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는 24일 긴급조치 9호 피해자를 중심으로 '민주·인권·평화를 실천하는 긴급조치 사람들' 창립총회가 열릴 예정이다. 준비위원장으로서 창립 총회를 준비해 온 정병문 주권자전국회의 상임공동대표와 17일 주권자전국회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와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 그리고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이 조치를 위반하거나 비방하는 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고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무려 44년 전인 1974년 1월 8일 선포된 긴급조치 1호의 내용이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1972년 10월 종신집권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바꾼 것도 모자라 그 유신헌법 53조에 긴급조치(긴조)를 할 수 있는 대통령의 권한을 끼워 넣었다.

경제현안에 대한 긴급조치 3호와 민청학련, 인혁당사건을 낳은 긴급조치 4호, 고려대학교의 휴교를 명하는 긴급조치 7호에 이어 1975년 5월 13일 마지막 긴급조치 9호가 시행되었다. 중간에 빠진 숫자들은 그 전 긴급조치를 해제하거나 관련 기구를 설치하는게 내용의 전부인 조치들이다.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고 한 시인이 있었는데, 그 1974년 1월 8일 선포되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사망으로 사실상 효력이 사라질때까지 1,260명(4.9통일평화재단 추산)에 달하는 학생, 재야운동권, 언론인, 노동자 등 민주사회의 시민들이 이 '긴조'라는 흉포한 무기에 희생당했다.

특히 긴급조치 9호는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 10월 26일까지 4년 5개월간 맹위를 떨치며 1,000여명의 피해자를 양산했다.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된지 40년이 지난 2013년 3월 21일 헌법재판소(헌재)는 긴급조치 1,2,9호와 긴급조치 선포의 근거가 되었던 유신헌법 제53조에 대해 8명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긴급조치가 선포절차와 내용에서 모두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영장주의 등 현행 헌법의 기본원칙에 어긋난다고 위헌결정 이유를 밝혔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은 이 결정 이후 재심을 청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상처를 씻고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한 희망의 걸음을 그렇게 쉽게 뗄 수는 없었다. 

2011년 9월 대법원장으로 취임한 양승태는 상고법원 도입을 역점 사업으로 추진, 2013년 2월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과 거래를 시작하고 그해 5월부터 2015년 3월까지 헌재의 위헌결정을 교묘히 뒤집어 버리는 사법농단을 자행했다. 

이에 2013년 9월 가칭 민주인권평화재단 준비모임을 시작했던 긴급조치 관계자들은 2014년 11월부터 유신에 면죄부를 주는 대법원 판결을 규탄하는 릴레이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지난해 9월 양승태의 퇴임과 함께 대법원 앞 1인 시위를 종료한 재단 관계자들은 그간 변화된 상황과 활동 과제 등에 대한 숙의를 거쳐 법인 명칭을 '사단법인 민주·인권·평화를 실천하는 긴급조치 사람들'(긴급조치 사람들)로 정하고 오는 24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긴급조치 사람들' 준비위원장을 맡아 창립 준비에 여념이 없는 정병문 주권자전국회의 상임공동대표를 70주년 제헌절인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주권자전국회의 사무실에서 만나 그간의 여정과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 '사단법인 민주·인권·평화를 실천하는 긴급조치 사람들' 창립 총회가 24일 열린다. [사진제공-주권자전국회의]

□ 통일뉴스 :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창립총회를 앞두고 있다. 창립과정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달라.

■ 정병문 준비위원장 : 처음에는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위헌심판 청구를 하는 모임으로 출발했다. 긴급조치는 기본적으로 당시의 유신헌법이나 지금의 헌법 정신에 비추어 볼때 위헌이라는 취지이다. 다들 박정희에 의한 불법부당한 권력행위이고 국가폭력 행위라고 생각했다.

2010년 12월 '긴급조치 9호 등 재심대책위원회'를 구성한 것이 첫 출발이었다. 가장 먼저 위헌 판결이 났던 인혁당과 민청학련 등 긴급조치 4호 피해자를 제외하고 인원이 가장 많은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이 처음에 모였다.

긴급조치 9호는 4년 6개월 가까이 조치되었기 때문에 이름만 '긴급'이었지 '일상'적인 조치였다. 피해자만 1,000여명일 정도로 숫자가 많고 여러 지방의 대학 등 구성원들이 다양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긴급조치 9호의 위헌심판 청구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각 그룹별로 민변 등을 통해 각자의 사건에 대해 무죄를 주장하는 재심 재판을 먼저 청구하기로 한 것이다. 2011년 3월에서 5월까지 긴급조치 9호 피해자를 중심으로 250여명이 재심을 신청하고 그해 10월 13일에는 헌법재판소가 긴급조치 1,2,9호와 유신헌법 제53조에 대한 헌법소원 공개변론을 실시하기도 했다.

