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환상이 성찰에 대해서 승리를 거둘 때에야 인간성은 완성될 것이다 (술레겔)


 술잔을 앞에 놓고
 - 백거이

 달팽이 뿔같이 조그만 땅에서
 뭘 그리 다투고들 있는가?

 부싯돌에서 튀는
 불꽃처럼 짧디짧은 인생인데

 부자든 가난하든 기쁘게
 살아야 될 것 아니겠는가?

 입 벌려 웃을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바보 천치라네!


 보르헤스의 소설 ‘비밀의 기적’을 읽었다. 갑자기 사는 게 신난다! 그의 소설을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한다. 환상인 현실, 현실인 환상. 이게 이 세상의 실상이 아닌가? 

 우리는 어떤 나무를 보고 ‘나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말하고 나면 그때의 느낌이 전혀 나지 않는가? 나무가 죽어서 내 앞에 휑하니 서 있는가? 우리는 이때 어떤 기괴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나무를 보고 ‘나무’라고 느낀 적이 없다. 나무를 본 순간의 그 미묘한 세계. 그것은 어떤 이름으로도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노자는 일찍이 도덕경에서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이라고 말했다. 어떤 사물에 대해 그 이름을 말하면(名可名), 그것은 그것의 진정한 이름이 아니라는 것(非常名)이다. 

 보르헤스는 짧은 단편들을 통해 얼마 되지도 않는 단어들을 통해 우리 앞에 이 세상을 새롭게 펼쳐 놓는다.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들보다 비중이 더 크지 않다. 크다- 작다, 움직인다- 멈춰 있다, 소중하다- 하찮다...... 이 모든 분류의 세계는 스러져버린다.

 병사들의 총구에서 나온 총알은 허공에서 멈춰 있다. 뺨에 흘러내렸던 빗방울 하나는 뺨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세상이 정지해 있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는 작품이 완성된다. 이런 환상적 리얼리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로 보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일 것이다.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는 망상에 젖어 시간을 항상 흐르는 것으로 경험한다. 우리는 사실이 아니라, ‘뇌의 믿음’을 경험할 뿐이다.    

 삼라만상 모두 대등하다. 그의 손에서 일어난 마법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한 존재가 된다. 우리는 어떤 이름도 갖지 않는다. 다만 지금 여기 존재할 뿐이다. 걷는 걸음걸이 하나하나, 코에 들어오는 공기 하나하나, 눈에 보이는 세상 하나하나...... 오직 나는 지금 여기 생생히 살아 있다! 

 에리히 프롬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는 ‘존재의 세계’를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소설들은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이다! 그는 달을 어찌 이리도 생생하게 내 앞에 가져올 수 있단 말인가! 만져지는 달. 그는 ‘진여(眞如)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우리를 인류의 시원의 시간, 아득히 먼 원시시절로 이끈다. 단번에 그 세계로 데려간다. 안류의 ‘오래된 미래’로! 

 백거이 시인은 ‘술잔을 앞에 놓고’ 노래를 부른다.

 ‘달팽이 뿔같이 조그만 땅에서/뭘 그리 다투고들 있는가?//부싯돌에서 튀는/불꽃처럼 짧디짧은 인생인데//부자든 가난하든 기쁘게/살아야 될 것 아니겠는가?’

 인생이 고(苦)인 것은 ‘달팽이 뿔같이 조그만 땅’에서 온 우주를 다 가진 듯이 살고, ‘부싯돌에서 튀는 불꽃처럼 짧디짧은 인생인데’ 저만 안 죽는다는 얼굴로 사는 인간의 오만방자함일 것이다.    

 ‘입 벌려 웃을 줄 모른다면/그 사람은 바보 천치라네!’

 기쁨이 안에서 솟아올라 입 벌려 웃으며 살려면, 우리는 ‘나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를 중심에 놓고 보니 이 세상이 얼마나 자그맣고 하찮아 보이는가?   

 올해 더위는 견딜 수가 없었다. 평생 처음으로 에어컨을 켰다. 지구를 살린다는 생각보다 나부터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버렸다.  

 ‘지구온난화’가 이제 본격적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는 건가? 외국의 어떤 과학 잡지에서는 지구의 물이 다 말라 버릴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이제 인류는 처절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가는 건가?
    
 이 모든 재앙의 근원엔, 인간이 이 세상을 자신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서양의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의 사상이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생각인가? 나의 생각이 나의 유일한 존재 근거라니? 이 생각이 그 당시 지배세력으로 올라오던 자본가와 만났다. 자본을 가진 지배세력이 자신들의 생각을 믿게 될 때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그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신(唯一神)의 권능을 획득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들의 신도가 되어 버렸다. 

 돈벌이를 위해 마구 땅을 파헤치고, 하늘을 마음껏 휘젓고, 사람을 마구 죽이고...... 이 세상은 아귀지옥(餓鬼地獄) 이 되어버렸다.  

 이 인류재앙의 근원을 부수는 보르헤스다. ‘나 중심의 망상’이 이성(理性)으로 멋있게 포장되어 지구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우리의 망상을 한방에 부수는 보르헤스의 망치다. 

 그는 우리의 생각을 ‘나 중심’에서 벗어나 우주까지 넓혀준다. 장자의 붕새가 되게 한다. 

 ‘부자든 가난하든 기쁘게/살아야 될 것 아니겠는가?’ 

 우리에게 입 벌려 웃으며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아 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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