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석(군사평론가, ‘남매간첩단조작사건’ 관련자)

 

명이나물을 아시나?. 산마늘이라고도 한다. 명이나물 장아찌는 밥도둑이다. 산이 울창한 울릉도에 많이 난다.

그 울릉도에 살던 손두익 선생은 선장이었다. 그러나 명이나물을 캐서 먹고 살았다. 왜? 그럴싸한 선장이 명이나물로 명을 이어나갔을까? 그는 1974년 국가보안법(울릉도간첩단 조작사건)으로 징역 10년 2개월을 살고, 출소 뒤 세상천지 갈데가 없어 다시 고향 울릉도에 돌아왔던 것.

빨갱이로 낙인 찍혀 수감생활 중, 집과 배마저 포기해야 했다. 자식은 공무원 시험에 붙었지만 임용이 되지 않았다. 먹고 살아나갈 방법은 명이나물 캐거나 아내가 오징어 말리는 일을 하며 형언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바닷바람이 더욱 그를 세차게 때렸다. 아내마저 2012년 3월 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 통과로 장기집권 발판을 마련했다. 국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재야와 교수, 학생들의 반발에 빨간 덧칠이 필요했다.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가 대규모 공안사건을 만들어 발표했다. 이른바 일본에 살고 있는 소위 총책 이좌영 선생을 포함한 47명을 체포한 울릉도간첩단 조작사건, 박 정권은 통혁당 사건을 능가한다고 대서특필했다. 사형 3명, 무기징역 수십명, 즉 조작간첩 47명.

“오늘은 우리의 결혼 24돌이 되는 날이예요. 행복했던 지난 날을 몇 년 몇십 년이 걸려도 반드시 도로 찾아요. 부디 절망하지 말고 담대한 마음으로 밝은 날을 기다립시다.”(1975.5.6일 아빠의 영주 올림)

손두익 선생과 함께 울릉도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이성희 전북대 수의학과 교수(교무처장)가 감옥에 있을 때 아내가 보낸 편지다. 박정희 정권조차 총장을 거의 내정할 정도로 앞이 창창했던 이 교수였지만, 중앙정보부의 공안 발톱을 피할 수 없었다. 간첩만드는 사람들에 의해 고문으로 간첩이 되어 사형이 언도되고, 무기수가 된 뒤 그는 17년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출소 뒤에도 보안관찰법은 그를 20년 동안이나 주거를 제한, 신고를 강요하며 괴롭혔다.

분단된 나라의 지식인으로서 통일에 관심을 가지며, 일본에서 방북해 김일 부수상을 만나 진짜 김일성을 확인하고, 평소 ‘미국은 어찌하여 정전협정에 도장을 찍고도 지금까지 군대를 철수 시키지 않고 있는 것일까?’를 고민했던 것을 북과 토로하고 싶었던 석학. 자기를 이해해주던 둘째아들도 간암으로 잃고, 아내는 분식점으로 분단의 삶을 살아야 했다. 준장까지 올랐던 그의 동생 이삼희 장군은 군복을 벗어야 했다.

자신의 일본 유학시절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이좌영은 이리농림학교 2년 후배였다.
거류민단 소속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을 강도높게 비판해 눈의 가시였던 이좌영 선생! 일본에서 부동산 사업으로 크게 성공했지만, 한국의 중앙정보부의 계략에 의해 대규모 사업체(신한섬유)도 빼앗기고, 평생을 해외 중앙정보부의 감시와 체포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08년 1월 8일, 분단된 먼 이국땅 일본에서 운명했다. 그의 유언은 “고향에 가고싶다”는 것이었다. 2012년 11월 이성희 교수가 재심에서 간첩혐의가 벗겨지고, 일본유학 시절 방북한 사실에 대해서만 징역3년, 자격정지 3년을 받은 뒤였다.

먼 이역 일본에서 생을 마감한 울릉도간첩단사건 총책 이좌영 선생.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났다. 부친은 사건의 충격으로 급사했고, 농사를 짓던 형 이지영은 징역 5년 만기출소해 1983년 세상을 떴고, 신한섬유 총무를 하던 동생 이사영은 젊은 시절 15년을 감옥에서 보낸 뒤 1987년 12월에야 풀려났다. 그의 조카조차 자신이 방값을 지원한 게 공작금으로 둔갑해, 1994년 간첩조작사건에 몰려 징역 7년을 살아야 했다.

1974년 이좌영 선생은 울릉도간첩단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한 조작임을 확신하고, ‘재일한국인 정치범을 구원하는 가족교포의 모임’을 만들어, 재일 정치범 구원 활동을 밤낮으로 했다. 2012년부터 울릉도 간첩단조작사건은 재심에서 무죄가 나오기 시작했다.

명이나물로 생계를 이어야 했던, 손두익 선생. 앞길이 창창했지만 감옥으로 몰린 수의학과 교수 이성희 선생. 일본 부동산 사업가로 승승장구했지만 박정희의 발톱에 늘 긴장하다 이국땅에서 운명한 이좌영 선생,

이들 모두 분단을 유지하는 국가보안법 관련자이다. 촛불 항쟁으로 문재인 정권이 탄생했다. 올해 4,27 판문점 선언이 나오고, 65년만에 새로운 조미(북미)관계를 세우기로 한 6,12 조미수뇌회담이 있었다. 그러나 서로 적대시 하지 말고, 평화적으로 통일된 세상에 살자고 약속했건만 국가보안법은 하나도 다치지 않고, 서슬 퍼렇게 살아있다.

2018년 8월 9일 보란듯이 서울경찰청 보안수사대는 대북경협사업가인 김 호씨를 국가보안법으로 체포, 구속했다. 그의 남북경협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국가정보원이 그를 협력자로 활용하다가, 용도를 다하자 간첩으로 엮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지적을 받고 있다.

분단 적폐인 국가보안법과 같은 동족을 적대시하는 정책을 유지하는 공안기구인 국가정보원(국정원),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 경찰 보안수사대가 남아있는 한 2018년에도 명이나물로 연명하며 밤낮으로 아빠와 남편을 찾는 가족들의 피눈물은 계속된다. 눈물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는 판문점 선언과 조미수뇌회담을 역행하는 국가보안법을 이제 관으로 밀어넣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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