2012년 10월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긴급조치 사건의 일괄 무효화를 추진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하고, 이듬해 1월 '긴급조치 9호 및 1호 관련자 재심대책위원회'로 확대 개편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2013년 3월 21일 헌법재판소에서 긴급조치 1,2,9호에 대한 위헌판결이 났다.

□ 긴급조치 1,2,9호 위헌 판결은 중대한 변화였을 것 같은데...

■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은 재심대책위원회 활동을 통해 제기한 개별적인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져 대부분 무죄판결을 받았다.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게 되면 형사 보상금을 수령하는데 일부를 기금으로 출연해 재단법인을 구성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전국적으로 많은 숫자의 긴급조치 9호 관련 재심에서 무죄판결받은 사람들이 많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고, 확보되는 형사보상금의 일부를 기금으로 출연하겠다는 기대와 약속이 있었다.

그래서 2013년 4월부터 기획팀을 구성해 공익재단을 설립하기로 하고 그해 9월 민주주의 심화 발전과 민주주의 역사에 대한 정리 등 사업을 벌여나가자는 계획을 가지고 가칭 민주인권평화재단설립 준비모임을 만들었다.  

□ 형사보상과 함께 국가배상 청구소송도 진행하지 않았나 

■ 재심 무죄판결에 따라 형사보상이 주어지는데, 한편에서는 국가폭력 행위인 긴급조치에 대해서 재발하지 않도록 징벌적 의미를 갖는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공익재단에서는 국가배상 소송이 진행되면 거기서 나오게 되는 배상액의 일정 금액이 기금으로 출연되어서 재단의 재정을 보강,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표적인 사업으로는 우리만의 독특한 민주주의 발전 역사를 정립하고, 한국이 이룩한 민주주의 경험을 아시아 각국과 나누며, 독일의 사례에서 볼 수 있었던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정치교육을 시작하자는 구상이었다. 당초에는 목표 금액을 60억원에서 100억원 정도로 잡았다.

▲ 원풍모방노조 헌재 앞 1인 시위. [사진제공-주권자전국회의]
▲ 헌법재판소 앞 1인 시위. '과거사 사건에서 정의와 피해자 원상회복 위해 헌재는 조속히 위헌 판결하라!'[사진제공-주권자전국회의]
▲ 유신헌법 긴급조치 피해자모임 1인 시위. '박정희의 긴급조치는 위헌 위법!' [사진제공-주권자전국회의]

□ 헌재의 위헌판결에도 불구하고 양승태 대법원에서 판결 번복이 있었는데...

■ 최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실체가 뒤늦게 드러나면서 확인되고 있지만, 당시 대법원에서는 청구권의 소멸시효가 6개월이라고 하면서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국가배상 청구를 기각하는 일이 있었다. 

또 지난 김대중 정부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된 일부 사람들에게 제한적으로 생활지원금을 지급한 일에 대해서도 이를 재판상 국가와 화해한 것으로 간주하고 민사상 배상청구권이 소멸된 것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나아가서는 긴급조치가 위헌일지라도 당시에 긴급조치는 실정법이었기 때문에 그게 기반한 법관의 판결은 문제될 수 없다고 하면서 고문하거나 불법한 증거를 조작한 경우가 아닌 한 별도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판결을 하기도 했다. 

또 긴급조치는 대통령의 고도한 통치행위로서 국민 전체에 대해 총체적으로 책임질 뿐 개별 국민이 긴급조치에 대해 국가에 대한 피해배상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는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양승태 사법부의 이같은 논리에 따라 재판은 대체로 패소하게 되어서 공익재단 설립이 어렵게 되었다.

□ 양승태 사법부의 농단행위로 인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 있는데... 

■ 2014년 4월 박근혜가 세월호 사건 이후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대법원에서 헌법을 왜곡 해석하는 판결이 계속 나왔기 때문에 그해 11월께 부터는 가두 기자회견을 하면서 사법부에 대한 1인 릴레이시위를 시작했다. 사법투쟁을 시작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양승태가 퇴임하고 김명수 대법원장이 취임했기 때문에 지난해 9월부터 잠시 릴레이시위를 중단했는데, 최근 양승태의 사법농단 실태가 드러나면서 지난 6월말부터 헌재 앞 1인시위를 재개했다.

