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겨레하나는 7월 4일부터 31일까지 총 6회에 걸쳐 시민강좌 ‘판문점선언시대를 읽는 아카데미’를 진행합니다. 다음은 지난 7월 24일 ‘분단체제와 혐오를 넘어, 평화시대 여성의 삶’이라는 주제로 김귀옥 한성대 교수가 진행했던 강연의 주요 내용입니다. 북한여성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판문점시대에 남과 북의 여성들이 어떻게 만나고, 어떤 평화시대를 만들어가야 할지 생각해보는 자리였습니다.

강연 : 김귀옥 한성대 교수
정리 : 강혜진 서울겨레하나 홍보팀장

 

▲ 서울겨레하나가 24일 개최한  '판문점선언 시대'를 읽는 아카데미 네 번째 강좌. 김귀옥 한성대 교수가 24일 ‘분단체제와 혐오를 넘어, 평화시대 여성의 삶’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강혜진 통신원]

2018년, 남북이 만들어온 한반도 평화의 타임라인을 떠올려보자. 삼지연관현악단의 공연, 북한 대표단과 문재인 대통령의 만남, 그리고 4.27 판문점선언과 이후 북미정상회담까지. 이 역사의 꼭지점마다 공통점은 현송월, 김여정, 최선희 등 북한‘여성’들이 함께 자리한다는 점이다.

북한의 최고인민회의를 보면 여성이 25% 내외를 차지하는데 남한의 경우, 최근 여성 국회의원들이 많이 진출하고 있고, 기초 지자체의 경우 여성의 수가 많아지고 있지만 수치로 보자면 압도적으로 북한이 많다. 북한에서 여성은 어떤 지위를 획득해 왔을까. 시기별 북한 여성의 삶의 궤적을 함께 살펴보자.

종속적 여성에서 독립적 여성으로 - 남녀평등권과 토지개혁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사회가 변화한다. 그 중 여성의 사회적 성격을 바꿔놓는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여성의 존재론적 성격과 위상을 바꾸는데 가장 의미가 있는 사건은 남녀평등권 도입이다. 제도적 성평등은 남한보다 북한이 빠르게 도입한 것이다. 북한은 남한보다 제도적인 성평등을 먼저 만든다. 남한의 경우 1989년도에 들어와서야 남녀평등권을 만드는 것에 비해 북한은 46년 7월 30일에 공포된 “북조선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령(9개조)”와 9월 14일 공포된 법령의 “시행세칙(29개조)”에 남녀평등권을 기초에 둔다. “동일노동·동일임금” 권리,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자유결혼권, 자유이혼권과 재산상속권과 이혼시 재산과 토지분배권을 제정한다. 또 조혼이나 민며느리제도, 일부다처제, 공·사창제도를 금지하였다.

둘째, 현실적으로 여성의 평등권을 보장한 최초의 제도적 실효는 토지개혁으로 나타난다. 토지개혁 당시 성인 남녀 모두에게 같은 1점씩을 부여하였는데, 설령 토지는 호당 합산되어 분배되었지만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몫을 자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자신의 몫을 갖게 된 것은 남편에 대한 의존적 삶에서 사회정치적으로 독립된 개체로서 각성시키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셋째, 문맹퇴치운동과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은 여성의 근대 의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해방 직전 전국 문맹률은 77.8%에 달했고 여성 문맹률은 90%이상이었다. 그러나 1945년 말에 각 도에 ‘야학회’나 ‘성인학교’ 등에서 문맹퇴치운동이 시작되었고 1949년 초쯤에 운동이 끝났다. 문맹퇴치운동과 건국사상총동원운동으로 일제 잔재나 봉건 잔재를 청산하면서, 미신 숭배나 남존여비 사상도 척결해 가는 과정이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성들도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여성이 사회역사의 주인이라는 인식으로 발전하여 여성의 권리 의식의 발전과 함께 사회적 책임감도 같이 형성된다.

넷째, 조선민주녀성동맹이 1945년 11월 18일 창립되면서 조선직업총동맹이나 농업근로자동맹, 민주주의청년동맹 등에 가입하지 않았던 북한 여성들도 조직원으로서 지위를 가지게 된다. 여맹원들은 남녀평등권을 실현해 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남성이나 사회단체들에 대하여 설득과 비판을 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여성의 권리를 실현하는데 앞장섰고 일반 여성들에게 여성해방 인식을 보급하게 된다.

