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엽 / 미국 스프링아버 대학 정치학과 교수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이 지난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개최되었다. 존 볼튼 국가안보보좌관이 리비아 모델을 거론하고 펜스 부통령과 최선희 국장이 자극적인 발언을 주고받다가 5월 24일 트럼프 대통령이 서신으로 회담 자체를 취소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김계관의 다소 유화적인 성명과 전격적인 남북 정상의 만남 등으로 다시 협상이 본 궤도에 올라 마침내 두 정상이 세계의 주목가운데 회담을 가졌다. 

공동성명과 기자회견에서 설명한 회담의 성과에 대해, 비핵화와 평화체제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부족하고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enuclearization)가 빠진 완전한 비핵화만이 언급되었다는 점, 북한의 인권문제를 언급하거나 개선하지 않은 채 합의했다는 비판들이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의 성과와 가치를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1. 두 지도자의 만남이 가지는 역사적, 전략적 의미 

과거 북미협상의 과정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이번 정상회담이 얼마나 혁명적인 사건인지 알 수 있다. 1990년대부터 협상이 진행되어 왔고, 남북정상회담은 2000년에 열렸는데, 왜 북미 정상회담은 2018년에서야 가능했을까? 정상회담이라는 것은 정치적 외교적 의미가 막대하고, 지도자에게도 정치적 부담이 크기 때문에,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자리이다. 따라서 정상회담은 충분한 외교적 합의와 관계복원이 이뤄진 후 화룡점정의 차원에서 최후에 열리는 게 일반적 수순이다. 

게다가 적대국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차원에서는 미리 상호 신뢰를 회복하고 선의의 제스처를 주고받은 후, 국내 여론에서 수용 가능한 분위기가 형성 되었을 때 가능한 이벤트이다. 특히 상호 적대관계의 역사가 깊고, 국내정치적 비판여론이 강한 북미관계에서는 이것이 더욱 어려웠다. 

잘 알려진 대로 1994년의 제네바 합의로 북핵을 동결했지만, 북미관계에는 큰 진전이 없었다. 98년경부터 김대중-클린턴 두 대통령 사이의 공조와 페리 프로세스로 2000년 조미 공동커뮤니케에 도달하고, 조명록과 올브라이트의 상호 방문이 있은 후 클린턴이 방북을 고려했으나, 선거에서  조지 부시 공화당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이후 반발을 의식해 포기하고 말았다. 

부시 정부 초기에는 정상회담은커녕, CVID를 조건으로 북한과의 양자 대화 협상 자체도 거부했었다. 6자회담 역시 2008년 부시의 임기 말에 좌초하고 말았다. 결국, 디테일에 존재하는 악마들과 참가국의 국내정치적 변화들로 인해, 북미의 협상은 언제나 일정 수준 진행되다가 좌초되곤 했다. 

과거의 바텀 업 (bottom-up) 방식으로 북미관계를 풀려했다면, 세부적인 과정과 이슈마다 장기간의 협상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 사이에 관련국들 안에 국내정치적 변화가 일어나, 아마도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최종단계에 이르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뚫고 들어가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목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존의 외교문법이나 미국의 관료체제, 북미관계의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탑다운 (Top-down) 방식으로 접근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특성과, 핵무력 완성으로 북한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황과, 국내 권력의 안정성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에 초점을 두고 외교적 돌파구를 찾으려는 김정은의 결정, 그리고 북미 양측과의 신뢰관계에 기반한 문재인 정부의 북미 중재외교는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을 가능하게 했다. 

국가 간의 관계도 인간관계와 유사한 면이 있다. 과거 북한과 미국은 서로의 지도자를 늙다리(dotard), 리틀 로켓맨 (little rocketman) 등으로 비난한 바가 있지만, 전 세계의 시선 앞에서 공식적으로 만났을 때는 서로 존중을 보일 수밖에 없고, 한번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고 관계가 수립된 이상, 과거와 같은 원색적인 비난을 되풀이 하기는 어렵다. 

