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를 치른 엄미경 민주노총 통일위원장과 17일 오후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가문의 영광이다.”
지난 11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 주석단에 “유일한 여성이면서 제일 어렸다”는 엄미경 민주노통 통일위원장은 “영광스러우면서도 무거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민주노총 부위원장에 당선돼 통일위원장으로서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를 총괄한 엄미경 통일위원장은 17일 오후 2시 서울 정동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가졌다.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는 2007년 창원 대회 이후 2015년 평양 대회를 거쳐 지난 10-12일 서울 대회가 열렸다. 남측은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라는 양대노총이 북측은 조선직업총동맹이 주최했다. 아울러 남측은 2005년 결성된 6.15노동본부에 북측은 6.15노동분과위에 포괄돼 있다.

엄미경 통일위원장은 “4.27 판문점선언 이후 첫 민간교류를 노동자들이 했다라는 대단한 자부심, 기쁨,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부족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고 “축구경기를 4.27 판문점선언 시대의 축제로 만들기 위해 남북 노동자들이 보이지 않는 배려들을 많이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축구경기가 진행된 상암월드컵경기장에 빈자리가 많았던 것에 대해서는 “일단 딱 양대노총과 연대단체의 조직인원 만큼만 된 것 같다”며 “민주노총이 통상 최대 4천 4백 명 정도인데 이번에 1만이 넘은 거다. 한국노총도 자체 평가는 6천이 넘었다고 들었다. 사실은 양대노총이 1만 6천을 동원한 거다. 총 2만 명 정도가 관람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이 역동하는 정세에 서울시민 4만 정도, 양대노총이 2만 정도 해서 정말 운동장을 꽉 채운 대회를 해보자는 포부가 있었다”며 “무더위 등 원인을 정확히 평가해 봐야겠지만 아무래도 양대노총의 행사라는 게 국민들이 함께하는 대회로까지 발전해 나가는 데는 좀 어려움이 있었던 것 아닐까 싶다”고 진단했다.

11일 오전 북측 대표단 숙소인 워커힐에서 진행된 ‘남북노동자단체 대표자회의’와 12일 발표된 공동합의문에 대해서는 “합의문은 일단 남측에서 한반도 정세를 반영해서 안을 짰다”며 “1항이 8.15부터 10.4까지 4.27 판문점선언을 이행하는 실천 기간으로 했다. 다음으로 하반기가 되면 대규모로 방북하는 통일대회가 필요할 것 같아서 ‘금강산 노동자통일대회’를 제안했다”고 밝혔다.

특히 “공동합의문에 나온 실천기간 동안 11개 지통대(지역통일선봉대)를 해산하지 않고 ‘4.27 판문점선언 이행 실천단’으로 활동할 수 있게 전환하려고 고민하고 있다. 두 달 정도 집중적으로 하고 10.4기간에 공동행사를 성사시키면서 동시에 제2차 통일노동자회, 대표자회의를 실제로 성사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나갈 거다”라고 제시했다.

▲ 지난 11일 북측 대표단 숙소인 그랜드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남북노동자단체 대표자회의' 모습. 엄미경 통일위원장도 주석단에 앉았다.(오른쪽 두 번째) [지료사진 - 통일뉴스]

‘금강산 노동자통일대회’ 개최 일정에 대해서는 “우리는 기간을 10월이라고 지정했다”며 “그런데 북측에서는 기간을 지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좀 있었다. 전체적 정치일정 속에서 어려움이 있을까 조심스러움이 있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엄미경 통일위원장은 또한 “2001년에 탄생했던 ‘조국통일을 위한 남북노동자회’(통일노동자회) 정신을 계승하는, 노동자 통일운동의 활성화에 대한 근본적 방향을 담았다”며 “남측에서 먼저 작성한 문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충분히 실천적 과제를 설정하고 제안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기존의 6.15노동본부(북측 6.15노동분과위)와의 관계 속에서 통일노동자회의 조직적 위상에 대해 “6.15를 통로로 한 자주교류의 업종별, 산별 기능이 사실상 담보되지 않고 있다”며 “노동자들이 6.15노동본부를 강화한다는 입장은 남북 상호 강조된 대전제이고, 그 속에서 노동자 통일운동의 활성화, 업종별 활성화라는 실천력 측면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일각에서는 오해들이 좀 있는 것 같다. ‘양대노총이 6.15노동본부는 안하는 거냐. 6.15노동본부와 별도로 노동자 통일운동, 자주교류하겠다는 거냐’, 지금 이런 오해들이 생겨서도 안 되고, 전혀 사실무근이다. 노동자들이 6.15노동본부를 강화하겠다는 의지는 확고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엄미경 통일위원장은 “환송하는 날은 곳곳에서 눈물바다가 많이 연출됐다”며 “아무래도 오랜만에 남쪽에서 민간행사가 이루어지다 보니까 어려운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전부 하나같이 열정을 내서 했던 것 같다”고 감사를 표했다.