한국전쟁이 가져온 ‘여초사회’

한국전쟁은 남북 모든 주민들에게 절대절명의 위기를 주었다. 전쟁 직후 북한에는 ‘트럭 대 일’이라는 농담이 유행하는데 한 트럭분의 여성에 남성 한 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북한은 전통적으로 남초사회였다. 토지가 남쪽에 비해 부족하지만 광산 등이 존재했고 이를 토대로 일제강점시기 공업단지들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여성 100명당 남성의 수는 일제강점시기 이남이 93.2, 북이 108.3이었으나 전후에 상황이 역전되어 1953년에는 북이 88.3으로 감소된다.

전쟁 직후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 되면서 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여성들이 공장을 직접 돌리거나 농사를 전담하기도 했고, 과거 금녀(禁女)의 직종이었던 트럭이나 기차 운송업, 어업(선원), 광업(광부)에도 투입된다. 특히 중공업 중심으로 공업을 발전시키고자 했던 당시 북한은 젊은 남성 대부분을 이러한 공장 혹은 건설부문으로 투입한다. 그 과정에서 농촌에서는 여성 관리자들이 일찍이 성장할 수 있는 터전이 조성된다. 한달화 협동관리위원장과 같은 인물이 1960년대부터 배출되었던 것이 이러한 배경이다.

아이가 있는 여성들에겐 2시간의 휴식시간을

▲ 김귀옥 교수는 북한의 모성보호제도 등을 구체적으로 예시했다. [사진 - 통일뉴스 강혜진 통신원]

일하는 여성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노동전선에 뛰어들기 위해서 국가는 무엇을 보장해줘야 할까. 바로 보육, 가사, 교육 등이다. 북한에서는 본격적인 ‘여성의 노동계급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탁아소 건설을 비롯한 모성보호 제도를 갖춘 여성복지 제도를 구비하기 시작한다. 북한이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3대 기술혁명’을 추진하며 여성들을 가사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과제들을 제시한다. 또한 여성의 간부화와 인테리화도 추진한다.

구체적으로 여성관련 정책 중 모성보호제도를 살펴보자. 모성보호제도는 월 1회의 유급 생리휴가제, 임산부의 경우 가벼운 업무 배치와 시간외노동과 야간노동 금지, 산전산후 100% 유급휴가제를 들 수 있다.

남한과 다른 특이한 제도로는 ‘수유권’을 들 수 있다. 북한도 8시간 노동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생후 1년 이하 유아를 가진 직장 여성의 경우 오전 오후 각 2회 각 30분씩, 1년 이상의 유아를 가진 어머니의 경우 오전 오후 각 1회 각 30분씩 휴식시간을 가진다. 북한은 공장별, 직장별로 탁아소를 운영하는데 본인이 일하는 일터에 어린이집이 붙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쉬는 시간에 이러한 육아시설에 있는 자신의 아이들을 보러 갈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보육뿐만 아니라 가사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가사의 사회화’정책을 실시한다. 1950년대 후반부터 각종의 옷 공장과 생필품 공장, 공동세탁소, 공동식당을 운영하고 가정용 냉동고와 전기가마 등의 부엌세간을 공급해 나갔다. 이후 밥공장이나 부식공장, 된장공장, 간장공장 등이 전국적으로 설립된다.

남-북 여성이 ‘어떤’ 한반도평화를 만들어 갈 것인가

이제 분단국가주의의 가부장적 제도를 만들어 왔던 이전 시기와 결별을 할 때가 되었다. 한반도평화시대를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함께 만들어야 한다.

통일의제를 만들어 가는데 여성이 있음으로서 젠더화된 통일의제를 설정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남북여성교류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만남의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남북여성교류의 과정에서 여성의 지위도 제고해야 하고 혐오, 반공, 분단의식에 대한 성찰적 태도도 필요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그들의 삶을 이해해보겠다는 자세다. 그리고 상대방의 좋은 점은 본받고 아쉬운 점은 서로 고쳐 가면 된다.

북한 사회에서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가져올 것이 있다면 조직성이고 우리 사회의 장점은 자율성이다. 조직성과 자율성이 결합했을 때, 새로운 한반도는 어떤 모습일까. 적어도 분단국가주의 아래 착취당하는 여성의 삶이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남과 북의 여성이 함께 힘을 합쳐 만들어갈 새로운 한반도에서의 여성의 삶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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