또 그동안 추진해왔던 공익재단은 재산을 중심으로 설립하는데 따른 현실적인 문제도 있고 당면한 사법개혁 활동의 주체를 시급히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즉시 설립할 수 있는 사단법인으로 법인 주체를 변경하자는 결의도 있고 해서 오는 24일 창립하려고 하는 것이다.

□ 경과를 정리하기도 쉽지 않을 만큼 오랜 세월이 걸린 것 같다. 앞으로 사단법인 출범식을 하고나면 어떤일을 하게 되나.

■ 한국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부단한 투쟁과 희생에 힘입어 제 모습을 갖추는, 독특한 과정을 밟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우리나라 민주주의 과정을 잘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긴급조치를 겪은 우리의 경험을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고 또 반추하면서 민주주의의 현 단계를 진단하고 앞으로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민주시민교육, 시민정치교육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될 것이다.

똑같은 패전국이지만 전후 독일은 일본과 달리 나치의 준동을 용인한 과거를 철저히 반성했다. 독일은 이런 시민정치교육이 있었기 때문에 전체 독일민족이 전범으로 전락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면서 다른 나라들과 관계도 정상적으로 해나갈 수 있었다고 본다.

외세의존적이고 정통성을 결여한 집단들이 아직도 큰소리를 치는 우리의 민주주의는 주권자인 시민이 주류적 질서가 되지 못하고 그와 대립하는 측면이 있을 만큼 지금도 채워나가야 할 내용이 많다고 할 수 있겠다.

최근 사법농단의 경우만 보아도 대다수 시민의 양심은 사법부의 독립을 민주주의 발전의 당연한 경로로 생각하고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할 수 있도록 존중해 주었지만, 정작 양승태 같은 사법 기득권들은 자신들의 특권적 구조를 강화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당면하여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를 목표로, 과도기적이고 불완전하긴 하지만 전 시민적 투쟁을 통해 확립한 1987년의 헌법체제를 시대변화에 맞춰 고치는 일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선거법 등 정치 관련 법률도 바꾸고 국회운영도 민주화하고 특히 무너진 사법부를 개혁하는 일도 미룰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또 남북의 평화와 번영, 통일의 열망이 커지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과거 세력의 대결적 태도를 극복하는 일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시민들의 희생과 헌신에 힘입은 바 큰 우리 민주주의 발전의 경험을 아시아 민주화과정에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공유하고 활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열린 양승태 사법농단 고발대회. [사진제공-주권자전국회의]

□ 일부 국가폭력피해자 지원단체에서는 최근 과거사 관련 재심에서 많은 무죄판결이 나오고 있는데 가해자들이 받은 서훈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또 무죄판결이후 청구하는 국가배상금도 결국 국민세금인 예산인데, 국가가 가해자들로부터 적극적으로 구상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 대의와 명분 차원에서 보자면 그동안 반헌정 행위와 국가폭력 행위에 연루된 가해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일이 미온적이거나 후순위로 밀려나 제대로 처리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현행 법체계상 징벌적 손해배상이 도입된 예가 없다고 하는데 재발방지를 위해서라도 '징벌'의 그 정신은 살려야 한다고 본다.

국가의 부당한 폭력행위, 반헌정행위는 앞으로 일절 발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그 행위에 가담했던 공무원, 언론 등 가해자에 대해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형사상 책임은 당연한 것이고 명예에 관한 것, 민사상 책임(추징, 몰수)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가 구상권을 적극 행사해서 그것을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에 대한 원천으로 사용하게 하는 것이 온당하다. 변호사단체 등과 법률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 앞으로 재심 절차 등에 대해 법인의 지원이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 전체 긴급조치 관련 피해자는 1,26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얼마전 국가가 직권재심을 청구해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김사인 동덕여대 교수, 김명인 작가 등 150여명이 무죄판결을 받았다. 긴급조치 피해자의 대다수가 학생들이지만 노동자, 막걸리 긴급조치 피해자도 많아서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모르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긴급조치 1호와 4호는 단일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의 성격이나 구성이 단순한데 비해, 9호는 5년가까이 진행되어서 관계자의 숫자도 많고 복잡한 경우들이 적지 않다. 

