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 [삽화 - 김윤기]

그해 겨울은 정말 행복했다. 2016년 12월에서 2017년 2월에 이르는 겨울은 기쁘기만 한 나날이었다. 이명박근혜의 9년을 끝장 낼 수 있었다는 것이 물론 가장 기쁜 일이었다. 1987년 이후 30년 가까이 보지 못했던 민중의 물결을 촛불과 함께 보았다는 것도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효순이 미선이 압사 미군 만행 규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반대, 광우병 반대 시위 때도 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나 그해 겨울처럼 정권을 끝장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신돌석씨를 행복하게 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해 겨울 내내 신돌석씨의 가족은 광장에서 만나고 집에 와서 뒤풀이 하는 일을 거의 빠짐없이 했다. 나가 사는 자식들을 매주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성장하고 자기들 나름대로 독신이든 결혼을 했든 일가를 이루고 사는 자식들은 좀처럼 부모를 보러 오지를 않았다. 그런 자식들이 기다려진다는 것은 신돌석씨가 젊었을 때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은 탓일까. 자식들이 찾아온다고 하면 있던 약속도 취소하고 집에 가서 기다렸다. 그런데 자식들이 찾아오는 것을, 그것도 겨울 내내 주말마다 촛불이 가능하게 해주었다.

신돌석씨는 아들이 하나, 딸이 하나 있다. 아들은 힘찬이다. 올해 우리 나이로 서른세 살이 되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혼자 나가서 산다. 딸은 아름이다. 서른 한 살이다. 그런데 오빠보다 먼저 결혼했다. 아직 애는 없다. 그 해 겨울에 신돌석씨와 아내, 힘찬이, 아름이 부부가 매주 광화문에서 만나서 청와대 앞까지 행진하였다. 그리고 집으로 와서 술을 마시면서 새벽까지 떠들었다. 아무리 떠들어도 지겹지 않고, 서로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다. 신돌석씨가 직장 사람들이나 이전에 노동단체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을 만났을 때도 집으로 갈 때는 같이 만나서 가곤하였다.

▲ [삽화 - 김윤기]

그런데 그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서 대선 정국이 되자 신돌석씨 가족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물론 신돌석씨 가족 중에서 수구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정권교체냐 진보진영의 세력화이냐를 둘러싼 해묵은 논쟁이 촛불혁명을 통해 박근혜 정권을 탄핵시킨 뒤에도 여전히 신돌석씨 집에서 불이 붙었다. 신돌석씨는 물론 진보정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언제부터인지 당선 가능한 야당을 지지했다. 지금은 누구도 이 당을 보수정당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그 전에만 해도 보수야당이라고 불렀었다.

신돌석씨 부부의 정치적 이견은 꽤 연원이 오래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힘찬이와 아름이의 태도였다. 힘찬이는 중소기업에 다녔는데 자기 엄마와 같은 생각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아내는 현재 가능성 있는 후보를 밀어서 우리 생각을 현실화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힘찬이는 현실성 있는 이념이 바로 진보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힘찬이에게 진보적인 정당은 집권 가능성이 가장 높은 더민주였다. 아름이는 노조활동을 하고, 진보정당 활동가와 결혼을 하였다. 진보정당 후보 지지이지만 아빠와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아름이는 박근혜 정권에서 가장 탄압받고 끝내 해산까지 당해야 했던 사람들이 재건하려고 하는 진보정당을 선호하였다. 이렇게 갈라지다 보니 난감한 일이었다. 대선이 되면서는 집에 모이면 갑론을박하다가 끝내는 잘 모이지 않게 되었다.

서운한 마음이 생겼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국이 워낙 엄중하다 보니 개인적인 서운함을 표현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과정에서 신돌석씨는 자기 나름대로 지나온 대선에 대해서 반추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왜 우리는 해묵은 논쟁을 계속해야만 하는가 하는 성찰을 해본 것이었다. 그러면서 해묵은 논쟁 같지만 그것 자체가 발전해 온 과정이 있다는 것도 생각하게 되었다. 신돌석씨에게 가장 극적이고 기억나는 대선은 역시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되던 선거였다.

2002년 12월 19일 오전 6시경. 새벽이라고 하기에는 늦은 시각이고,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에 신돌석씨는 현관문을 열고 배달된 조간 신문을 집어 들었다. 신돌석씨 나이 또래의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신문을 들고 화장실에 가는 것은, 신돌석씨가 아침을 여는 버릇이었다.