다음은 17일 오후 2시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북측과 축구대회 일정을 조율한 과정이나 통일노동자회 제안 배경 등에 대해 밝힌 인터뷰 내용이다.

‘8.15에 통일축구가 가능하겠냐’

▲ 엄미경 통일위원장은 축구대회 일정 확정 과정에 대해 상세히 밝혔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큰 행사 치르고 건강은 괜찮나?

■ 엄미경 통일위원장 : 아휴, 아플 새도 없다. 끝나자마자 월요일부터 또 상집회의고, 노사정 대표자회의 복기 등 노동현안 문제 등으로 바빴다.

□ 먼저,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를 마무리한 소감은?

■ 어쨌든 계속 언론에 나온 것처럼 4.27 판문점선언 이후 첫 민간교류를 노동자들이 했다라는 대단한 자부심, 기쁨,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부족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 이런 거다.

□ 2015년 평양 축구대회에 이어 서울 축구대회가 정세상 쉽지 않은 상황에서 열렸다. 이번 서울 축구대회 성사 과정에서 고비라든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

■ 지난 촛불혁명 이후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는 개최되겠구나’라는 생각은 있었다. 2017년은 당장 정권 바뀌고 어려울 거고, 2018년 8.15 즈음해서 될 거라는 양대노총 실무자들의 확실한 느낌은 있었다.

다만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렸지만 생각보다 민간 차원보다는 당국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 많아서 어떻게 될까 걱정, 우려, 이런 게 있었다.

그런데 6월에 평양에서 진행된 6.15공동위원회 회의에 민주노총은 안타깝게 불허받았지만, 한국노총이 갔을 때 북에서 먼저 통일축구를 다시 언급하고 일정은 돌아가서 민주노총과 협의해서 팩스를 보내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평양 6.15공동위원회 회의에 갔다 온 동지들이 이번 8.15 민족공동행사는 여러 조건상 민간행사 하기가 좀 어려울 것 같은 분위기였다며 ‘8.15에 통일축구가 가능하겠냐’ 이런 우려를 많이 했다. 그런데 우리가 8월 13일부터 16일로 일단은 북측에 보냈다.

북에서 팩스가 전격적으로 온 게 8월 3~5일로 왔다. 남쪽으로 보면 전부다 여름휴가 가고, 양대노총 조직동원이 매우 어려운 때다. 그래서 ‘통일축구가 진짜 성사되는구나’ 기쁨 이면에 ‘아, 이 사업은 추진하기 매우 어렵겠다’ 걱정이 매우 컸다.

일단 깊은 양해를 구하며 휴가를 지나 한 주 순연해 줄 것을 다시 제안하기로 했다. 양대노총이 이견이 좀 있긴 했지만 어쨌든 한 주 순연하자는 수정제안을 보냈고 북이 전격적으로 8월 10~12일로 하자고 답신을 보내와 본격적으로 진행이 된 거다.

그 과정이 제일 힘들었다. 준비과정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론을 알 수 없었으니까 그 판단이 가장 어려웠다. 그런데 다행히 잘 된 거다.

“남북 노동자들이 보이지 않는 배려들을 많이 한 것 같다”
 

▲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11일 오후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가 진행됐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단일기를 흔들며 응원하고 있는 남북 노동단체 대표자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여러 행사가 있었지만, 하이라이트는 축구대회인데, 잘 된 건가? 자평한다면?

■ 한 골도 못 넣었으니까 잘 된 건 아니다.(웃음)

북측 대표자들이 2015년 경험이 있으니까 남쪽 기량이 많이 달린다는 걸 안 것 같다. 친선경기가 되게 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한 것 같다. 북은 연합팀이 아니라 조그만 기업소 선수단이 내려왔다고 하더라. 실력보다 친선에 초점을 맞추려는 노력일 거라고 추측한다.