당시에는 시절이 흉흉하다보니 이해관계를 다투는 일방이 다른 한쪽을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 위반으로 무고한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 긴급조치와 국가보안법, 반공법, 집시법이 경합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 경우 국가 직권재심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경우별로 대처가 달라야 하기 때문에 법률지원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처음에 공익재단으로 출범하려고 했을 때 재심에서 무죄판결과 함께 형사보상금을 받은 분들 가운데 기금을 출연해 준 분들이 전국에 120명 정도된다. 이 분들이 초기 회원이고 요즘 양승태 대법원장 등의 사법농단이 폭로되면서 사법개혁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어 창립식까지 200~300명 정도는 참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 '긴급조치 사람들'을 표방한 우리만이 아니라 과거사 관련 피해자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광주민주화운동, 제주4.3양민학살 사건 등이다. 그나마 이 경우는 국가가 나서서 관련법률을 제정하고 아주 초보적이지만 국가적으로 과거사 정리사업 등을 하는 절차가 시작되었다.

보도연맹, 한국전쟁 양민학살을 비롯해 우리 현대사에 국가가 가해자인 사건의 희생자들이 많은데 이런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민주화를 완성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도정에서 이런 과거사에 대한 정리와 자리매김, 책임져야 할 자(국가, 개별적 행위자, 반헌정 행위자, 역사의 죄인들)들에 대한 응당한 책임을 지우고,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권리 구제 과정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분단의 질곡 속에서도 시민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한국의 민주화가 이만큼 진행된 것은 굉장히 특징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이 일을 잘 정리하는 것은 우리가 큰 희망과 기대를 갖고 맞이하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 화해와 협력의 새시대를 그려나가는데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힘을 모아서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다.


전 과목 입시를 보았던 서울대학교 73학번인 정상문 대표는 입시를 얼마 앞두고 고3 때인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통과되었기 때문에 개정 유신헌법을 다룬 정치경제 과목을 집중 보강을 하고 11월에 예비고사를 치렀다.

힘들게 입학한 대학이었지만 학교 분위기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박정희가 1969년 3선개헌을 밀어붙일 때에도 굴욕감을 느꼈는데, 민주주의가 계속 훼손되면서 유신헌법 개정까지 이루어지자 자존심도 상하고 반감도 컸던 것이다.

3학년이던 1975년 5월 22일, 한달 전 할복 자결한 서울대 농대 김상진 열사의 장례식을 치르는 형식으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반대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제적과 구속,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긴급조치 9호가 시행된 1975년 5월13일 이후 첫 사건인 이른바 '522사건'이다. 서울대 75학번으로 입학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구경하다가 교내에 들어온 경찰에 연행돼 제적되었던 일로도 유명하다.

정 대표는 "순응할 수 없는 체제였기 때문에 학생들은 계속해서 그 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의지를 보일 수 밖에 없었고 불의한 권력이 이걸 틀어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다보니 '긴급조치'는 일상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또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라는 국가의 불법행위가 당대의 시민들, 특히 청년학생들을 불행으로 내 몰았다"면서 "길고 고단한 세월 그들이 온 몸에 긴급조치의 상흔을 새기면서 한걸음 씩 내딛은 그 길이 우리 민주주의 역사였다"고 총평했다.
 

▲ 긴급조치 위반 인원 및 재심현황 [제공-4.9통일평화재단, 2018.8]

본인이 청구하지 않아도 국가가 직접 재심을 청구하는 경우는 △동일 사건의 공범이 먼저 재심을 한 경우 별도로 재심청구를 하지 않은 나머지 공범, △긴급조치 위반으로만 처벌을 받은 사람(반공법, 폭력, 사기 등이 경합되어 있던 경우에는 배제), △공범중 이미 무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있는 경우의 공범 등이다.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재심청구를 하여 재심 단심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나면 검찰은 대부분 항소를 했지만 2013년 긴급조치가 위헌이라는 헌재의 결정이 난 이후에는 검찰이 항소를 취하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반공법이나 집회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이 경합되어 있는 경우는 검찰도 계속 항소를 하고 있기 때문에 대법원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검찰이 145명을 직권재심을 했다고 하지만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전부 구제된 것은 아니다.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전체 긴급조치 위반자 중 20~300명 가량은 아직 재심신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우에는 자력으로 재심청구 등 구제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긴급조치와 다른 법조가 경합된 경우에는 일부에 대해서만 재심청구를 할 수 도 있다. 

예를들어 과거 유서대필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강기훈씨의 경우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자살방조 혐의에 대한 것이고 함께 적용되었던 국가보안법 위반 부분은 재심청구를 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다투지도 않았다.