정상  간의 만남을 통해 관계를 재설정한 것 자체가 갖는 의미가 막대하다. 과거 2000년의 6.15 합의도 아주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남북의 관계 재설정과 신뢰관계 형성으로 돌파구를 가져왔고 그 후 구체적인 조치들과 협력들이 따라온 바 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을 칭찬하고 지지하는 기자회견 모습을 보면, 북미 협상의 성공이 트럼프의 정치적 입지와 확실히 연동되었음을 알 수 있고, 김정은 위원장 역시, 인민들에게 비핵화와 경제발전 집중을 천명하고, 싱가포르까지 와서 트럼프를 만난 이상, 대결이 아닌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에 자신의 정치적 명운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북미 정상회담은 양국의 협상이 최종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을 크게 높였다고 하겠다. 

2. CVID에 대한 논란 

공동성명에 CVID가 빠진 것에 많은 논란과 비판이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트럼프 정부가 정상회담 전까지 CVID를 목표로 한다고 언급했기 때문에, 기대치에 못 미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향후 비핵화 협상을 위해서도 이 개념의 역사와 문제점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CVID (“complete, irreversible and verifiable” dismantlement)의 원저자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다. 2000년 대통령에 당선된 부시는 ‘악의 축(Axis of Evil)’을 비롯해 여러 차례 북한과 김정일을 원색적으로 비난했고, 2002년 고농축우라늄 계획에 대한 의혹을 바탕으로 중유공급을 중단해 제네바 합의를 좌초시켰다. 대화를 요구하는 북한에게 CVID에 기반한 비핵화를 하지 않으면 대화하지 않겠다는 차원에서 내세운 개념이 바로 CVID였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를 미국이 북한에게 거의 ‘무조건적인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평가했는데, 전혀 현실성이 없는 흑백논리에 가까운 입장이었고, 특히 이 시기 이라크 전쟁과 대북정책을 주도한 네오콘들의 사고를 반영하는 개념이었다. 결국 북한과 협상해서 문제를 풀기 위해 나온 개념이 아닌, 비핵화의 개념을 가장 높게 규정해, 대화를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개념이었다는 점이다. 

이후 중국 정부의 중재로 2003년 3월 3자대화가 시작되었고, 6자회담이 열리게 되었으나 CVID개념으로 인해 진전이 없었고, 중국과 남한정부의 설득과 6자회담 내에서의 고립으로 CVID가 아닌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 접근법을 수용한 후 2005년 9.19 공동성명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 정확한 타이밍으로, 바로 다음날 미국 재무부의 주도로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 사건이 터지고, 협상이 중단되자, 북한은 벼랑끝 전술로 선회해 2006년 핵실험을 진행했다. 결국 북의 핵실험과 이라크전쟁의 난항, 그리고 중간선거의 패배로 인해 곤경에 처한 부시정부에서 네오콘들이 퇴출되고서야, BDA에서 동결된 자금을 돌려주었다. 

이후 CVID를 완전히 포기하고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 원칙을 수용한 후에 2007년 2.13합의가 도출되었다. 따라서 CVID개념은 이 시기 거의 폐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부시 정부조차도, 협상과정 중에 이것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정부가 이 CVID를 다시 들고 나온 것은 먼저 과거 북핵문제의 협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추측이 가능하고, 또한 존 볼튼으로 대표되는 네오콘의 영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볼튼은 과거 이라크 전쟁 결정의 주요 인사이자, 리비아 모델의 저자라고 할 수 있고, 최근 국무부 인사의 폭로에 따르면, 그가 리비아 모델을 거론한 것이 북미협상을 좌초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CVID가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번 공동성명에서 빠진 “검증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verifiable, irreversible)”이라는 개념이 비핵화 합의에 지나치게 높은, 심지어 도달하기 어려울 정도의 기준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핵무기와 우라늄 농축 시설들은, 거대한 설비가 필요하지 않고, 한 국가가 숨기려고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따라서 완전한 차원의 비핵화 검증을 추구한다면, 북한의 군사시설, 지하시설, 김정은 거처를 포함한 전 지역을 이 잡듯이 뒤지지 않는 한 안심할 수 없다. 문제는 그 어떤 주권국가도 이를 용납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이는 과거 협상의 역사와도 연결된다. 냉전이 종식된 후 1991년, 남북의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 기본합의 서명, 비핵화 선언이 이루어졌고, 1992년 아버지 부시 정부 하에서 북미 협상이 진행되면서, 미국은 이례적으로 1992년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했고, 냉전 종식과 동맹국들의 몰락으로 고립된 북한은 이미 이 시기 북미관계를 정상화해서 안보위기를 탈피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두 가지 결정적인 사건으로 이 협상은 실패하고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하는데, 첫 번째는 IAEA의 특별 사찰 요구였고, 두 번째는 1993년 팀스피리트 훈련의 재개 결정이었다. IAEA는 과거 이라크 사찰을 하면서 핵시설을 탐지하는데 실패해서 신뢰도에 타격을 입은 바 있는데, 이로 인해 북한에게 그 어떤 국가에도 적용된 바 없는 미신고지역에 대한 특별 사찰을 요구했고 여기에는 미국 강경파의 입김도 작용했으리라 추측된다. 

