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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과학이 폐기처분한 CVIDP, 왜 지금 우리에게냐<기고> 김상일 전 한신대학교 교수
김상일  |  kimsy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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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9.18  17: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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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일 / 전 한신대 교수

 

‘완전하고’(Complete), ‘검증가능하게’(Verifiable),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Irreversible), ‘핵을 해체하라’(Dismantlement). 그것도 ‘영구적으로’(Permanent), 그러면 체제보장(Guarantee)과 평화(Peace)를 보장해 주겠다.

CVID는 조지 W. 부시가 북 해결 원칙으로 제시한 것들이고, PVID는 폼페오의 신조어들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회전문 같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신조어가 덧붙여 생산돼 나올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 첨단 과학과 수학, 그리고 철학의 세계에서 이런 신조어들을 바라볼 때에 무슨 중세기 초롱불 밑에서 길쌈 삼던 시대의 소리 같이 들린다. 다시 말해서 이들 영어 신조어들 가운데 그 어느 하나도 탈현대 시대에 와 폐기처분 안 된 것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는 어린이들 게임 놀이방에서도 이들 어휘들은 통하지 않는다. 이런 용어들을 구사했다가는 학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먼저 ‘완전하게’(C)를 두고 보자. 이 말은 1932년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이던 괴델에 의하여 폐기처분 되었다. 그의 ‘불완전성 정리’(theorem of Incompleteness)가 바로 그것이다. 칸토어 이전에 수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자연수를 무한히 나열하면 큰 무한 하나에 도달할 줄을 알았었다. 그러나 간단하게 홀수를 무한하게 나열할 수도 있고 짝수도 무한하게 나열할 수 있다.

         1 3 5 7....무한
         2 4 6 8....무한

그러면 홀수 무한과 짝수 무한이란 두 개가 생긴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실수 무한(R)은 자연수 무한(N)보다 더 크다는 기절초풍할 현상도 칸토어가 소위 대각선 논법을 통해 1884년 증명했다. 무한이 두 개이고, 그것도 무한 가운데 크고 작은 것이 있게 되면, 결국 신을 무한이라고 믿는 터에 신이 두 개이고 심지어 신도 큰 신과 작은 신이 있게 된다.

이를 증명한 칸토어는 19세기 말 신부들을 찾아다니며 자기의 증명 의도가 신성모독이 아니라고 변명할 정도였다. 원래는 갈리레오가 먼저 발견했지만 겁이 나고 무서워 발표를 못했다고 한다. 갈리레오가 발표를 했더라면 이것은 그의 지동설 이상으로 파괴력을 가졌을 것이다. 결국 칸토어도 이를 발표하고 돌팔매를 맞고 정신병동에서 1918년 쓸쓸히 죽었다.

만약 지금도 C를 부정한다고 하자. 그 결과는 묻지 않아도 중세기보다 더 심각할 것이다. 여야 할 것 없이 무한은 단 하나뿐이고 그것은 절대, 불변, 완전한 것이라 믿는 터이다. 과연 ‘완전’이 가능이라도 하다는 말인가?

그러면 자연수 무한과 실수 무한 간에는 연속성이 있는가, 없는가? 다시 말해서 두 크고 작은 무한 간에 서로 연속이 되는가, 안 되는가? 이것이 소위 ‘연속체 가설의 문제’라고 한다. 칸토어는 ‘된다’며 믿고 죽었지만 그 후 괴델은 ‘연속적이기도’ 하고 ‘비연속적이기도’ 하다는 소위 증명불능을 증명했으며 이를 두고 ‘불완전성 정리’라고 한다.

괴델 이후 사실상 인간이 완전성을 추구해 오던 바벨탑은 무너졌으며 1960년대부터 소위 탈현대가 시작된다.

그런데 무슨 귀신 호박씨 까먹는 소리 같은 ‘완전히’란 백주 대낮에 이 말을 사용하는가? 정치 바닥을 제외한 그 어느 곳에서도 완전성을 추구하는 분야는 없다. 미국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알기 때문에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북이 아무리 핵을 완전히 폐기해도 그 완전성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북을 향해 계속 이 말을 사용해 시비를 걸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미국을 거들고 나왔다. 그래야 한반도를 시비와 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에 ‘같잖다’는 ‘같지 않다 unlike’이지만 ‘어처구니없다’, ‘황당하다’가 그 사전적 의미 속에 들어 있다. ‘완전히’란 ‘말 같지 않는 소리’ 에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과감하게 대처하라.