정몽준 대표, 노무현 후보 지지 전격 철회…

신문을 집어 들다 1면 꼭대기를 점령하고 있는 까만 글씨로 된 기사 제목을 보고 신돌석씨는 뭔가로 뒤통수를 심하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간밤에 먹었던 술이 확 깨는 듯하였다. 기사를 대충 보니 어젯밤에 그랬던 모양이다. 어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느라고 방송 매체나 인터넷과 잠시 떨어져 있었더니 그 몇 시간 사이에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야 만 것이었다.

문득 엊그제 만난 노사모 회원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정몽준이 한나라당 정모 의원과 접촉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정모 의원이란 사람은 안기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야당 의원이지만 여당 의원들보다 오히려 정보기관에 많은 인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미국 CIA가 노무현 당선 저지를 위한 공작에 들어갔는데 정모 의원의 정몽준 접촉이 그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렇다면 그것이 현실화되었단 말인가?

신돌석씨는 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걸핏하면 미국의 음모, 공작으로 귀결 짓는 주장들을 신돌석씨는 이전부터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었다. 미국이 그런 음모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뭐든지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은 미국이 우리 문제의 근원이라고 말하면서도 은연중에 미국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만든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보아도 미국의 의도라고 하는 것이 꼭 그대로 관철되었던 것만은 아닐뿐더러, 미국이 진짜 그런 의도를 가졌는지도 의문이 되는 것들도 많았다.

어제 3차까지 하면서 서로 열변을 토하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런 이야기들도 이제 다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일까? 어제 대선 전날이라는 이점을 살려서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에 같은 지역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송년회를 했었다. 매년 모이기는 했지만 그 동안 별로 많이 모이지 않다가 이번에는 분위기 때문인지 20명이 넘는 사람이 한꺼번에 모였다. 왕년에는 모두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직업도 갖가지였다. 학생 출신과 노동자 출신이 반반 정도 되었다. 연령별로는 30대 중반에서 40대 후반까지였다.

오랜만에 만났으므로 이런 저런 안부를 묻는 이야기들을 주로 하였지만, 차수를 변경하여 2차에서 3차로 가면서 화제는 자연스럽게 대선으로 모여졌다. 노무현이냐 이회창이냐는 화제에도 오르지 못했다.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이었으므로 권영길이냐 노무현이냐가 논점이 되었다.

3차까지 남은 사람은 모두 열 명이었다. 권영길 지지와 노무현 지지가 4 대 5 정도였고, 김영규 지지자가 한 명 있었다. 그런데 각자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갈렸다. 그러므로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견해로 나뉘었다고 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서너 사람 정도를 제외하면 자기 의견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주장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노무현이 되면 신자유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릴 거야. 비록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노무현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주장하고 있거든. 남북문제 등에서 조금 전향적인 조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김대중 정부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야. 그것은 어차피 대중의 힘이나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획득된 것을 확인하는 차원이지. 노무현은 미국의 분단 관리자라는 역할을 충실히 하는 차원에서 머물 거야. 최근에 미국 월가나 파워 엘리트들이 노무현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돼.”

노무현 지지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사람 중의 하나인 장선우의 주장이었다. 그는 90년대 중반까지도 당장이라도 전위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면서 합법적인 진보정당조차도 반대하던 원칙주의자였다. 그는 신돌석씨와 비슷한 시기에 해고된 뒤, 그 해 10월에 구속을 각오하고 전봇대에 올라가서 가투를 주동하였었다. 그런데 시기를 잘 만나서 그랬는지 겨우 구류 일주일만 살고 나온 적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 인터넷 언론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진보정당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전위정당 건설이 현실화될 수 없다면 합법적인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진보진영이 뭉쳐야 한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주장의 핵심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마라. 80년에도 87년에도 미국이 양김씨를 지지한다는 주장들이 나왔어. 그래서 승리를 눈앞에 뒀다고 희희낙락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아니면 양김씨가 될까 봐 초조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 그들이 되면 마치 우리가 서구나 일본처럼 되는 듯이 말이야. 그렇게 되면 혁명은 영영 끝나 버린다는 거지. 86년 개헌투쟁 때 상당수 조직이 뿌린 유인물 보면, 전두환이 욕은 두 세 줄이면 끝나고 그 밑에 수십 줄을 양김씨 비판하는 데 써먹더군. 네 생각이 그것과 뭐가 다르냐? 지금은 이회창으로 상징되는 수구세력의 집권을 막아야 하는 것이 민족민주운동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야.”

