만 할 뿐 감히 형의 말을 거역하지를 못했었다. 결국 신돌석씨는 빗물과 땀이 범벅이 된 채 흥분하고 있는 박준범을 두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형은 그 날의 일을 20년이 지난 92년 대선과 97년 대선 때 이야기하곤 했었다. 신돌석씨에게는 그 사람들의 열광과 한맺힌 외침 들이 가슴 뭉클하게 와 닿았는데, 형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형은 오히려 그 사람들의 행동을 광신도들의 광란처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의 광신도들과 그들의 행동이 무엇이 다르냐고 하였다. 형은 돈을 벌기 위해 그 자리에 갔지만 그들의 행동을 철저하게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었다.

71년 대선이 끝난 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라져 버렸다. 갖가지 흉흉한 소문들이 떠돌아 다녔다. 국회의원이 끌려가서 수염을 뽑혔다는 말도 있었고, 대학교에 군인들이 들어가서 학생들이 많이 잡혀갔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제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사람들 입에서 사라지나 보다 했는데, 김대중이 일본에서 간첩 활동을 하다가 잡혀 왔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신돌석씨의 아버지는 그것 보라는 듯이 김대중 욕을 해댔다. 신돌석씨는 김대중 욕을 하든 말든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것이 아마 신돌석씨가 중학교 3학년이던 해였던 것 같다. 그리고는 김대중을 정말 잊어버렸다.

▲ [삽화 - 김윤기]

김대중을 잊어버리는 것과는 달리 그 시절에 있었던 일들 중에 언뜻언뜻 스쳐가듯 기억되는 것들이 있었다. 아주 추운 겨울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부터 정부를 비방하면 무기징역에 처할 수 있다고 하는 무시무시한 법이 발표되었다. 나중에 안 것이었지만 긴급조치 1호였다. 그때 박정희의 얼굴이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 메운 상태에서 그 법이 발표되었었다. 신돌석씨는 만화가게에 갔다가 거기서 그 장면을 볼 수가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만화가게 아줌마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상기된 얼굴로 박정희 욕을 했다는 것이었다. 정말 나쁜 놈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옆에서 만화가게 아저씨가 이젠 그것도 무기징역감이야 라고 능글맞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아줌마는 잡아갈 테면 잡아가라지 하면서 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하였다. 그 정도의 비판적인 말을 들은 것도 박정희 살아생전에는 아마 그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 뒤 언제인지 버스에서 간첩 같은 사람들 네 명인가를 현상수배하는 사진을 본 기억도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을 했는데, 그가 나중에 국회의원이 된 이철이었다. 

 

필자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삽화가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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