‘검증가능하게’(V). 좋은 말이다. 분석철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그들은 ‘검증가능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했다. 수학자들은 증명을 통해 논리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문장은 명제로 성립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검증을 좋아하고 검증에 목줄을 메 건 이들이 직면한 막다른 골목은 ‘역설’이었다. 그것도 간단한 역설이다. 이발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자기 집에서 수염을 깍지 않는 사람들만 이발관에서 자기가 깎아 준다고 말 해 놓고 보니, 그 이발사는 자기 말에 자기가 걸려드는 것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자기도 그 동네 사람 가운데 하나인 것을 알고 보니 자기가 집에서 수염을 깎으면 깍지 말아야 하고, 안 깎으면 깎아야 하는 소위 ‘이발사의 역설’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국은 멀지 않아 이발사 역설에 직면할 것이다. 아니 벌써 걸려들었다. 북미회담에서 약속을 해 놓고 나니 모두 자기 자신의 발목 잡히는 결과 밖에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핵을 ‘검증한다’고 할 때에 누가 검증할 것이냐이다. 지금 핵을 가진 강대국들은 스스로 셀프-검증을 한다고 한다. 북핵을 없애라 하면서도 미사일과 핵실험을 지금도 자기들은 하고 있다. 이발사가 말을 해 놓고 자기 스스로 자기 말에 걸려 역설에 직면하게 되었다. 북한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서로 핵을 없애 가자이다. 그 없애는 것을 누가 검증을 할 것이며 검증 객체와 주체 사이를 그렇게 선명하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분석 철학자들은 스스로 자기 말에 자기 자신들이 걸려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검증 자체를 검증할 메타 검증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수학자들은 절필할 수밖에 없다. 프레게는 수학의 완전하고도 검증 가능한 토대를 마련하려 수학의 기초란 책을 10여 년 걸려 썼지만 러셀이 보낸 이발사 역설을 보고는 저술 작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미국이 아무리 용쓴다고 해도 이 역설을 당해 낼 재주는 없을 것이다. 지금 정객들은 미국이란 초강력 앞에 오금을 못 쓰고 있지만 아무 힘없는 철학자들은 비웃고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1920년대에 들어 검증가능한 확실성을 찾는 데 골몰했다. 그러나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검증자 즉 실험자 자신이 실험 자체와 실험대상에 개입하기 때문에 입자인지 파동인지 판별할 수 없다는, 소위 ‘불확실성 원리’를 1929년 발표했다. 아인슈타인은 끝까지 우주에는 확실성이 있다고 믿었지만, 70여년이 지난 지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 이론은 정설로 굳어가고 있다.

무슨 시대착오적인 ‘검증가능’이란 말을 국제무대에서는 지금도 엄연히 위세를 부르고 쥐락펴락 한단 말인가?  그런데 이런 사실을 미국 정가와 정객들이 모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도 분명히 알고 있다. 모르는 것은 우리들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베는 한국을 향해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상대할 수조차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의 어리석음을 이용해 다시 재정복할 수 있다고 철석 같이 믿고 있다. 100년 전에 그러했듯이.

러셀은 이발사 역설을 ‘러셀역설’이라 하면서 현 인류가 이 역설을 모르는 것은 가장 수치스런 일이라고 개탄했다. 모른다. 앞으로 세계는 이 역설을 아는 자들이 모르는 자들을 지배할 것이다.

국제 전범 청문회에 나타난 전 미 국방장관 럼스펠드가 이라크 침공을 변명하면서 ‘아는 것을 몰랐다 Unknown Known’란 말을 구사했다. 이런 언어 구사를 할 국방장관이라면 과연 대국의 병조판사감은 된다고 본다. 우리나라 국방장관이 여자치마 짧을수록 좋다고 말하는 수준과는 급이 다르다.

우리는 럼스펠드의 이 말 한마디로 지금 미국의 정객들의 사고 능력 수준을 판가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바로 이런 언어구사 자체가 불확실성과 불완전성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럼스펠드의 말 한마디는 청문회장을 불확실성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현대과학의 용어로 보면 단순한 수준에 불과하다. 고르바초프가 구 소련 포기 원인을 마르크스 논리가 이 양자역학의 논리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논리는 역설의 논리가 아니고 역사는 고정된 법칙에 따라서 완전하게 확실하게 발전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양자역학의 불확실성의 논리로 세계관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검증하게’ 북핵을 해체하라(D)고 한다. 그러면 체제보장(G)과 평화(P)까지 약속해 준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모두 ‘같잖은 소리’이다.