한식당을 경영하고 있는 유만수의 주장이었다. 그는 신돌석씨와 동갑인 학출 노동운동가였다. 90년대 초까지 노동단체에서 일하다가 그만두고 이것저것 하더니 3년 전부터 한식당을 경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조금 우직할 정도로 자신과 견해가 다른 정파를 싫어하였다.

“형 말대로 수구세력의 집권을 막아야 한다고 합시다. 그래서 남는 게 뭐요? 김대중 때도 그런 소리 했잖아. 맨날 진보진영은 보수정치인만 도와주면서 제 살 깎아 먹어야 하나? 형 이야기대로 하면 권영길보다는 노무현이 당선 가능하니까 그걸 통해서 수구세력의 집권을 막자는 것이지. 그렇다면 정몽준이 지지율이 더 높을 때는 정몽준이라도 지지했어야 하나? 형 논리는 이전에 나왔던 당선 가능한 야당 후보 지지론이네. 그러면 지금 당가야는 노무현이 아니라, 이회창이지. 이회창이 야당이잖아.”

장선우의 반박이었다. 유만수는 조금 말이 궁색해졌는지 껄껄대고 웃더니 장선우더러 이번까지만 개혁세력을 밀어주자고 하였다. 그러면 민노당도 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이번에 이회창이 되면 수구세력이 다시 권력을 완전히 장악해서 진보진영을 초토화시킬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이번에는 노무현을 밀어 주고 5년 뒤에는 민노당 후보를 모두 힘을 합쳐서 밀어 주자는 것이었다. 아니 다음 총선부터 민노당을 밀어 주는 것으로 약속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김배영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런 말은 5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했던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맞아요. 형들 나한테 했던 얘기 생각 안나요? 진보정당 후보를 밀것처럼 하다가 결국 김대중을 밀수밖에 없다고 했던 것. 10년 전이 아니라, 15년 전 87년 때부터 그랬어요. 어찌 보면 진보세력은 노무현보다도 소심한 것 같아요. 노무현은 사방에서 공격당하면서도 밀고 나가잖아요. 까짓것 밀고 나가 보면 진보세력 모두 표를 합하면 200만 표도 넘을 거예요. 그러다 보면 아마 5년 뒤, 또는 10년 뒤에는 당선도 가능해요. 왜 안 된다고만 생각하세요? 우리가 언제부터 쌀밥만 먹고 살았어요?”

87년에 20대 초반이었던 노동자 출신 활동가 임형택의 말이었다. 그도 어느새 30대 후반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둔 아버지로 중소기업에서 일하면서 노조활동도 하고 있었다.

“그래, 나는 노무현을 밀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5년 뒤에는 민노당을 밀겠다는 약속을 할 수 없어. 노무현이나 노사모의 등장은 그런 의미로 말하기에는 커다란 의미가 있어.”

노무현 지지자 중에 가장 강력한 주장을 하는 김배영의 주장이었다. 그는 지금 인터넷 관련 벤처기업을 경영하고 있었다. 신돌석씨와 비슷한 시기에 공장에서 해고되고, 그 뒤 주로 지하조직에서 일하다가 조직 사건으로 구속되었는데, 석방된 뒤부터는 주로 인터넷 관련 업체에서만 근무하다가 몇 사람과 함께 벤처기업을 창업하였다. 직업이 그래서 그런지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들을 꿰고 있었다.

그는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이전의 비판적 지지로 보는 것을 거부하였다. 노무현을 지지하는 세력의 핵심은 새로운 개혁 세력이고, 한국 사회의 현재 수준에서 대중의 공감대를 얻는 것이 가능한 진보적 정치세력이라는 것이었다. 또 그 세력은 인터넷을 통해서 이전의 수구세력만이 아니라 낡은 세대 자체를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혁명적인 세력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하였다.

“제3당이 된 진보정당이 있는데, 진보적 정치세력은 또 뭐냐? 어째 쿠데타적 사건이 생각난다.”