건설도 한 개 기업소, 경공업도 한 개 기업소, 우리로 보면 축구 동아리가 온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노총은 3-1, 민주노총은 2-0으로 진 거다. 더구나 민주노총은 상대적으로 경공업팀이 건설노동자팀보다 실력이 덜 한 곳인데도 한 골도 못 넣은 거다.

어쨌든 남북이 실무회담을 한 번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팩스에만 의존해 진행된 건데, 축구경기를 4.27 판문점선언 시대의 축제로 만들기 위해 남북 노동자들이 보이지 않는 배려들을 많이 한 것 같다.

□ 축구경기도 있었지만 서포터즈와 응원, 관람도 중요했던 것 같다. 운동장 규모에 비해 관중이 부족해 보였다.

■ 일단 딱 양대노총과 연대단체의 조직인원 만큼만 된 것 같다. 조직되어 있는 대오를 중심으로 참가했다는 결론이다.

이 역동하는 정세에 서울시민 4만 정도, 양대노총이 2만 정도 해서 정말 운동장을 꽉 채운 대회를 해보자는 포부가 있었는데, 원인이 뭔지 모르겠지만 잘 안 됐다.

무더위 등 원인을 정확히 평가해 봐야겠지만 아무래도 양대노총의 행사라는 게 국민들이 함께하는 대회로까지 발전해 나가는 데는 좀 어려움이 있었던 것 아닐까 싶다. ‘국민과 함께하는 4.27 판문점선언 시대 축제의 장’이 되겠다는 애초의 목표는 좀 부족함을 남겼다고 본다.

다만, 이전의 8,15 노동자대회를 기준으로 보면, 민주노총이 통상 최대 4천 4백 명 정도인데 이번에 1만이 넘은 거다. 한국노총도 자체 평가는 6천이 넘었다고 들었다. 사실은 양대노총이 1만 6천을 동원한 거다. 총 2만 명 정도가 관람했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돌아보면 많이 부족했지만 노력은 했다고 보고 있다.

□ 서포터즈나 통일선봉대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는데.

■ 그렇다. 서포터즈가 아무래도 경기장 응원 분위기를 주도했고, 여러 가지 구호들과 힘찬 응원을 중통대(중앙통일선봉대)가 같이했다.

“통일위원회 강화가 사실상 많이 강조됐다”

▲ '남북노동자단체 대표자회의'에서 판문점선언을 낭독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축구대회가 한 축이었다고 한다면, 남북노동자단체대표자회의가 있었다. 11일, 12일 두 차례 열렸나?

■ 대표자회의는 11일 오전에 한 번 열렸다. 먼저 3노총 대표자회의를 했다. 북에서 60명, 양대노총 각각 30명, 120명 정도 규모로 했다. 대표자회의 끝나고 업종별 대표자회의를 했다. 북측은 7개 산별이어서 양대노총은 거기에 맞게 구분해서 업종별 대표자회의를 3개 정도의 공간에서 진행했다.

□ 그러면 12일 회의는 합의문에 서명하기 위한 절차였나?

■ 12일은 마석(모란공원)을 갖다 와서 11시쯤 3노총 대표자들과 통일위원회 실무라인 두 테이블에서 따로 회의가 좀 있었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을 통해서 듣기로는 대표자들은 아무래도 큰 방향에서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다. 지금 이 정세 속에서 노동자들의 역할이 어떤 거냐. 실무라인도 마찬가지인데, 앞으로 노동자통일운동을 활성화할 데 대한 고민들을 나눴다.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가면서 남측에서 준비한 합의문을 토대로 해서 북측이 다시 수정보완한 문건을 제출했고, 그것을 가지고 토론해 공동합의문을 발표했다.

□ 공동합의문 내용에 보면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 통일실천기간’을 정하고, 금강산에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노동자통일대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는데, 소개해 달라.

■ 합의문은 일단 남측에서 한반도 정세를 반영해서 안을 짰다. 그래서 1항이 8.15부터 10.4까지 4.27 판문점선언을 이행하는 실천 기간으로 했다. 다음으로 하반기가 되면 대규모로 방북하는 통일대회가 필요할 것 같아서 ‘금강산 노동자통일대회’를 제안했다.