당연히 북은 이에 반발했고, 미국 국방부 강경파의 주도로 1993년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가 결정되면서 협상은 좌초된다. 강경파는 북한도 다른 공산국가들처럼 붕괴하리라 믿었고, 자신들이 악이라 규정한 북한과의 협상을 처음부터 바라지 않았다. 

전 주한미대사 도널드 그레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것은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아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네오콘 인사의 결정이었다고 한다. 이때 이미 북의 김용순은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하겠다고 할 정도로 간절히 북미관계 정상화를 바랐으나, 미국이 협상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자, 벼랑끝 전술로 선회하여 NPT탈퇴를 시도했고, 1994년 핵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북핵 위기는 이 단계에서 예방할 수 있었다. 

2008년 6자회담의 좌초에도 특별사찰 문제가 주 원인이었다. 당시 부시 정부 내에서 네오콘이 약화된 후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와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의 주도로 협상이 진행되어,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폭파하고 핵프로그램 정보를 제출하고, 미국이 북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고 적성국 교역법에 의거한 경제제재 일부를 해제하는 등 6자회담이 성과를 냈다. 

그런데 이 시점에 부시 정부는 갑자기 잊고 있었던 CVID로 회귀해서, “군사 시설을 포함한, 핵프로그램과 관련될 수 있는 모든 지역, 시설에  미국 사찰단이 전면적으로 접근해 사진, 영상을 촬영하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시기까지 지역에 남아있거나 반복해서 방문하고 샘플을 채취하거나 제거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북에 일방적으로 요구한다. 

이 결정에 중국, 한국, 러시아도 반발했을 뿐 아니라,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까지도 무리한 요구라며 우려를 표시했다. 핵무기 전문가인 데이비드 올브라이트는 부시 정부의 이러한 과도한 요구는 상대국의 군사 시설을 마음대로 염탐할 수 있는 면허를 달라는 것과 다름없어, 어떤 주권국가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는 미국 정부의 고위층에 의해 묵살되고 6자회담은 좌초된다. 

협상을 원하지 않는 세력이 협상을 좌초시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무리하게 요구하면 된다. 언급한 예에서 보듯, ‘검증 가능한’이라는 표현은 특별사찰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와 협상의 타결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irreversible)’이라는 표현 역시 비핵화의 기준을 극도로 높이는 개념이다. 현재의 핵무기를 포기할 뿐 아니라, 앞으로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까지 제거한다는 말인데, 이를 완벽히 이루려면, 핵무기 개발에 관여한 모든 과학기술자들(그 숫자가 만 오천 명이라는 추정이 있다)이 사라져야 하며, 핵무기 시설과 핵발전 시설도 문제가 된다. 

