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원대한 비현실을 붙드는 사람만이 가장 원대한 현실을 창조해낼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

 

보리피리
 - 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닐니리.


 약수터에 갔더니 사람들이 ‘정치 토론’에 열중해 있다. ‘문재인 못 믿겠어. 내가 청와대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아.’ 한 중년 남자가 한탄을 한다. 다른 사람들은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대통령 한 사람만 바뀌면... .’ 나는 아주 오래 전에 이 땅의 독재자가 죽는 꿈을 가끔 꿨다. 그만 죽으면 이 나라가 좀 더 좋아질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가을 날 아침, 라디오 뉴스가 전했다. ‘그가 서거하셨다!’고. 오! 나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이 세상이 금방 좋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또 다른 독재자들이 나타나고. 무수히 대통령이 바뀌며 역사의 수레바퀴는 힘겹게 굴러갔다. 그때보다 지금 이 세상은 얼마나 좋아졌을까?

 분명히 좋아진 것 같은데, 오히려 사는 게 자꾸만 버거워진다! 소위 ‘베이비 붐 세대’는 ‘아, 옛날이여!’ 지나간 실낙원(失樂園)을 노래한다.

 사람들은 공포감을 갖고 있다. 한순간에 발 한 번 잘못 디뎌 삐끗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 지금 누리는 이 물질적 풍요로움이 꿈결처럼 사라져버릴 수 있다.

 우리는 눈 뻔히 뜨고 세월호가 수장되는 과정을 멀거니 지켜본 적이 있다. 세상이 비몽사몽이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하지만 그건 너무나 선명한 현실이었다.

 우리 주변에 덫은 너무나 많다. 우리는 누구나 세월호를 타고 항해 중이다. 언제나 지금 이 순간, 안전할 뿐이다. ‘오늘도 무사히...... .’ 바깥은 시퍼런 바닷물로 넘실거린다. 노숙자들, 폐지 노인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청년실신(청년실업자·신용불량자), 청백전(청년백수 전성시대), 삼포세대·오포세대·칠포세대, 잉여, 장미족(장기간 미취업족)들이 유령처럼 바다 위를 떠돌고 있다. 

 나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냉혹한지를 경험한 적이 있다. 나는 지금 비명횡사 중인데, 아무도 내 소리를 듣지 못했다. 멀건 대낮에 나는 악몽처럼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림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화가 뭉크의 ‘절규’가 떠오른다. 핏빛의 절규가 하늘을 적시는데, 아무도 내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불며 우리는 ‘나부터 살고 보자!’를 삶의  좌우명으로 정했다.      

 ‘보리피리 불며/봄 언덕/고향 그리워/피-ㄹ닐니리.//보리피리 불며/꽃 청산/어린 때 그리워/피-ㄹ닐니리.//보리피리 불며/인환의 거리/인간사 그리워/피-ㄹ닐니리.//보리피리 불며/방랑의 기산하/눈물의 언덕을 지나/피-ㄹ닐니리.’

 문둥이가 된 한하운 시인은 보리피리를 불며 인간 세상 주변을 떠돌고 있다. 그는 문둥이이기에 인간 세상에 들어올 수 없다. 현대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그런 사람을 ‘호모 사케르’라고 부른다. 호모 사케르는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니다. 아무도 그를 사람 취급을 하지 않으니 그는 사람이 될 수가 없다.

 ‘호모 사케르’는 고대 로마 시대에 특정 죄인에게 가하는 형벌이었다고 한다. 그는 ‘어떠한 시민적 권리도 없고, 종교의 희생 제물로도 삼을 수 없는 죄인’이다. 그는 누가 때려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감벤은 로마 시대의 ‘호모 사케르’로 이 시대를 설명한다. 현대의 권력(정치, 경제 등)은 호모 사케르를 양산하며 ‘민주 시민’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지금의 통치자들은 옛날의 독재자들처럼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마음껏 자유를 누리게 한다.

 하지만 자유를 만끽하는 우리들 중 한 두 명을 골라 호모 사케르로 만든다. 그들은 번듯한 직장인들에게 노숙자가 된 동료를 보여준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학교의 왕따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왕따가 우리 교육 시스템을 완벽하게 받친다.   

 ‘왕따’라는 호모 사케르가 있어, 모든 대학들이 일렬로 줄을 서고 모든 학생 학부모들이 애벌레들처럼 서울대, 대기업, 정규직의 지고한 꼭대기를 향해 발발 기어간다. 서로의 몸을 마구 끌어당기며, 마구 짓밟으며...... . 애벌레들은 눈도 귀도 없다. 오직 꼭대기에서 날아오는 향긋한 냄새만 맡으며 기어간다.     
 
 혁명가 체 게바라는 말한다. 우리 ‘가슴속에/불가능한 꿈을 갖자’고. 우리는 꼭대기 너머를 바라보아야 한다. 허공을 가득채운 넓디넓은 푸른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꼭대기에 올랐다가 혹은 오르다가 낭떠러지로 뚝 뚝 떨어지는 게 우리들 삶의 전부가 아닌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문둥이가 되어버린 자신들을 바라보며 ‘보리피리 불며/꽃 청산/어린 때 그리워/피-ㄹ닐니리.//보리피리 불며/인환의 거리/인간사 그리워/피-ㄹ닐니리.’ 슬프디 슬픈 노래를 불러야 하겠다.

 그러면 문둥이가 되었지만 끝내 문둥이가 되지 않은 한하운 시인의 고결한 정신을 우리는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 올시다/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성한 사람이 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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