그리고 2001년에 탄생했던 ‘조국통일을 위한 남북노동자회’(통일노동자회) 정신을 계승하는, 노동자 통일운동의 활성화에 대한 근본적 방향을 담았다. 이렇게 3가지 문안으로 해서 남측에서 합의문을 구성을 했고, 거기에 대해서 북측이 대부분 수용을 한 거다. 그래서 합의문이 탄생하게 됐다.

합의문과 별도로 북과 남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하게 나왔던 이야기는 ‘3노총의 통일위원회를 절대적으로 강화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게 노동자 통일운동을 활성화하고 조직적으로 강화하는데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통일위원회 강화가 사실상 많이 강조됐다. 그 정신이 통일노동자회라는 표현에 담기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6.15공동위원회를 실질적으로 강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됐다. 지금 다른 부문들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노동자만큼 조직적 규모나 활성화돼 있는 정도는 상대적으로 약간 부족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이런 부문과 계층과 어깨걸고 6.15공동위원회를 강화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서야 하는 것 아니냐는 논의들이 있었다.

이 두 가지가 핵심적 토론이었다고 본다. 그런 정신의 바탕에서 공동합의문이 나왔다.

“6.15노동본부를 강화하겠다는 의지는 확고하다”

▲ 10일 환영 만찬의 마지막을 장식한 대동놀이에서 북측 여성 대표자와 함께 하고 있는 엄미경 통일위원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 그러면 연내에 금강산 남북노동자통일대회가 추진되나?

■ 연내라고 기간은 못박지 않았다. 우리는 기간을 10월이라고 지정했다. 정세상 10월쯤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본 거다. 그런데 북측에서는 기간을 지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좀 있었다. 전체적 정치일정 속에서 어려움이 있을까 조심스러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기간은 명시하지 않고 금강산에서 남북노동자통일대회를 성대히 하자는 방향에서 합의가 된 거다.

□ 남북 3대 노총의 통일위원회를 강화하자는 것과 통일노동자회, 6.15노동본부(북측은 6.15노동분과위) 강화는 어떻게 연결되나?

■ 사실은 그 실천적 관계에 대해서 충분히 토론이 됐어야 했는데 그럴 시간은 별로 없었다. 정신과 방향에 대한 합의 정도다. ‘노동자 통일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통일노동자회 방식이 의의가 있겠다’ 정도가 합의가 된 거다.

다만, 2001년 통일노동자회가 결성됐을 때 남북 노동자 자주교류가 거의 전무후무한 국면에서 통일노동자회 결성으로 인해서 일정하게 자주교류를 추진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3노총이 그 의의를 공히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을 계승 발전시켜서 더 강화해 보자는 합의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것이 노동자 독자기구이면서 동시에 이것이 6.15공동위원회를 강화하는 실천적 역할을 해내는 관계로 가자고 여러 번 강조가 됐는데, 그것이 어떻게 실제로 역할을 할 수 있을까는 후속과제로 남겨져 있다.

□ 공동합의문에 6.15노동본부를 강화하자고 명기된 것이 아니라 ‘통일노동자회 산하 위원회를 조직’하기로 합의돼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 통일노동자회는 조직적 기구를 강화하자는 의미보다는 노동자 통일운동을 업종별, 산별로 활성화 해 실천력을 강화하자는 측면으로 읽혀진다. 남측에서 먼저 작성한 문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충분히 실천적 과제를 설정하고 제안한 것은 아니다.

지금 6.15노동본부는 양대노총이 들어가 있지 업종별 본부가 들어와 있지는 않다. 업종으로 보면 전교조가 교육본부 형태로 들어와 있는 거다. 그 외에는 6.15를 통로로 한 자주교류의 업종별, 산별 기능이 사실상 담보되지 않고 있다.

노동자들이 6.15노동본부를 강화한다는 입장은 남북 상호 강조된 대전제이고, 그 속에서 노동자 통일운동의 활성화, 업종별 활성화 측면에서 나온 것이다. 대전제는 다른 게 전혀 없다.

