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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이익을 위한 나라를 세우라”[친절한 통일씨] 북, 공화국 창건 70년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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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9.08  18:4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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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일제 식민의 시대는 끝났다. 하지만 한반도는 남북으로 나뉘었다. 남북은 각기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길을 걸었다. 해방 이후 남쪽에서는 좌우합작 시도도 있었지만 실패했다. 1948년 북쪽에서 남북연석회의가 열렸지만,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는 길을 막지 못했다.

그렇게 1948년 8월 15일 서울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그리고 한 달 도 채 안 된 9월 9일 평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됐다. 그리고 올해 북한 공화국 창건 70년을 맞았다.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꿈꾸다

북한의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단어 하나하나에는 김일성이 꿈꾸고자 한 이상향이 모두 담겨있다. ‘조선’은 민족의 뿌리인 고조선을 이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북한 애국가 첫 시작에도 나오듯, ‘아침의 햇빛이 찬란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인민은 주권의 진정한 주인으로서 성별과 사회적 지위, 성분과 신앙, 재산과 지식의 유무에 관계없이 누구나 평등한 권리와 자유를 향유한다”는 김일성의 강조점에서 나왔다.

‘인민’은 노동자, 농민, 지식인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의미이며, ‘공화국’은 국가권력을 대의제기관 즉 최고인민회의에 집중시킨 국가형태를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건설의 꿈은 ‘조선민족의 총동원으로 광범한 반일 통일전선을 실현함으로써 강도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고 진정한 조선인민정부를 수립할 것’이라는 1936년 5월 5일 김일성이 발표한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에서 시작했다.

   
▲ 1948년 9월 8일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김일성은 내각 수상에 선출됐다. 김일성은 1936년부터 국가건설의 꿈을 가졌다. [사진캡처-조선의오늘]

해방 이후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환영군중대회에서 ‘모든 힘을 새 민주조선건설을 위하여’라는 연설에서도 국가건설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우리 민족은 이제부터 자기의 국가를 세우고 완전한 민족적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건국사업을 다그쳐 나가야 한다”며 “민주주의적인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조선의 구체적 현실과 우리 인민의 의사에 전적으로 맞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새 조선에 세워야 할 정권은 인민대중의 이익을 철저히 옹호하며 나라와 민족의 부강발전을 확고히 담보할 수 있는 참다운 인민의 정권”이라며 “이러한 정권은 바로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말했다.

이보다 앞선 8월 20일 김일성은 군사정치간부들 앞에서 건당, 건국, 건군의 방향을 설파하며,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반드시 조선사람들 자신의 손에 의하여 건설되어야 한다”면서 “조국광복회 강령 제1조에 인민정부수립의 과업을 제기하고 그를 위하여 장기간 싸워왔다”면서 자신의 항일투쟁 목적이 곧 국가건설이었음을 숨기지 않았다.

김일성이 생각한 국가는 항일투쟁의 경험에서 비롯한 공산국가였다. 일제시기 당시 국내 다양한 공산주의 세력이 있었지만, 이들은 대부분 소련에 기댔다. 국외에서 활동한 김일성이 해방 이후 평양에 들어왔지만, 그 기반은 튼튼하지 않았던 것. 그렇기에 그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세력에 반기를 들었다. 

김일성은 1945년 11월 15일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제2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좌경기회주의자들의 주장도 반대하여 투쟁하여야 한다. 지금 좌경기회주의자들은 우리나라에 당장 프롤레타리아독재정권을 세우고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떠들고 있다”며 “이것은 우리나라 사회발전의 객관적 요구와 인민대중의 준비정도를 고려하지 않은 극좌적인 행동으로서 우리 당으로부터 대중을 이탈시키며 민족적 단결을 파괴하는 아주 위험한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제외하고 공산당 대표를 비롯한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각 정당들과 각계각층 인민의 대표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권만이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혁명의 강력한 무기로 될 수 있으며, 광범한 인민대중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하는 애국적이며 인민적인 정권으로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1948년 9월 2일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렸다. 이번 회의에서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됐고, 10일 정부가 수립됐다. [사진캡처-우리민족끼리]

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계획하다

이러한 생각을 지닌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위한 순서를 차례차례 밟아갔다. 

먼저 건국에 필요한 헌법을 만들었다. 1947년 11월 16일 북로당 정치위원회 조직위원회는 임시헌법 제정의 필요성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이어 18일 북조선인민회의 3차 회의에서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를 조직했다. 20일 임시헌법제정위원회는 김택영 법전부장, 리청원 조선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김윤동 최고재판소 재판원에게 초안작성을 맡겼다.