과거 제네바 합의에서 흑연감속로의 동결만을 위해서도 중유 공급이나 경수로 건설 같은 보상적 대안이 필요했는데, 경수로 건설은 결국 실현되지도 않았다. 미국의 강경파가 안심하려면 평화적인 핵발전  시설까지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한데, 만일 북이 거기까지 합의한다면 좋겠지만, 실제로 NPT의 기준을 봐서라도 평화적인 핵발전 권리까지 금지할 국제법적 근거를 찾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를 한다는 것은 북으로서는 핵에 의한 안전보장의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인데, 과거 평화조약이나 안전보장을 거론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CVID를 요구한 것은, 사실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결국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이라는 표현은 앞으로도 계속 문제가 될 수 있다. 과거와 같이 북미 협상이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면 꼭 미국의 강경파가 개입해서 협상을 좌초시키는 패턴이 반복되었는데, 현재의 협상에서도 비핵화에 대한 기준을 현실화 하지 않으면 이러한 비극은 반복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 부시 정부에서 중유 공급을 반대하고 북폭을 주장했으며, 트럼프 정부 하에서 리비아 모델을 거론해 북을 자극한 존 볼튼은, 단순히 개인으로 보기 어렵고, 네오콘 세력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현재 트럼프 정부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이들이 부시 정부 1기와 같이 전면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보긴 힘들지만, 상황이 악화될 경우 목소리를 높이고 다시 분위기를 주도해 협상을 좌초시킬 가능성은 앞으로도 존재한다. 

공동성명에서 CVID가 빠진 것은 북의 반발로 합의가 어려웠기 때문도 있겠고, 트럼프 정부가 협상과정 중에 기준을 보다 현실화 했을 가능성이 공존하는데, 아직까지는 완벽한 비핵화가 CVID를 포함한다는 입장이다. 결국, 앞으로의 비핵화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는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기준을 합의와 실천 가능한 수준으로 현실화 하는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기준을 높게 잡지 않고 북한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질문할 수 있다. 북이 협상 중에 선 보상을 요구하고 비핵화를 최대한 늦출 가능성도 있고, 극단적으로 말하면 북이 만일을 위해 핵탄두 몇 개를 지하에 숨겨놓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의심도 가능하다. 하지만 국가 간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북한 핵의 위협도 적대관계에서 오는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국제관계의 구성주의적 시각이 도움이 된다. 우리가 위협을 느끼는 것은 물리적 군사력뿐 아니라, 적대관계가 결합해서 온다는 주장이다. 미국이 수천 개의 핵무기가 있어도 한국이 그에 대해 위협을 느끼지는 않는 것은, 미국이 한국을 핵공격할 가능성은 무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북미가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현실적인 기준을 잡고 이에 합의한 후 관계를 개선해 나가면, 북이 핵무기를 보유하거나, 핵무기로 주변국을 위협할 이유도 사라진다. 완전한 비핵화에 반드시 성공해야겠지만, 심지어 실제 핵을 숨겨두어도 비핵화 과정이 끝나면 그 존재를 공개하거나 그것으로 위협할 명분이나 원인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것은 무용지물이 된다. 따라서 비핵화는 관계정상화와 평화체제를 통한 적대관계의 종식과 맞물려서 이해해야 할 문제이다. 

새로 알게 된 사람의 침실과 옷장까지 다 뒤져보고 의심할 게 전혀 없어야 친구가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말을 한다면 친구 관계를 맺을 의사가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북한에 존재하는 핵무기와 핵시설을 제거하는 것은 당연히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이와 동시에 중요한 것은 핵무기 개발의 원인을 제거하고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유도하고 지원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북미 관계개선을 천명한 이번 정상회담은 문제 해결의 역사적인 돌파구라는 것이다. 

3. 미군 유해발굴 및 송환, 한미군사훈련 중지와 북의 미사일 엔진시험장 폐기 약속

공동성명 4항에 포함된 한국전쟁의 미군 포로/실종자 유해 발굴 및 송환은 이번 합의에 포함된 구체적인 조치라 할 수 있고,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우선은 상대적으로 실천이 어렵지 않고, 북한의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줄 수 있는 조치이며, 특히 전사자 예우에 민감한 미국정부와 전사자 가족들에게 큰 의미가 있다. 더 나아가 한국 전쟁 종전 선언을 앞두고, 과거의 적대적 역사를 돌아보고 마감한다는 의미도 있다. 

미군 유해발굴 및 송환은 과거 미국이 적대국가와 관계 개선을 할 때, 일종의 수순이라 할 수 있는데, 좋은 예가 베트남이다. 10년 이상 진행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패배하고 철수한 후 베트남과 미국은 최악의 관계를 유지했다. 베트남이 통일된 1975년 미국은 경제제재를 확대하고 78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관계는 더 악화되었으나, 80년대 말부터 양국은 관계개선을 시도한다. 

