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겨레하나는 7월 4일부터 31일까지 총 6회에 걸쳐 시민강좌 ‘판문점선언시대를 읽는 아카데미’를 진행합니다. 다음은 지난 7월 2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은 어떤 나라인가’라는 주제로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이 진행했던 강연의 주요 내용입니다. 분단체제가 만들어 놓은 무지와 구조적 왜곡에 대해 살펴보며 존재자체로의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하는 것들을 생각해보는 자리였습니다.

강연 :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
정리 : 강혜진 서울겨레하나 홍보팀장

 

▲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은 지난 2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은 어떤 나라인가'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70년간 체제와 제도를 달리한 남과 북이 서로 다름을 배워나가는 노력 자체가 상호존중과 평화의 첫 출발이라고 강조했다. 상호존중이 평화이고 통일이라는 것. [사진제공-겨레하나]

총체적 북한 무지, 북맹! 분단은 북맹을 일반화한다
분단은 아는가? 통일은 아는가? 분단은 가르치지 않는다

분단체제는 사람들에게 북에 대해 구조적으로 무지의 상태와 체제적 왜곡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일까. 한국 땅에서 북한학을 한다는 것은 사회과학의 범주가 아닌 정치의 범주에 속한다. 북한학에서 학문의 진실, 과학을 추구한다면 ‘종북’,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매장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조차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과연 북한에 대해 누가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특히 북한 관련 언론보도는 왜곡보도가 너무 많다. 자극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북측 사회를 희화화 하고 상종하지 못할 혐오스런 곳이라고 국민들에게 유포한다. 종편과 언론사는 이런 보도들을 수백 편씩 쏟아낸다. 더 심각한 문제는 ‘팩트’라고 하면서 가져오는 국정원의 정보조차 신뢰성이 낮다는 점이다. 2013년도에 수많은 언론에서 모란봉악단 단장 현송월이 처형됐다고 보도했다. 이후 ‘국정원의 관계자’라는 확인되지 않은 교묘한 출처를 달아서 언론은 다시 그것을 기정사실화했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현송월은 얼마 전 삼지연악단의 단장으로 우리에게 공연을 선보였다.

종편과 언론들은 북측의 주요 군부인사가 장기간 각종 행사나 보도 등에 등장하지 않으면 그냥 ‘숙청’되었을 가능성이 높거나 아예 ‘숙청’되었다고 해버린다. 과연 그럴까?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에서도 1년에 봄과 가을에 군장성급 인사를 한다. 계급정년이 있기 때문에 정년이 되면 군고위급 인사들은 매년 인사를 통해 예편하고 또 충원된다. 이 상황에서 정기 인사를 통해서 예편되는 사람들은 모두 숙청되는 것일까? 그냥 정년을 맞아 은퇴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두고 ‘숙청이다, 처형이다’며 무책임하게 보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쌓여가는 오보들은 결국 국민들의 뇌리 속에 북측을 상종 못할 악의 나라, 혐오의 대상으로 이미지화시킨다.

다름과 차이, 그 기본조차 모른다. 분단은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런 보도들은 국민들에게 일상적으로 북한 혐오를 심어주며 적대적 분단체제를 심화시킨다. 그러면서 북한문제나 남북관계에 있어서 온전하고 상식적인 사고가 작동할 수 없도록 한다.

개성공단에 있을 때 일이다. 남측에서 선거가 있을 때마다 북측은 선거에 대해 많이 궁금해 하면서 과연 누가 당선될지 물어본다. 그러면 늘 “남측 선거는 투표함을 열어봐야 결과를 알 수 있다”라고 한다. 즉 밤새 개표해봐야 알 수 있다고 답변하면 북측은 그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의 상식으로 보자면 선거결과는 ‘까봐야 아는 것’이다. 그런데 북측은 이런 상황을 매우 불안정한 상황으로 인식한다. 내일 당장 누가 정치지도자가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 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불한정한 상황인 것이다.

북측에서 선거란 관련 해당 구성원들이 충분히 토론·토의를 통해 완벽히 합의해서 한 명을 만들어 놓고 투표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표로도 당락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선거제도이다. 다양한 선거제도 중 남과 북이 택한 방식이 달라서 생긴 대화였다. 그러나 보통 우리들은 우리의 제도를 기준으로 북을 평가한다. 그리고 그들이 ‘비상식적’이라고 폄훼하곤 한다.

