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나의 세계이다 (비트겐슈타인)


 그렇게 소중했던가
 - 이성복

 세계 위에, 지붕과 풍경들 위에, 내 몸을 풀어놓고 싶구나, 나의 꿈속에서는 쥐를 쫓는 불타는 욕망과 함께. -파브로 네루다, 「고양이의 꿈」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 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 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 삶은 꿈이다.


 요즘은 새벽에 뒷산 공원에 올라간다. 운동 기구들을 사용해 한 30분 정도씩 운동을 한다. 주로 노인들이 온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가보니, 한 운동 기구 앞을 누군가가 평평하게 흙을 파 놓았다. ‘아, 누군가가 기울어진 땅을 운동하기 좋게 파놓았구나!’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지혜의 손이 있는 거야!’

 마음속으로 속으로 ‘집단 지성’에 감탄을 하며 운동을 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그 앞에서 푸념을 한다. ‘아니? 이렇게 파놓으면 어떻게 해?’ 키가 작은 할머니는 돌멩이를 집어다 발아래에 놓고 운동을 하신다.

 ‘아, 내 기준으로 보았구나! 흙을 판 사람도 남자였겠지?’

 나는 앞으로의 추이를 지켜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평평하게 깎여진 땅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집단 지성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도무지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평평하게 깎여진 땅을 다시 기울어지게 할 순 없을 것이다. 집단 지성은 더 이상 진전을 못하고 있다. 키 작은 할머니들은 돌멩이를 밟고 운동을 하고 할아버지들은 돌멩이를 치우고 운동을 한다.     

 서로의 마음속이 편치 않을 것이다. 만일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시골이었다면 어땠을까? 더불어 살며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힘이 우리보다 훨씬 강했을 것이다. ‘그 할아버지’는 기울어진 땅을 평평하게 깎기 전에 할머니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 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 했던가.’

 ‘그렇게 소중했던가’ 우리의 삶이 다 이렇지 않은가? 우리는 한 생각에 꽂히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시골에서는 함께 살며 다른 사람 입장을 헤아리는 게 삶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함께 유연하게 사고하며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 삶은 꿈이다.’

 우리의 삶도 또 다른 꿈이다. 언제나 한 생각에 빠져 있으니까. 하지만 이 한 생각이 수시로 바뀔 수 있으면 장자처럼 인간도 되고 나비도 될 텐데. 인간 세계와 동물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텐데.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될 텐데.

 그래서 우리는 ‘고양이의 꿈’이 부럽다. ‘나의 꿈속에서는 쥐를 쫓는 불타는 욕망과 함께.’

 우리 안의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 인류는 자신 안의 충동, 불타는 욕망을 키우며 살아 왔다. 원시공동체 사회에서는 불타는 욕망이 서로의 마음을 보듬으며 아름답게 타 올랐다.

 하지만 문명사회가 되며 불타는 욕망은 사그라져갔다. 대신 불타는 욕망은 다른 사람과 자연을 지배하는 욕망으로 변질되어 나타났다. 끝없는 탐욕. 문명사회의 우리의 욕망이다.    
  
 우리는 한 생각에 꽂혀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주차장에 이웃의 차가 자신의 차를 가로막았다고 이웃을 빗자루가 부러질 때까지 폭행을 하고, 술집 화장실에서 낯선 사람과 눈길 좀 마주쳤다고 쉽게 주먹을 날린다. ‘한 생각’만이 세계 위에, 지붕과 풍경들 위에, 자신의 몸을 풀어놓았다. 

 ‘세계 위에, 지붕과 풍경들 위에, 내 몸을 풀어놓고 싶구나,’

 우리는 한 생각이 아니라 ‘불타는 욕망의 몸’을 세계 위에, 지붕과 풍경들 위에, 풀어놓아야 한다. 

 우리의 깊은 욕망은 불타오르며 서로의 마음을 오가며 아름다운 문화의 꽃을 피운다. 우리는 ‘한 생각’에 꽂혀 불타는 욕망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지레 불타는 욕망은 이 세상을 다 불태워버리라고 단정한다.

 불타는 욕망으로 사는 우리 주변의 자연들을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가! 고갱이 원시의 섬, 타히티에서 본 게 바로 불타는 욕망의 눈부신 아름다움이다.

 그는 오두막 벽에 그의 필생의 작품을 그렸다. 그리곤 죽을 때 오두막을 불 태워버리라는 유언을 했다. 아내 아타는 유언대로 했다. 그는 연기가 되어 깔끔하게 원시의 세계로 흘러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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