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욕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스피노자) 


 문의 즐거움 
 - 프랑시스 퐁쥬

 왕들은 문에 손대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행복을 맛보지 못한다. 친숙한 널빤지 하나를 부드럽게 혹은 거칠게 앞으로 밀고, 다시 그쪽으로 몸을 돌려 그것을 제자리에 밀어두는, ---팔로 문 하나를 껴안는 행복을.
 옆구리쯤에서 어느 방의 이 높다란 방해물을 자기로 된 고리로 움켜잡는 행복...... 이 재빠른 백병전으로 한 순간 걸음이 지체되면서, 경계하게 되어 몸 전체로 자신의 새 아파트에 익숙해진다.
 그는 우정 어린 손길로 문을 다시 한 번 잡는다. 단호하게 문을 밀어 닫기 이전에. ---그때의 힘차고 기름칠도 잘 되어 있는 용수철의 달그락 소리는 그를 안심시켜 기분 좋게 한다. 


 한 동안 한 정치인에게 가혹한 도덕적 잣대를 마구 들이대더니 ‘음모론’이 나오면서 갑자기 잠잠해졌다. 음모론이 맞다는 반증일까?  

 일부 언론이 도덕적 잣대를 휘두르면 사람들은 일제히 비난을 퍼붓는다. 댓글을 보면 온갖 욕설이 난무한다.  

 우리는 왜 남의 비도덕에 이리도 민감할까? ‘도덕’ 앞에만 서면 갑자기 이성을 잃어버리는 걸까?  

 그림자 투사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도덕을 배운다. 삼라만상은 ‘선과 악’으로 나눠진다.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선한 자가 될 수 있나? 겉으로만 선한 척한다. 선한 척을 오래하다 보면 자신도 속이게 된다. 악은 마음 깊숙이 숨겨진다. 마음 속 깊이 꼭꼭 숨긴 악은 차곡차곡 쌓여간다. 나의 어두운 모습, 그림자가 된다.  

 그림자는 기회만 있으면 고개를 바짝 든다. 깊은 무의식에서 빠져 나오려 발버둥 친다. 내 안에 악마가 있다! 우리는 두렵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악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다른 사람에게 저 사람은 악마야! 소리친다. 우리는 자신의 위선을 숨기기 위해 남의 비도덕에 이리도 가혹한 것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라고 했다. 현대철학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당연시한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이제 유물이 되어버렸다. 

 그럼 우리는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도 되는 걸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대로 살면 이 세상의 질서가 무너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욕망을 이성으로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중세의 사고에 머물러 있다.  

 헤세의 ‘데미안’은 욕망대로 사는 인간의 승리를 보여준다. 선과 악의 세계에 갇힌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자신 안에서 솟아나오는 것(욕망)’으로 사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욕망의 늪에 빠져 헤매기도 하며 싱클레어는 서서히 높은 차원의 욕망을 익혀간다. 드디어 자신 안의 욕망이 신(神)이었음을 깨닫게 되며 소설은 끝난다. 싱클레어는 앞으로 고귀하게 살게 될 것이다. 자신이 신이니까. 
 
 스피노자는 욕망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세상과의 관계를 바꾸어가라고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면 명품이 갖고 싶어진다. 하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 안의 고결함이 올라와 명품이 하찮아진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할까? 

 우리 안의 욕망은 바다의 파도 같은 것이다. 일어났다 사라진다. 상황에 따라. 우리는 상황을 바꾸어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문의 즐거움’을 아는 시인의 삶은 얼마나 고결할 것인가? 우리 안에서 기쁨이 가득 차오르게 한다.   

 ‘왕들은 문에 손대지 않는다./그들은 이런 행복을 맛보지 못한다. 친숙한 널빤지 하나를 부드럽게 혹은 거칠게 앞으로 밀고, 다시 그쪽으로 몸을 돌려 그것을 제자리에 밀어두는, ---팔로 문 하나를 껴안는 행복을.’

 ‘그는 우정 어린 손길로 문을 다시 한 번 잡는다. 단호하게 문을 밀어 닫기 이전에. ---그때의 힘차고 기름칠도 잘 되어 있는 용수철의 달그락 소리는 그를 안심시켜 기분 좋게 한다.’ 

 이런 일상의 너무나 소소한 기쁨을 아는 사람은 자신 안의 그림자도 자연스레 인정할 것이다. 남에게서 자신 안의 그림자를 발견하면 분노가 아니라 사랑을 느낄 것이다. 

 스피노자는 말했다. ‘나는 인간의 행위에 웃거나 울지 않으며 또한 증오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고귀한 삶에 대해 ‘신(神)에 대한 사랑’을 얘기했다. 자신 안의 신성(神性)을 깨달아 신이 되어 사는 것.  

 자신 안의 욕망을 성찰하며 살아보면 안다. 인간은 결코 낮은 차원의 욕망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 점점 고차원의 욕망을 갈구하게 된다는 것. 우리는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보지 못했기에 욕망을 두려워한다. 그 욕망을 남에게서 발견하고선 마구 손가락질을 한다. 

 이런 손가락질들이 우리 사회의 비교적 양심적인 사람들의 정치 생명줄을 끊어놓을 수가 있다. 그리하여 악투성이인 사람들에게 정치권력을 넘겨 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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