일각에서는 오해들이 좀 있는 것 같다. ‘양대노총이 6.15노동본부는 안하는 거냐. 6.15노동본부와 별도로 노동자 통일운동, 자주교류하겠다는 거냐’, 지금 이런 오해들이 생겨서도 안 되고, 전혀 사실무근이다. 노동자들이 6.15노동본부를 강화하겠다는 의지는 확고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곳곳에서 눈물바다가 많이 연출됐다”

▲ 11일 환송만찬에 참석한 남북 노동단체 대표자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한국노총과의 협력관계는 문제가 없었나?

■ 이 기간이 최저임금 요율문제 등 노동현안 만으로 보면 사실 어려운 시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쨌든 통일축구에 대해서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최대한 상호 연대했고 협력하려고 노력했다.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 정부의 협조는 원활했나?

■ 정부의 협조는 큰 방향에서는 (행사를) 불허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너무 엄격한 제재와 제약이 없었던 것은 대단히 긍정적이고 좋은 방향이었다.

그러나 이게 3노총 민간교류지만 북측이 내려오는 의전에서 보면 국가적 행사이지 않나. 그래서 민간단체인 양대노총이 다 치러내기에는 재정적 조건도 어려움이 많다. 그런 측면에서 좀더 열린 자세, 민간운동을 활성화할 수 있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지원 또는 지지가 좀더 많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다. 실랑이들이 조금 있었다.

□ 정부로부터 도움이 없었나?

■ (정부가) 노력을 한다고 했는데, 돈이란 실제로 쓰는 쪽에서는 더 필요한 게 사실이고, 또 주는 쪽에서는 더 주기에는 곤란한 입장이고, 이런 어려움, 해프닝이 좀 있었다.

□ 행사 현장에 경찰, 국정원에서 나와 돕기도 하고 제한도 했을 텐데, 어려움은 없었나?

■ 내가 예전 경험이 별로 없다. 그리고 창원 통일축구 이후 11년 만에 (남쪽에서) 하는 거다. 행사를 진행해본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체적으로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특히 축구경기장만 보더라도 2007년 기억으로 보면 주변을 국정원이 다 에워싸고 근접하지 못했던 분위기가 역력했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제재하거나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원칙, 기준은 제시했고, (북측과) 만나고 대화하는 것도 주변에 늘 어디엔가 (지켜보는 이가) 있기는 했지만, 제재하거나 이러지는 않았던 것 같다.

□ 주최 측과, 서포터즈를 비롯한 도움을 준 이들, 날씨도 덥고 시간도 촉박하고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 내가 서포터즈를 직접 운영하지 않아 모르지만 재정과 날씨 다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참가한 몇몇 분들 이야기 들어보니까 굉장히 오랜만에 (북측 대표단이) 남측에 온 것 아닌가.

처음 본 학생들도 있으니까 엄청 감동적이었던 모양이다. 응원하면서도 눈물 흘린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고. 아이들과 함께 온 엄마는 정말 말을 잇지 못했다는 표현도 들었다. 환송하는 날은 곳곳에서 눈물바다가 많이 연출됐다. 특히 울면서 사진 찍으면서 악수하면서...

아무래도 오랜만에 남쪽에서 민간행사가 이루어지다 보니까 어려운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전부 하나같이 열정을 내서 했던 것 같다.

“주석단에서 유일한 여성이면서 제일 어렸다”

▲ 엄미경 통일위원장은 민주노총 통일위원장으로서 주석단에 앉아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를 치른 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북측과 회의도 하고 만찬도 했을 텐데, 대화를 충분히 나눴나?

■ 나는 주석단에 앉아 있어서 대화하기 많이 어려웠다. 테이블에 앉은 분들은 이래저래 사는 이야기, 자기 직업 이야기를 많이 했던 모양이다. 특히 남쪽 상황도 많이 알고 있다고 들었다. “최저임금 줬다가 빼앗는 거요?” 이런 이야기도 많이 했다고 한다.

□ 주석단에 앉아보니까 어떻던가?

■ 별로 좋지는 않더라.(웃음) 일반석에 앉아야 사적인 이야기, 소소한 이야기도 하는데 주석단에 쭉 길게 앉아 있으니까 아무래도 옆쪽에 계신 분들과만 “오늘 힘들었냐” 정도 이야기로만 그치니까. 그래도 아무튼 너무 영광스럽다.

□ 북측이 이번에 가져온 메시지나 궁금해 하는 것이 있었다면?