김일성은 이 자리에서 “우리 당의 영도 밑에 해방 후 새 민주조선건설에서 달성한 제반 성과들을 법적으로 고착시키고 우리의 민주주의적 국가사회제도를 공고 발전시키며 미제와 남조선반동들의 민족분열 책동을 분쇄하고 통일적 민주주의완전자주독립국가건설을 가일층 촉진시키게 될 것”이라며 헌법에 들어갈 내용을 지시했다.

그리고 1948년 2월 6일 북조선인민회의 4차 회의에서 임시헌법 초안 토의가 있었다. 그리고 인민토의를 거쳐 4월 28일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헌법제정과정을 끝냈다. 임시헌법이 채택된 것이다.

임시헌법에 규정된 최고인민회의 구성을 위해 북한은 1948년 7월 9일 북조선인민회의 5차 회의를 열고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시행을 결정했다. ‘흑백투표’로 북조선에서 212명이 당선됐다. 그리고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서 360명이 선출, 총 572명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구성됐다.

1948년 9월 2일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렸다. 대의원 572명 중 528명이 참석한 가운데, 8일 헌법 초안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으로 공식화됐다. 

당시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헌법위원회 위원장은 “이 헌법은 진정한 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위한 투쟁강령으로 되는 것”이며 “이 헌법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 조건을 짓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김두봉, 부위원장 홍남표, 홍기주, 서기장 강량욱, 상임위원 강진건, 성주식, 구재수, 리구훈, 박정애, 김창준, 장순명, 장권, 유영준, 박윤길, 라승규, 최경덕, 리능종, 김병제, 리기영, 강순, 조운이 각각 상임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은 정권 이양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구성에 관한 의제가 상정됐으며,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이끄는 내각 수상에 올랐다.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되다

그리하여 최고인민회의 1차 회의가 진행 중이던 9월 9일 헌법 제1조에 명시된 ‘우리나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됐다. 그리고 동시에 정부도 수립됐다.

마지막 회의날인 9월 10일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정강’을 발표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 기반에서 해방된 우리 민족은 우리나라에 하루바삐 통일된 민주주의적 중앙정부가 수립되며 세계민주주의 진영의 당당한 일원으로 될 만한 독립국가가 건설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며 총 8개 항의 정강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 1948년 9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과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평양시군중대회가 열렸다. [자료사진-통일뉴스]

9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과 정부 수립을 기념한 평양시군중대회가 열렸다. 38만 5천여 명의 평양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김일성은 연설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수립은 자주독립국가건설을 위한 우리 민족의 투쟁역사에서 빛나는 새 페이지를 열어 놓았습니다. 우리 인민은 이제부터 자기의 정부를 가진 당당한 민족으로서 항상 자기 정부의 옹호를 받을 것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의 위신과 권리와 영예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한반도 북반부에서 또 다른 국가가 세워지자, 대한민국 정부는 물론 국회도 북한의 정부 수립에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을 지지하는 일부 남한 내 시민들의 반응은 달랐다. 1948년 9월 12일 자 <독립신보>에는 “역사와 세기의 중력이라고 할지. 북조선에서 보기 좋게 해낸 일이 조국과 민족과 다시 세계에 향하여 무슨 조금이라도 부끄러운 짓이 됩니까?”라는 시인 정지용의 발언이 실렸다.

남로당 세력들은 ‘인공 수립 지지 경축투쟁’을 벌였다. 9월 12일 새벽 일제히 전국적으로 ‘공화국기’를 게양했다. 심지어 독립문과 중앙청에도 ‘공화국기’가 걸렸다. ‘인공기게양투쟁’은 11월 말까지 남한 2만 4천여 곳에서 전개됐다.

11월 30일 8개 시.군 304개 업소에서 약 5만여 명이 참가한 대한민국 국회의 ‘미군주둔계속요청안’ 결의 반대와 북한을 지지하는 2시간 총파업이 진행됐다. 104개교 6만 9천여 명의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면서 북한을 지지했다. 서울에서는 정오를 기해 시내 전차 111대가 2시간 정지했으며, 시내 일부 전신전화가 끊겼다.

70년 전 한반도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하지만 남북에 각기 들어선 정부는 70년 분단을 초래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70년은 다시 하나의 국가가 되기에는 넘어야 할 많은 산을 만들었다. 

앞으로 70년 한반도의 모습은 어떠할 것인가. ‘통일’의 염원을 가슴에 안은 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평화를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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