장선우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쿠데타적 사건’이라는 것은 김영삼 정부 초기에 12.12쿠데타를 그렇게 모호하게 표현했던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노무현이 되는 것이 마치 신자유주의의 승리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노무현이 대선 후보가 되기까지 그리고 아마 당선될 것 같은데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민중이 한걸음 전진하는 것이고 수구세력을 또 한 번 궁지에 몰아넣는 것이라고 봐야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마치 새로운 진보세력의 출현인 것처럼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봐.”

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조철구가 한마디 하였다. 조철구는 이날 모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선배격인 사람이었다. 신돌석씨와 같은 현장에 있다가 해고된 학출 노동자였다. 조철구가 느릿한 어조로 무게를 잡으며 한마디 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장선우가 한마디 하였다.

“형은 대선 때면 양비론을 펼치시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머리 나쁜 단무지들은 알 수가 있어야지.”

“뭐, 이렇게 보면 어떨까? 노무현이 당선되고, 민노당은 10% 이상 올리고, 그래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거지. 거기 반대할 사람은 없지?”

술만 마시고 있던 박인구가 한마디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조철구보다도 두 살이 위였다. 지역 가방공 노조 위원장을 지냈던 사람으로 가방공장 재단사 출신이었다. 아마 그는 이런 논쟁이 재미없어서 빨리 매듭을 지으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민노당에서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나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자기 길을 가야지. 진보세력이 왜 보수세력의 당락 때문에 좌지우지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거야말로 기회주의적 행태 아닌가요?”

임형택이 좀 흥분한 목소리로 반박을 하였다. 좀 머쓱해진 박인구가 떨떠름하게 대꾸하였다.

“거 참 말도 못하게 하네. 그렇지만 기회주의라는 것은 좀 심한 거 아냐?”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것은 그만큼 대선을 둘러싼 우리 전선이 복잡하기 때문에 나온 발상이지.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도 중요하지만 수구세력과의 사이에 처진 반파쇼 전선도 방관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 우리의 고민이지. 그런 고민 속에서 나온 걸로 이해해야 할 거야. 하지만 민노당원이 권영길을 지지해서 노무현이 떨어진다면 그것 자체로도 역사적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민노당이 제 길을 가는 것도 의미가 있는 거야.”

조철구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나름대로 내린 논평이었다.

“캬. 이번에는 형이 또 양시론이네. 오래전에도 그놈의 양시론 때문에 되게 헷갈렸는데. 하긴 그게 좌우를 왔다 갔다 한 내 생각보다는 훨씬 생명력이 있지.”

김배영이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을 하였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를 확실하게 내걸어야 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게 확신이 없는 사람만이 남 앞에서 자기주장을 있는 그대로 밝히기를 주저하는 법이지요.”

유일하게 김영규를 지지하는 윤주환이 말하였다. 윤주환은 조철구의 후배였는데, 92년에 대선 방침을 둘러싸고 의견이 갈리면서 조직에서 이탈하였다. 그 뒤 그는 주로 이른바 좌파 쪽 정파에서 활동하였는데, 지금은 화실을 운영하면서 사회당과 연관된 일을 한다고 하였다.

윤주환의 말에 몇 명은 웃었고, 몇 명은 뜨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철구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듣기만 했는데 마음이 좀 편하지 않은 것 같았다.

▲ [삽화 - 김윤기]

이렇게 설전이 오가는 동안 신돌석씨는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면서도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생각들은 한결같이 노무현 지지와 권영길 지지 사이에 어느 길로 가야 하느냐는 갈등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 외의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고, 할 까닭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대선 날 아침에 접한 첫 뉴스는 이런 갈등을 너무나 우습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원래 이렇게 되도록 각본이 있었던 것일까? 괜한 생각에 속앓이만 했던 것이었나? 신돌석씨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닐 것이다. 이제는 수구세력의 뜻대로 좌지우지될 정도로 허약한 세상은 아니다.