■ 실무회담을 하거나 하면 보통은 정세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사람마다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체로 정세 이야기는 안 된 것 같다. 특히 대표자석은 “지금 정세가 이렇게 갈 것 같으니 우리가 더 하자” 이런 이야기들이 보통 많이 되는데, 특이하게 정세 이야기가 거의 안 나왔다.

정세 이야기 보다는 우리가 무슨 역할을 할 건지, 방향과 계속 일관되게 “3노총의 통일위원회를 강화하자”, “6.15위원회를 강화하자” 이런 이야기를 했다. 특이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 남북 당국이 잘 하겠다는 분위기라서 민간이 굳이 목소리를 높일 이유가 없었던 것 아닐까?

■ 그런 느낌이 역력했던 것 같다. 이전에는 당국 간의 정세를 돌파하는 게 우리 역할이었다고 하면 이번에는 조금 그런 느낌이 들더라.

북측 대표들도 중통대에 대해서는 계속 칭찬하더라. “아, 이 더운 날 저 많은 사람이 투쟁하는 것, 노동자들이 멋지다”고.

□ 큰 행사 치르고 뒷수습 중일 텐데, 하반기 양대노총 통일위원회 내지는 6.15노동본부의 행보와 과제는?

■ 민주노총의 노동자 통일운동의 고민은, 핵심적으로 중요하게 보는 것은 실제로 통일위원회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올해 지통대(지역 통일선봉대), 현장별 실천단, 중통대를 강조를 많이 했던 거다.

그게 일정한 성과가 나오면서 최대 규모인 325명의 중통대가 조직됐고, 지역도 11개 지역에서 지통대가 나왔다. 이것은 이명박 정권이후 처음 있는 규모다. 11개 지역마다 꽤 의미있게 구성됐고 실천기간도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길었고 6.15부터 8.15까지 실천기간을 길게 잡고 실천을 했던 곳도 있다. 방식은 좀더 점검해봐야 하는데 11개 지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성과가 이번 통일축구에 1만을 모으는데 기본적 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후에도 이것이 핵심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민주노총은 다른 곳보다는 진보블럭에서 어쨌든 동력적 역할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이후 4.27 판문점선언 시대를 실천적으로 열어 나갈 최대동력은 민주노총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공동합의문에 나온 실천기간 동안 11개 지통대를 해산하지 않고 ‘4.27 판문점선언 이행 실천단’으로 활동할 수 있게 전환하려고 고민하고 있다. 두 달 정도 집중적으로 하고 10.4기간에 공동행사를 성사시키면서 동시에 제2차 통일노동자회, 대표자회의를 실제로 성사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나갈 거다.

아울러 실천단과 지통대를 통해 해왔던 전국에 있는 미군기지 투쟁, 그 지역 지통대들이 그 지역을 책임지고 전개하는 하반기 사업을 고민하고 있다.

□ 민주노총 통일위원장이자 부위원장으로서 행사를 치른 개인적인 소감은?

■ 페이스북에도 그런 이야기했는데 가문의 영광이다. 갑자기 임원이 되고 통일위원장이 되고 정세적으로 예상은 했지만 너무 큰 사업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출마를 결심했을 때는 이런 정세를 생각하고 출마했던 것은 아니었고, ‘통일위원장으로서 중심을 잡는, 진짜 힘든 통일운동을 해보자’ 이렇게 생각하고 했던 거다.

주석단에 앉아 있으면서 단지 ‘아, 내가 대표자구나. 주석단에 앉았구나’ 이런 게 아니라 영광스러우면서도 무거움이 있었다. 가장 먼저 노동자들이 (민간교류의 문을) 열었다라는 건 작은 의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책임감 같은 게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주석단에서 내가 유일한 여성이면서 제일 어렸다. 사실 여성노동자 통일일꾼들, 지도자들을 발굴하는 것이 과제다.

또한 민주노총은 자주적으로 모든 사업이 진행되는 방향이라서 국고지원을 받지 않고 있는 곳이다. 이런 국가적 행사는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게 쉽지는 않다. 실제로 양대노총이 추진하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남북교류기금 관련해서 민주노총의 정치적 활동에는 여러가지 제한성과 소극성이 존재했다. 민주노총도 이제 교류사업 기금 관련해서 조금은 적극적인 정치적 포지션에서 역할이 필요하다는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수정, 21일 09:12)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