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애무는 몸을 살로 바꾼다 (사르트르)

 

 손으로 느끼는 삶 
 - 옥타비오 파스 

 나의 손은 
 너의 존재의 커튼을 연다. 
 너를 또 다른 벌거숭이 옷으로 입히고 
 네 몸의 그 많은 육체들을 벗긴다. 
 나의 손은 
 너의 몸에서 또 다른 몸을 창조한다. 

 

모 고등학교에서 인문학을 강의하다 한 남학생에게 나눠준 자료를 읽으라고 했더니 그 남학생은 ‘선생님, 저는 미성년자라 못 읽겠어요.’

‘응?’ 나는 의아스레 그를 보았다. ‘애무라는 단어가 있잖아요.’ ‘애무?’ ‘젖가슴이라는 단어도 있고요.’

아이는 다음의 글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태양이 바다를 젖가슴처럼 애무하는 것으로 보는 것. 그게 바로 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사물을 안다는 것은 애무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했을 때 이 사람을 잘 알게 될까? 단지 고찰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니체)’

그래서 옆 자리의 여학생에게 글을 읽게 하고 강의를 진행했다.

어떤 단어를 해석할 때는 ‘맥락’을 보라는 취지의 강의를 했다. ‘애무’ ‘젖가슴’이라는 단어들은 어떤 문맥에서는 음란한 단어가 될 수 있고, 어떤 문맥에서는 고상한 단어가 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어떨까? ‘사물을 안다는 것은 애무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글 이해를 위해 한 인상파 화가의 작품들을 예로 들었다. 모네는 말했단다. ‘보고 또 보며 사물의 운동성을 되살린다.’ ‘모네의 작품들을 눈앞에 떠올려 봐.’ ‘수련 연작,’ ‘인상, 해돋이’ ‘양산을 쓴 여인’ ‘이때 모네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았을까? 애무의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까?’

‘우리가 산에 갔다고 생각해 보자. 이름 모르는 꽃을 보았다면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꽃에게 다가가서 향기도 맡고 손끝으로 조심스레 만지며 경이롭게 꽃을 바라보지 않겠니? 이름을 아는 꽃을 보았다면 저건, 민들레. 저건 패랭이꽃. 하고 말거야! 어느 게 꽃을 제대로 아는 걸까?’

학생들은 비로소 니체의 ‘애무’를 이해하는 것 같았다. 강의가 끝나고 학생들과 현관 앞에서 헤어졌다. 처음에 질문했던 그 남학생이 ‘선생님, 감사합니다.’ 90도로 내게 인사를 했다. 그 남학생의 맑은 눈빛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우리 사회가 너무나 오랫동안 ‘검열’을 해 온 결과 우리는 말과 글에서 ‘맥락’을 읽는 힘을 많이 잃어버렸다.

지금도 외국 영화를 보다보면 분노가 치민다. ‘성기’ 부분을 모자이크 처리를 한 것이다. 그 맥락에서는 성기가 노출되어야 깊은 감동이 올 텐데. 허탈해진다. 화가 난다. ‘무조건 성기는 내 놓으면 안 돼!’ 이렇게 길들여진 마음으로 어떻게 명화(名畵)를 이해할까? 수많은 명화가 누드인데.

몸의 어떤 부위를 금기시하면 마음이 음란해진다. 몸의 특정 부위를 보기 위해 ‘몰카’가 유행한다. 우리가 나무를 바라볼 때 부위별로 보지 않는다. 개를 볼 때도 부위별로 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사람은 부위별로 보아야 하나? ‘성기 중심의 사고’에 빠져 버린 마음. 세상에 포르노가 판친다.

일본의 어느 여성 무용수는 눈이 내린 겨울 산을 나체로 걷는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이때 여성 무용수, 관객, 눈, 나무, 산, 하늘은 자신들의 몸을 벗고 살로 바뀔 것이다. ‘하나의 살’인 세상. 만물제동(萬物齊同)이다. 여기에 어떤 음란이 끼어들 틈이 있는가?

‘나의 손은/너의 존재의 커튼을 연다./너를 또 다른 벌거숭이 옷으로 입히고/네 몸의 그 많은 육체들을 벗긴다./나의 손은/너의 몸에서 또 다른 몸을 창조한다.’

‘손으로 느끼는 삶’이 눈앞에 경외스럽게 펼쳐지지 않는가? 이 시대 최고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의 시에서 음란함을 느낀다면 우리는 얼마나 슬픈가?

오래 전 강의 시간에 신현림 시인의 ‘희망의 누드’라는 책을 소개했더니 한 수강생이 질문을 했다. ‘왜 책 제목이 희망의 누드예요?’ 나는 대답해 주었다. ‘하늘의 별도 누드가 아닌가요? 지상의 나무는요? 돌멩이는요? 동식물들은요? 각자의 몸이면서 하나의 살이 아닐까요?’

모 여고에서 국어 교사가 고대 가요 ‘구지가(龜旨歌)’를 설명하다 성희롱 논란에 휩싸였다고 한다. 문제의 핵심은 ‘거북이 머리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한다.’는 발언이 아닐 것이다. 그 말이 맥락에 따라 성희롱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이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