85년과 87년 사이 양국은 B-29 폭격기 추락 장소에서 미군 유해발굴을 공동 진행하고, 이후 미국은 인도적 지원으로 답하였으며, 8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철군한다. 90년부터 양국은 관계정상화 협상을 진행해 본격적인 전쟁포로/실종자 유해발굴과 인도적 지원과 경제제재 완화를 주고받아 신뢰를 쌓았고, 마침내 95년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이러한 선례에 따르면, 유해발굴 및 송환 조치는 종전 선언과 북미관계 개선을 예고하는 매우 긍정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공동성명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중단과 북한의 탄도미사일 엔진 시험장 폐기 약속을 공개했다. 이는 매우 구체적인 조치로 향후 비핵화 협상 및 실천과정이 빨리 진행되고, 일종의 선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예고한다. 이러한 과정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현재 북미회담의 성과에 회의적인 시각도 변하게 될 것이다. 

북한의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는 트럼프의 정상회담 취소로 묻힌 바가 있는데, 미사일 엔진 시험장 폐기와 같은 조치는 북한에 대한 여론의 불신을 해소해 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미국이 느끼는 북한의 핵위협이 핵무기 자체 뿐 아니라, 본토에 도달 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에 탑재된 핵무기라는 점에서, 이 조치는 큰 의미를 가진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중지하겠다는 트럼프의 결정은 논란을 낳고 있지만, 북미협상에 막대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과거 92년에 팀스피리트 훈련이 중단되었다 93년 재개된 것이 협상의 진행과 실패에 연동되었다고 앞에서 설명했듯이, 북한에게 있어서는 수십만 병력이 동원되고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B-52 등의 전략자산이 동원되는 합동훈련이 실질적인 위협으로 작용해 왔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과거 미국 정부의 공식적 입장은, 미국은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고, 합동훈련이 남한의 방어를 위한 정당한 훈련이기에, 협상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북한이 느끼는 근본적인 안보위협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트럼프는 군사훈련을 워게임(War game)으로 지칭하며 북에 위협적(Provocative)이라고 설명했고, 비용이 막대하다고 언급함으로서 기존의 입장과 큰 차이를 보였다. 또한 “우리가 큰 도시라고 생각하는 뉴욕에는 800만 명이 사는데 서울에는 2천 800만 명이 살고 있다”고 언급하며,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면 수천만 명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물론 화염과 분노를 언급했던 것도 트럼프지만, 이제 그런 입장을 반복하기는 어렵다). 

이는 트럼프가 공직경험이 없어 기존의 외교문법에 구애받지 않고, 외교안보의 기득권층(establishment)의 시각이 아닌 상식적 시각, 혹은 일종의 무학의 통찰로 북미갈등과 한반도 현실을 파악했다고 볼 수도 있다. 동시에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와 안보적 관점이 아닌, 비즈니스적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이러한 파격적인 조치를 결정할 수 있었다고도 하겠다. 

평화네트워크의 정욱식 대표는 이제 ‘지정학적’ 관점이 아니라 ‘지경학적’ 관점으로 한반도 문제를 보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한반도 H형 경제벨트를 제안한 문재인 정부의 노선과도 일치하는 부분으로 향후 협력의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볼 수 있다.   

4. 인권문제

공동선언에 인권문제가 빠져있다거나 북의 인권개선 없이 관계개선을 추진하면 안 된다는 비판이 있다. 북한의 인권침해를 합리화 할 수는 없지만 70년간 한국전쟁과, 분단, 세계최강 대국과의 대립을 경험해온 국가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과거 인권문제를 거론하며 북한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압박을 가한 결과, 북한인권이 개선된 성과는 전무하다. 

북한 붕괴론자들의 끊임없는 주장에도, 북한은 건재하고 붕괴의 조짐 역시 전무하다. 또한 북한에 대한 미국과 서구사회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도 작용하고 있으며, 북한 인권문제를 정치화해 자극적인 방식으로 과장, 왜곡해 온 역사도 있다. 이미 일부 유명 탈북자들의 증언이 거짓으로 확인된 경우도 있었다. 