이라크에 핵을 제거한 후, 살상 무기를 제거해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했지만 정말 그런가? 리비아, 그리고 우크라이나가 핵을 포기하면 평화를 보장해 준다고 했지만 과연 가다피는 평화를 선물로 받았고 우크라이나에서는 전쟁이 종식되었는가? 호랑이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는다고 했지만 과연 그랬는가?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I) 를 생각해 보자. 현대과학은 모두 ‘돌이킬 수 있을 정도’(reversible)라는 논리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전산망에서 입력과 출력은 항상 '재귀적'(recursive)이고 ‘자기 언급적’이다. 생명의 본질은 재귀적인 데 있다. 비재귀적인 것은 무생물이고 죽은 것이다. 입력과 출력은 돌이킬 수 있다는 논리에 근거해 있다.

지금 한국 야당인 한국당과 바른미래당 그리고 일본과 미국은 한 목소리이다. 여기에 중국도 소련도 한 목소리이다. 과연 우리도 그들과 한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과연 완전하게, 검증하고도, 돌이킬 수 없게 무슨 일을 해 낼 수 있는 세상인가? 4차 산업에 접어든 지금 C.V.I.D.P란 그 어느 말치고 용도 폐기 안 된 것은 없다. 예술, 과학, 철학, 수학 등 어느 분야에서도 이런 언어들을 구사하지 않는다. 고작 매주 일요일만 되면 강단에서 일부 목사나 신부들이 교인들을 농단하는 용어로 구사될 뿐이다. 오직 예수만 완전하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확실하게 믿어야 하고, 지옥 가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회복불가능하다고 한다. 지금 워싱턴 정가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이 얼마나 그들 종교의 심층에서 나온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지적해 둘 주요한 것은 위 럼스펠드의 말에서 본 바와 같이 미국이 이 말이 철 지나고 용도폐기 된 것을 모를 리 없이 내 뱉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말 그대로 철없이 어리석게도 액면 그대로 믿고 받아 드리고 있지나 않나 하는 우려이다. 100년 전에 속아 나라 망한 경험이 있다.

그러면 탈현대에 들어와 객관적인 실재로서의 완전하고도 확실한, 그리고 영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것 자체가 부정되고 있느냐 이다. 그렇지 않다. 이 점이 19세기 회의주의자들의 그것과 다른 점이다. 이런 불완전과 불확실한 상황에서 인간의 ‘주관’ 혹은 ‘주체’적 결정이 주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체적 결정이 어떻게 객관과 합치될 수 있느냐가 문제될 수 있다.

알랭 바디우는 ‘충실성 fidelity’이라고 했다. 남북 정상회담에 거는 그리고 기대하는 말이다. 서로에게 서로 충실해지는 것이다. 남북이 서로 CVIDP를 너머 충실해질 때에만 객관은 완전하고 확실해질 것이다. 그러면 이 지구상에 그 어떤 힘도 충실성을 당할 재간이 없을 것이다.

북은 1930년 대 이미 민생단 사건 과정에서 마르크스 공산주의의 객관주의를 넘어 주체에 방점을 찍었다. CVID에 대한 비판이 결코 객관 그 자체로서의 그것을 여기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핵을 합리화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북핵에 들이대는 잣대 그것으로서의 CVIDP는 소용 그자체가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이제 남북 정상이 다시 만났다. 우리끼리 서로 속임 없고 서로 신뢰하는 성실성과 충실성에 함께 복무할 때에 그것이 유일한 답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얼굴에서 우리는 ‘중용’의 ‘불성무물不誠無物’을 읽고 있다. 세계 그 어느 것도 그 누구도 두려워 말라. 성실성 없는 그들의 말은 아무 것도 해낼 수 있는 힘이 없을 것이다. 서로 충실하고 성실할 때에 하늘도 감동할 것이다.

이 지구상에 나타난 그 어느 제국도 가고 말았다. 로마도, 스페인도, 영국도, 몽고도, 페르시아도 때가 되니 가고 말았다. 미국도 언젠가는 지금과 같은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돌아와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하지 않고 자기 담장 너머 동네에 개짓는 소리, 닭 우는 소리에도 무관심해 질 것이다.

우매한 조선조가 명나라가 망할 줄도 모르고 남한산성 안에서마저 정월 초하루 날 명나라 황제를 위해 절을 한 우매함을 다시 범하지 않기  만을 바란다. 자주 없이 주체 없고, 주체 없이 성실해 질 수 없기 때문에 군말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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