대한민국에서 매년 국적을 포기하는 사람이 2만 명 정도 된다. 즉 이민자가 매년 2만 명이 넘는다. 그러면 2만 명의 국적 포기자들은  ‘탈남’한 것인가. 남한의 폭정에 참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이 떠나는 것인가?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각자의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듯 특수한 상황을 일반화해서 한국사회 전체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탈북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은 어떠한가. 경제적 문제로 중국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다시 경제적 이유를 중심으로 한국행을 택한다. 이런 탈북자들은 전체 2,500만 명의 북측 주민 전체로 보면 특수에 해당된다. 그런 특수를 전체 모든 북측 주민들이 모습인양 일반화하면 인식이 오류를 낳을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탈북 문제에 대해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각색해서 방송하는 종편 예능 프로그램들의 문제도 있다.

우리 사회가 북을 바라보는 인식의 태도, 관점은 크게 여섯 가지로 분류된다. 적대적 관점, 대립적 관점, 비교적 관점, 경제적 관점, 우리식의 관점, 일반화의 오류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여섯 가지의 관점을 압도하는 가장 큰 인식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북에 대한 무관심이다. 그러다보니 북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한국사회에서 북을 알기 위해선 이런 겹겹의 장벽들을 넘어서야만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북은 도대체 어떻게 작동되는 사회일까.

북한의 공동체성 : 동네 아이의 피부이식을 위해 줄 선 동네 사람들

북은 경제제도는 사회주의를, 사회문화적으로는 고도의 집단주의, 공동체성이 작동되는 사회다. 북측 주민들은 소학교 2학년에 시작되는 소년단 생활 이후부터 누구라도 반드시 자기가 속한 조직이 있다(직맹, 농근맹, 청년동맹, 여맹, 조선노동당 등). 북측 사람들 누구나 하는 조직생활은 북의 집단주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 중 하나이다.

북측 사람들의 삶에서 집단주의와 공동체성이 어떻게 나타날까. 북에서 결핵퇴치사업을 하는 ‘유진벨 재단’의 현장의료 점검단들이 목격한 일이다. 점검단이 마을 병원에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기에 무슨 줄이냐고 물었다. 사연인즉슨, 그 마을에 13살 정도 된 아이가 집에서 3도 화상을 입은 긴박한 상황이 발생했고 피부 이식 수술 전까지 감염을 막기 위해 화상부위를 잠깐 덮을 피부를 이식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마을 방송을 통해서 전파됐다고 한다. 그 방송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아이를 위해 자신의 피부를 이식하기 위해 줄을 섰다는 것이다.

‘집단주의’라는 간단한 말 속에는 다양한 북측 사람들의 삶이 담겨져 있다. 어떤 모습은 우리에게 훈훈한 정과 사랑을 보여주기도 하고, 어떤 모습은 생경하기도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다름을 계속 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처음 먹어보는 생소한 음식도 계속 먹다보면 익숙한 음식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개성공단은 한반도식 통일정책이다

북측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 중 하나는 그들의 가슴에 달린 배지-초상휘장이다. 북측 사람들은 가슴에 김일성-김정일의 초상이 그려진 초상휘장을 달고 다닌다. 남측 사람들인 우리가 볼 때는 신기한 모습이다. 남측 사람들이 북측 사람의 가슴에 달린 초상휘장을 호기심으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 배지 구경 한 번 합시다”라고 물었다. 그런데 상대방은 예상 밖에 진지한 모습으로 “배지가 아닙니다. 초상휘장입니다. 함부로 손가락질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에 모시는 겁니다”라고 대답한다. 우리에게 별 것 아닌 것이 그들에게는 소중한 생활양식의 상식적 가치규범일 수도 있다.

故노무현 대통령도 개성공단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 남과 북 노동자들에게 연설을 했었다. “여기 개성공단이 바로 남과 북이 하나 되는 현장입니다.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합시다. 이곳은 분단의 역사를 평화의 역사로 만드는 곳이고 여러분은 민족의 선각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만드는 제품은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자긍심을 가지십시오.” 이 발언을 들은 우리 남측의 노동자들은 뿌듯해했다.