신돌석씨는 화장실에서 나온 뒤 물통을 들고 새벽이면 가곤 하는 약수터로 갔다. 그 약수터에는 이 지역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적지 않게 왔다. 그들의 의견도 한번 들어보고자 함이었다. 평일 새벽이면 5시 반에 일어나서 가곤 했는데, 오늘은 휴일이라 그런지 한 시간 정도 늦은 셈이었다. 아침이면 운동 삼아 가는 약수터이지만 술을 마신 다음날에는 으레 건너뛰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대선에 대한 분위기도 파악하고 사람들에게 권유도 해보려고 좀 피곤하지만 집을 나섰다. 하지만 고민스러웠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권유하나? 투표하라고? 권영길을 찍으라고? 아니면 노무현을 찍으라고? 그것도 아니면 이회창은 찍지 말라고? 자신도 정하지 못했는데 무슨 권유를 한단 말인가?

약수터에 들어서니 십여 명쯤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배드민턴을 치거나 맨손 체조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잘 해 봐야 서너 명 정도씩 모여서 이야기를 할 텐데 역시 대선 날이라서 그런지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두 사람만이 물통을 지키고 있거나, 맨손 체조를 하고 있었다.

“정말 재수 없는 날이다. 뭐 그런 자식이 다 있나? 정선생, 당신도 정씨지? 어디 정씨요? 그 노마하고 같은 것 아냐?”

경남 어딘가가 고향이라고 하는 이성길이 한 말이었다. 그는 30대 중반인 고등학교 국사 선생님으로 전교조 활동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성격 때문인지 그는 정치적인 문제를 말할 때 과격한 표현을 잘 썼다. 내용적으로 급진적인 사람은 아니었으나, 의견을 표시하는 방식이 매우 과격하였다. 그의 고향은 이회창 부인의 고향이기도 하다고 하였는데, 그 때문에 고향이나 집안에서는 노무현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한다고 하소연을 하곤 했었다. 그가 말하는 정선생이라는 사람은 이 지역에 있는 개인 병원의 간호사인 정희숙이었다. 보건의료단체에서 일하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미안하지만 본이 다르네요. 그런데 같으면 또 어때요? 그러면 이 선생님은 동성동본 혼인금지도 찬성하시겠네, 호주제 폐지는 물론 반대하시겠고요.”

“뭐 속이 타니까 그러는 거지. 거기서 왜 호주제 폐지가 나와요?”

이성길이 한 대 맞았다는 듯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물러설 정희숙이 아니었다.

“누가 먼저 성씨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래요? 뭐 속은 자기 속만 타고 남 속은 고소한가?”

“그런데 난 이번에 노무현 그 사람도 다시 봤어. 왜 결정적인 순간에 그런 소리를 하느냐 말야. 혼자 싸우면 지는 게 뻔한데 끝까지 정몽준 손을 잡고 가야 하는 거 아냐? 아무래도 사람이 너무 경솔한 것 같아.”

이번에는 50대 초반으로 보습학원을 경영하고 있는 유준형이 한 말이었다. 그는 호남 출신으로 시민단체의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얼굴이 팔초한 그는 깡마른 체구를 가졌는데 김대중에 대한 지지는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이 굉장히 컸는데, 그것이 민노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향할 때도 있었다. 언젠가는 민노총이 김대중 정부를 비판하자 그럴 수가 있느냐면서 분개를 하여 노동자들과 싸움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 [삽화 - 김윤기]

“노무현이 성급하게 말했다는 것은 그것대로 평가할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로 전날에 뒤집는 정몽준의 행태가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정몽준이 한 짓은 정말 파렴치한 것이지요.”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노사모 회원이기도 한 강성욱이 한마디 하였다. 그는 40대 초반으로 신돌석씨와 비슷한 또래였는데, 이전에 노동운동을 하기도 했지만 드러나게 활동은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생각이 느슨하거나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와 만나서 이야기할 때마다 신돌석씨는 드러나게 활동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첨예한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놀라울 때가 있었다. 어떨 때는 그처럼 운동하는 것이 진정으로 운동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90년대 초에 알았던, 민중교회에서 시무를 보던 젊은 목사가 신돌석씨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성경에 보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지요.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예수님과 제자들은 운동을 했던 거예요. 예수님과 대부분의 제자들은 인간해방운동을 했고, 제자 중 가롯유다나 시몬과 같은 열심당원들은 유태민족해방운동을 했던 거지요. 물론 지금의 민족해방운동과는 다른 것이지만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운동을 조용하게,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한 거지요. 투쟁 경력이나 내세우면서 요란하게 운동하는 거 그거 진짜 운동가가 아니지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신돌석씨는 괜히 움찔했었다. 사실 신돌석씨는 투쟁 경력이라고 내세울 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시민운동이나 종교운동을 하는 사람, 또는 일상적인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괜히 무시하는 심정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뭐, 그런 건 아니고, 좀 안타까워서 이야기지.”

