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오 국무장관의 4차 방북이 무산되었다. 보도에 의하면 그의 방북이 무산된 결정적 이유는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의 ‘편지’였다고 한다. 적대적 언사로 가득차 있는 그의 편지 때문에 방북의 성과를 자신할 수 없었던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이라고 한다.

김영철 부위원장의 편지는 그 내용이 전체가 다 공개되지 않아서 전모를 알 수는 없지만, 미국이 북한에 줄 것이 없다면 오지 말라는 투의 내용이었다고 한다. 또한, 다시금 핵과 미사일 활동을 재개할 수도 있다는 협박의 말투였다고 한다.

김영철의 편지에 미국이 좌절감을 느꼈을 만도 하다. 지난 3차 방북에서처럼 폼페이오 장관의 ‘빈손 방북’이라는 비판을 의식한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언론과 평가는 김영철의 편지 그 자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편지’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오히려 핵심은 왜, 김영철이 그러한 편지를 미국에 전달했는지에 있다.

폼페이오 장관의 ‘빈손 방북’을 우려했다면, ‘빈손 방북’을 낳게 한 ‘빈손 방문’의 원인을 따져보는 것이 순리인 것이다. ‘빈손 방문’에 대한 북한의 대응,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만들어낸 핵심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판문점선언에 뒤이은 북미간 정상회담은 말 그대로 세기적인 담판이었다. 비핵화의 의지를 밝힌 북한과 그런 북한과의 신뢰의 회복, 나아가 한반도 평화를 합의한 북미간 협상은 21세기 최고의 회담이었다. 그리고 이 자체는 지난 시기의 북-미간 대결과 갈등의 마지막 ‘냉전’을 끝내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이 합의로 인해 이제 지구상 마지막 냉전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합의는 단지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을 뿐, 북-미가 넘어야 할 산은 아직도 첩첩산중이었다. 그래서 북미간 합의는 이 첩첩산중을 잘 넘어가기 위한 ‘신뢰의 구축’을 합의의 제1항으로 명문화하였고, 그에 기초하여 비핵화와 평화 문제를 풀어가기로 합의하였다. 이는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숙제를 서로가 한 아름씩 기꺼이 받기로 한 것과 같다 하겠다.

지난 3차 방북이 ‘빈손 방북’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받아든 숙제를 외면한 미국의 태도였다. [관련기사 보기] 현재 종전선언과 핵신고-검증으로 교착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실지로는 종전선언조차도 주저하는 미국의 태도, 이 조차도 북한이 먼저 핵 신고-검증을 하면 그 최종단계에서야 가능하다는 미국의 태도가 이를 방증하고 있다. 미리 말하지만, 정치적 선언에 불과한 종전선언마저도 주저하는 미국이 ‘평화협정’에 기꺼이 응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미국은 왜 숙제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을까? 그것은 단적으로 지난 시기 실패로 확인된 ‘선 비핵화’의 망령 속에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북미간 협상은 잘 알려진 것처럼 정치적 선언일 뿐이지만 종전선언을 시작으로 비핵화의 과정을 시작하려는 북한의 입장과 북한의 선 행동 즉, 핵 신고와 검증을 우선시하는 미국의 입장이 교착상태에 빠져있다.

협상은 으레 그렇듯이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 게임이며, 그래서 ‘주고받기의 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힘의 차이에 의해 불평등한 교환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지만, 협상의 큰 틀은 주고받기를 통한 신뢰의 구축과 더 나은 관계의 구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현재 북한과 미국이 교착되어 있는 두 개의 교환은 평등하지도 않고, 사실상 아무런 보장도 없이 자신의 핵심 시설을 다 공개해서 여전히 폐기되지 않고 있는 미국의 ‘선제타격’의 위협 앞에 자신을 내 맡기는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핵 신고-검증과 종전선언의 맞교환도 북한이 더 많이 양보하는 셈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미국은 왜 핵 신고-검증만을 주장한 채 자신이 주어야 할 것에는 이렇게 인색할까? 그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미국 내 주류 정치와 언론의 비판,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도 여전히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북 강경파 등등.

그러나 그 핵심 원인은 바로 ‘선 비핵화’라는 망령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에 있다. 여기에 압박을 통해서 북한의 양보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오래된 레코드판의 낡은 유행가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 트럼프 대통령의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무산에 대해 북한은 아직까지 대화를 통한 해법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노동신문>은 논평을 통해 미국에 대해 ‘대국다운 여유’와 ‘초대국다운 여유를 보인다면 지금보다는 미국의 처지도 나아지고 세계도 훨씬 편안해질 것’이라고 하면서, 미국에 대해 역대 보기 힘들었던 유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역시 김정은 위원장에 대한 신뢰감을 표현하면서 협상에 대한 기대를 표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이번의 특사단 방북에서 보이듯이, 적극적인 중재자, 촉진자, 혹은 이를 넘어서 설계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면 막힌 교착 국면을 얼마든지 뚫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경험은 남북관계가 충분히 북미관계를 견인해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측하듯 앞으로 숨 가쁘게 진행될 9월의 정치방정식을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한반도의 평화에 중요한 분수령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에는 여전히 ‘낡은 틀’을 고집하는 미 행정부의 ‘선 비핵화’의 망령을 해소하는 것이 놓여있다.

그리고 ‘압박을 통한 북한의 굴복’이라는 오래된 도식‘에서도 벗어나야 할 것이다. 이것이 북미관계의 발전만이 아니라 남북관계의 발목을 잡고 있는 ‘제재’의 굴레에서도 벗어나는 길이다.

그래서 우리 정부의 앞으로의 ‘실력’에 더 큰 기대를 하게 된다. 앞으로 있을 평양 정상회담을 성과적으로 진행한 이후, 남북관계의 든든한 힘을 바탕으로 한반도를 배회하고 있는 ‘선 비핵화와 압박을 통한 굴복’이라는 ‘망령’을 하루빨리 걷어내기를.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문학박사, 2001)
캐나다 브리티쉬 콜롬비아 대학 방문연구원(2002-2003)
서울대 국제대학원 연구위원(2004-2006)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객원연구원(2007)
현재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로 재직중 

주요저서로 북한의 개혁·개방: 이중전략과 실리사회주의(2004), 김정일 리더십 연구(2005), 서울과 도쿄에서 평양을 말하다(2008), 북한과 미국: 대결의 역사(번역서, 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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