그렇다면 북측의 노동자들은 어땠을까? 다 울었다. ‘여러분들이 평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자긍심을 가지십시오.’ 이 말이 그들의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우는 북측 노동자들을 본 우리 대통령이었다. 이렇게 남과 북이 하나의 말을 듣고도 반응이 다르다. 개성공단이 의미 있었던 것은 남과 북의 6만 여명의 사람들이 같은 공단에서 매일 같이 다름을 서로 배우고 익혀가면서 매일매일 작은 평화와 통일의 사례들을 발현, 축적한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어떻게 통일을 할 거냐고 묻는다. 독일통일의 상징적 정책인 빌리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을 실제로 입안했던 에곤 바르는 2005년에 개성공단을 보고나서 “한국의 통일정책 다른 것 필요 없고 개성공단을 따라가라. 제2, 제3의 개성공단을 하다보면 이미 평화와 통일이 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개성공단은 평화가 정착되고, 경제통일이 오고, 궁극적으로 통일이 만들어지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난 보수정권 10여 년간 개성공단은 공격받고 끝내 폐쇄되고 말았다. 하지만 다시 4.27 판문점선언으로 상징되는 평화이 시대가 실질적으로 열리고 있다. 분단시대의 종언, 평화시대의 개막!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이런 상황과 맞물려 남북의 화해협력과 사회문화교류, 경제협력으로 상징되는 번영의 시대에 진입하는 첫 출입구에 개성공단 재개, 정상화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김정은 시대 이후 북측의 변화는 경제·사회·문화적으로 괄목할만하다. 이 변화를 읽어야 한다. 5개의 경제특구, 22개의 경제개발구를 선정하고 경제개발구법을 제도화했다. 여러 많은 지역을 관광특구화하고 있다. 원산을 관광특구로 지정하고 ‘아시아의 나폴리’로 만들겠다며 국가적 차원에서 재원을 투입하고 있다.

2013년 이후 북측은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대해 외국인 여행을 열었다. 호기심에 북측을 여행하는 여러 많은 나라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진짜 멋진 여행을 원한다면 이것보다 좋은 게 없을 것이다.”, “북에 대한 선입견들은 북한주민들과 만나면서 산산조각 났다”, “북이 무서운 나라라는 인식 갖고 있었지만 그들은 매우 개방적이고 친절했다” 이런 식의 여행후기를 남기는 다양한 국적의 여행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통일의 개념은 단순하다. 수십 년간 헤어진 가족이 다시 만나서 저녁 한 끼 나누어 먹는 것. 이것이 일상의 통일이다.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는 것이다. 남과 북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며 교류하는 것. 그러나 지난 10년간 정부와 언론과 수많은 거짓 학자들이 만들어 낸 것은 북에 대한 혐오와 폄훼였다. ‘혐북’을 만들어 내고 ‘북맹’을 양산해왔다.

북은 변화하고 있다. 이제 우리들 마음속이 분단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존재하는 북을 이리 비틀고 저리 왜곡하는 분단체제의 왜곡과 오도가 아니라, 존재하는 그대로의 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온전히 보고자하는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남북이 상호 존중하는 순간 평화가 시작되고 통일도 완성된다. 상호존중! 다름과 차이를 옳고 그름, 맞고 틀림, 선과 악의 이분법적 흑백논리로 재단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면 이미 평화이고 통일이다. 상호존중은 대한민국의 국가공식통일방안인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기본정신이다.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고 존중받을 수 있는가? 호혜가 호혜를 평화가 평화를, 적대가 적대를 낳는다. 우리는 북측을 존중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인 ‘평화통일’ 그 평화가 과연 상호존중 없이 시작될 수 있는가?

70년 체제와 제도를 달리한 남과 북은 생활양식, 가치규범, 사고방식, 관습과 문화에서 적지 않은 다름을 만들었다. 그 다름을 배워가고자 하는 노력들이 상호존중과 평화의 첫출발이다. 평화를 원하는가? 상호존중하자. 존중받고 싶은가? 그러면 먼저 존중하자. 북측 땅 그곳에는 참 맑고 순수한 2,500만의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존중하자. 그러면 평화다. 존중하자. 그러면 이미 통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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