유준형이 변명 삼아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내심 정몽준으로 단일화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그는 오로지 이회창을 꺾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몰라요. 어차피 불안한 연대라면 미리 깨져 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지요. 단일화 효과는 충분히 봤고, 어쩌면 혼자의 힘으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아니 제 생각으로는 박빙이지만, 승리 가능성이 더 많다고 봐요.”

강성욱의 말이었다. 신돌석씨는 강성욱의 말에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쉽게 포기하고 분개만 하던 자신이 왠지 부끄러워졌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진 겁니다. 오늘이라도 주변에 열심히 연락해서 투표들 많이 하게 합시다. 특히 2-30대 젊은 유권자들 투표하게 해야지요.”

강성욱이 힘주어 말하면서 물통을 들고 약수터를 빠져 나갔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약수터에서의 논란은 언제나 이렇게 밑도 끝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대로 받아들일 게 많이 있었다. 강성욱 같은 사람의 말에서 새겨들을 것도 있었고, 여러 사람의 시각을 통해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도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어쨌든 어젯밤의 모임과는 또 다른 축에서 사람들의 생각은 갈라지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신돌석씨도 물을 받은 뒤 물통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이 약수터에 드나든 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었다. 조직 사건으로 수배되었다가 검거되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뒤 양평에 있는 처가에서 좀 있다가 이 지역으로 옮겨 왔다. 처음에 자리 잡은 곳은 이 약수터 바로 밑이었다. 그래도 2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그만큼 이 약수터가 산 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를 정도로 오래 전부터 사람들에게 약수터로 애용되던 곳인데 신돌석씨가 그곳으로 이사 가기 2년쯤 전에 군부대에서 시민들이 애용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시설들을 해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약수터 이름도 군대식으로 돌격약수터였다. 얼마 전부터 이 약수터에 자주 오는 사람들끼리 이름을 좀 바꾸자는 이야기들이 오고 갔으나 워낙 주변 사람들에게 굳어진 이름이라서 엄두를 못 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지금은 약수터에서 꽤 떨어진 곳까지 내려 간 곳에 있는 아파트에 사는데, 이 주변에서만 다섯 집을 이사 다녔다. 처음에 살던 집은 10여 가구가 사는 삼층집이었다. 그때 신돌석씨는 직장이 없었고, 주인집에서 하청 받아서 하는 기계 부속품 조립을 다시 하청 받아서 하고 있었다. 아내는 봉제 기술이 있으므로 금세 취직이 되었다. 힘찬이와 아름이를 보면서 부속품 조립을 하는 신세는 정말 스스로 생각해도 한숨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신돌석씨는 끊임없이 조직 사람들과 연락을 취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다시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직의 상당수가 구속되었고, 조철구를 비롯한 핵심들은 검거망을 피해 깊숙이 숨어 있어서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배영과 연락이 닿아서 만나기로 한 날이 있었다. 그날도 아내가 직장에 나간 뒤 힘찬이와 아름이를 씻기고 밥을 먹인 뒤 옆집 아줌마한테 맡기고 약수터로 왔었다. 김배영과 11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약수터에 8시반쯤 도착해 보니 약수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놓은 약수통의 줄이 늘어서 있었다. 한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김배영과 만나기로 한 양재동까지는 한 시간 반은 걸릴 거리였다. 그렇다면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아니 집까지 돌아갔다가 간다면 늦을 판이었다. 그냥 돌아갈까 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 아까워서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직장에 가야 하니 먼저 좀 받겠다고. 신돌석씨도 평소에 그런 사람들에게 양보한 적이 많았었다. 줄지어 선 사람들은 주로 60이 넘은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순순히 양보해 주었다. 그래서 물을 다 받고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돌아서 나오는데 사람들끼리 쑤군대는 말이 뒤통수를 간지럽혔다. 신돌석씨는 달음박질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으며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이를 악물고 걸었다.

“집에서 애 보는지 다 아는데 직장은 무슨 직장. 차라리 애 때문에 빨리 가겠다고 할 것이지. 생긴 건 멀쩡한데 왜 마누라 등쳐 먹고 살까.”

 

필자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삽화가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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