따라서 긴급조치와 관련해 유죄 선고를 받은 경우 다른 법률 위반 사항이 있다고 하더라도 유죄선고를 받은 긴급조치 위반에 대해서는 재심청구가 가능하다. 긴급조치가 위헌이라는 결정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긴급조치가 위헌이라는 결정이 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상당수 있을 것이고 재심절차에 대해 모르는 경우도 많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0월 검찰이 145명에 대한 직권 재심을 청구하기 전에 긴급조치가 위헌결정이 났다는 걸 알고 있는 당시 대학생이나 재야운동권, 언론인 등 웬만한 분들은 다 재심청구를 했다고 파악된다. 

재심청구를 하지 않은 현황을 조사한 2016년 결과에 따르면 재야정치인 등 지식인과 대학생이 각각 51명(12%)였고 일반인은 260명(62%)에 달했는데, 이중 상당수가 검찰의 직권재심 대상에 들어간 것 같다.

-양승태 사법부에서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서 관련자로 인정받은 다음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지급하는 보상금을 받은 경우 국가와 화해를 했다는 이유로 재심 후 무죄판결이 났더라도 형사보상,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고 한 판결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된 상태이다.

범죄행위로 인해 3년형을 선고받고 징역을 살았는데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았다면, 3년간의 억울할 옥살이에 대한 형사보상을 받을 수 있다.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올릴 수 있는 소득을 산정해 형을 산 만큼의 기간동안 곱해서 지급하는데, 지금까지 재심사건 당사자들의 형사보상금은 하루 최대금액인 25만원 가량으로 정산해서 1년에 8,000~9,000만원 정도를 받았다.

그러나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피해보상 외에 해당 사건으로 자신과 가족들이 당한 피해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한 배상소송을 할 수 있다.  가령 3년 억울한 옥살이에 대해 2억5천만원 정도의 형사소송금을 받았는데 국가배상 소송을 통해서 5억원 정도를 받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여기서는 형사보상금을 제외하도록 하기 때문에 실제 수령액은 2억5천만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기준을 똑같이 적용해서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서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살이를 한 것을 인정받아서 생활지원금(당시에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더라도 정해진 연평균 소득기준을 상회하면 생활지원금을 주지 않았다)을 받은 것을 재판상 화해로 간주해 국가배상 소송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당시 생활지원금을 받지 못하고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경우와 비교해 역차별이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국가배상금에서 형사보상금을 제하고 받게 되듯이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서 받은 보상금을 국가배상금에서 제하고 주면 될 것이지 아예 주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해서 이 문제 역시 헌법소원을 제기한 상태이다.

-양승태 사법부에서 긴급조치가 위헌 결정이 났지만 당시에는 유효한 법률이었기 때문에 그 법률을 적용한 판사와 공무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이유로 국가배상 책임이 없다는 판결에 대해

긴급조치 위헌결정이 났지만 당시에는 유효한 법률이었기 때문에 그 법률을 적용한 판사와 공무원 등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이유로 국가배상의 책임이 없으며, 다만 고문이나 가혹행위 등 명백한 불법행위의 사실을 확인해야만 배상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한데 대해서도 헌법소원을 제기한 상태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헌재에서 결정해야 하는 문제도 있지만, 지금도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국가배상소송이 제기되는 사람들이 있는 상황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과거사법을 정부에 헌납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현재 법원의 입장은 무엇인가, 소송이 진행되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법관이 판례변경을 해 주면 된다는 것이다.

지금도 진행되는 사건들이 있는데, 판례변경없이 소송이 진행된다면 양승태가 만들어 놓은 기존 판례(시효, 국가배상책임 불인정, 재판상 화해)가 굳어진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 

법원이 판례변경을 해주면 최소한 더 이상의 피해는 발생하지 않는다. 판례변경이 되면 입법부에서 대법원의 판례 변경을 근거로 피해자 구제를 위한 입법조치를 취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될 수 있다. 헌재에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은 더 이상의 피해를 막자는 취지이고, 헌재의 전향적 판결이 나면 기존 판례의 피해자들은 다시 재심을 청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헌재는 전향적인 결정을 해서 더 이상의 피해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기존 피해자들은 입법을 통한 구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현재 바람직한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폭력 가해자의 서훈 취소와 이들에 대한 구상권 청구로 국가배상금을 환수하는 방안이 제안되고 있는데 대해

원래 공무원의 불법행위로 인해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국가가 구상권을 행사하는 것이 맞다. 이는 공무원 신변보장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지금까지 과거사 재심사건에서 국가가 구상권을 행사한 선례는 없지만 '수지킴' 사건 등에서 적용 선례는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피해자 구제를 우선시하고 국가가 구상권을 행사하는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위 긴급조치 피해자와 재심현황 등 내용과 질의 응답은 홍수정 4.9통일평화재단 조사실장의 도움으로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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