북한인권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북한인권 개선을 협상의 전제조건으로 놓는 것은, 북한이라는 사회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거나, 아니면 북에 대한 미움으로 협상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가능하다. 

미국이 중국과 관계개선을 할 때, 독재자인 마오쩌둥이 지도자였고, 그는 핵무기를 개발했으며,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을 일으켜 죽은 사람이 수천만 명이었다. 하지만, 북미관계가 개선된 이후 중국은 공산당 일당 독재국가일지언정 인권과 생활수준에 혁명적인 개선이 일어났다. 베트남도 마찬가지이다.

북미가 비핵화와 평화체제 수립에 성공한 후, 북한의 고립과 안보위협이 해결되어 국제사회에 편입되고 경제개혁이 이루어진다면, 인권수준과 생활수준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될 것이다. 

5. 문재인 정부의 역할 

굳이 아쉬운 점을 찾자면, 회담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문재인 대통령이 함께하는 3자회담까지 이루어지고, 종전선언이 이루어졌다면 더욱 좋았겠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번 회담의 설계자, 혹은 적어도 촉진자가 문재인 대통령이었다는 것은 분명한데, 평창올림픽부터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협상의 분위기를 만들어 온 것이 그러하고, 트럼프가 북미 정상회담을 결정한 것도 3월 8일 정의용 실장의 브리핑과 기자회견에 대한 반응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북미회담을 서면으로 취소한 위기를 돌파하는데도 문재인 대통령의 전격적인 2차 남북 정상회담의 역할이 컸다. 북미회담조차 하나의 이벤트로 흥행시키고, 그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트럼프의 특성상, 문재인 대통령의 등장이 어려웠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거나 향후 협상의 과정에서도 난제들이 남아있고, 문재인 정부가 수행해야 할 중재자의 역할은 막대하다.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현실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북미양측의 합의와 실천을 촉진하고, 이를 통해 부정적인 여론들을 해소하며, 결국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불가역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북핵문제와 북미관계의 역사를 공부할수록 느끼는 것은 남한 정부의 역할과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역량이 상당하고,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라는 명분을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 미국 내에서도 다양한 세력과 의견이 존재하고, 모든 사안에 명확한 원칙이 수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사안에 있어 특정한 국내적, 국제적 로비가 정책을 좌우할 수 있는 이유인데, 잘 알려진 예가 미국 내 유대계 로비가 미국의 중동정책을 좌우하는 것이며, 최근 트럼프 정부가 오바마의 이란합의를 깨고 나온 데에 이스라엘의 로비가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남한 정부가 미국의 정책을 마음대로 좌우할 수는 없어도, 중대한 시점이나 힘의 균형이 이루어졌을 때, 특정한 방향에 힘을 실어주고 의견을 기울게 할 수 있으며, 집요한 노력으로 설득도 가능하다. 과거 제네바 합의에 앞서 국내 보수여론을 의식한 김영삼 정부가 북미합의에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했고, 반대로 김대중 정부의 등장이 페리프로세스와 북미 공동커뮤니케를 가능케 했다. 

노무현 정부는 중국과 더불어 6자회담의 성과에 촉진자로 작용했다. 반대로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북한 붕괴론과 대북 적대시 정책으로 대화 채널마저 상실하고, 손을 놓고 있었으며, 최근 정세현 장관의 증언에 따르면, 오바마 정부에서 2009년 비핵화와 종전, 평화체제를 교환하자는 제의마저 이명박 정부가 거부했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는 남한의 외교력을 역사상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한반도의 운명을 스스로 주도해 나가고 있다. 북미 정상회담으로 확고하게 열린,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이 역사적 기회를, 치밀한 외교력으로 주도해 나갈 것을 기대한다.  

 

서울대 독어교육과 학사, 서울대 국제대학원 석사
조지워싱턴대학 국제관계 석사, 조지아 대학 국제관계 박사
현 스프링아버대학교 정치학과 조교수
박사학위 논문: “빌 클린턴, 조지 부시정부 시기, 미국의 대북외교정책 분석”
저서: Politics in North and South Korea (2016,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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