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규 (비전향장기수, 전 통일광장 대표)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임방규(86) 선생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2011년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필자는 2010년 6월부터 2011년 1월까지 29회에 걸쳐 자서전 ‘광주형무소 이가사’를 연재했으며, 곧바로 2011년 1월부터 그해 3월까지 8회에 걸쳐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연재해 오다 중단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연재는 8회에 이어 9회부터 시작됩니다. 필자는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될 때 남쪽에 남는 길을 선택했으며, 그 뒤 빨치산 격전지 현장을 답사하며 사라져가는 빨치산 역사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습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아래와 같은 순서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 주

<연재 순서>

충남 빨치산 전적지 답사
전북 북부지역 전적지 답사
지리산 전적지 답사(남원)
김제 임실 전적지 답사
부안 선운사 정읍 전적지 답사
고창 정읍 전적지 답사
전남 전적지 답사 (1)
전남 전적지 답사 (2) (유치지구, 백운산)
전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전적지 답사(1)
경남 전적지 답사(2)
경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동부지역 및 경북 전적지 답사

 

 부산에서 동지들을 만나다

 2011년 10월 29일 나, 작가, 김용심, 정부영, 김영진, 김은정 5명이 마장동에서 저녁을 먹고 9시 20분에 출발했다. 현희가 부영이에게 자기 집에서 가지산까지 차로 1시간 거리니까 집에 오라고 했단다. 부산까지는 밤이라 빨리 달려도 다섯 시간 가까이 걸린다고 운전대를 잡은 부영이가 서둘렀다. 휴게소에 잠깐 들렀다가 속도를 냈다. 새벽 1시 넘어서 현희가 사는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댔다. 현희가 나왔다. 용심 외에는 다 아는 사이라 끌어안고 좋아했다. 현희가 잠자리를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발만 씻고 바로 잤다.

 다음날 8시에 일어나서 정성껏 차린 밥상을 받자 구연철 동지가 왔다. 모두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침을 먹고 봉고차에 다 타고 떠나는데 희숙이가 왔다. 함께 가면 좋을 것을 집안 일 때문에 못 가서 아쉽다고 봉투를 꺼내 주었다. 부영이가 고맙게 받았다. 텔레비전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하기에 걱정했는데 구름이 끼여 있을 뿐 날씨가 좋았다.

 경북 빨치산 근거지 가지산

 부산 시내를 벗어나자 들에 가을걷이가 한창이고 산은 온통 단풍이 들어서 장관이었다. 골짜기로 능선을 감돌아 산중턱 휴게소에 차를 댔다. 소풍 나온 차가 즐비하고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막걸리 한 병에 사과 몇 알을 사서 차에 싣고 떠났다. 산굽이를 돌 때마다 다른 가을 경치에 젖어있는데 높은 쟤를 넘는 듯 안개가 덮어버렸다. 차가 내리막길로 천천히 내려가자 안개가 걷히고 첩첩한 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름다웠다. 나무 한 그루를 뜯어보면 단풍든 잎도 그렇고 나무 모양새도 별것이 아닌데 한 눈에 보는 가을산은 일품이었다.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앞산 골짜기, 이 산, 저 산을 두루 바라보았다. “참 좋구나. 아름답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서 우리는 곧 차를 타고 내려갔다. 큰 길에서 좌로 굽은 사이 길로 접어 들어갔다. 얼마 동안 달리자 찻길이 막혀 버렸다. 공터에 차를 세웠다. 여기가 가지산이란다. 구연철 동지가 지팡이를 짚고 등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꽤나 가파른 길이었다. 상봉이 보이는 곳에서 구연철 동지는 술 한 잔을 따랐다. 가지산은 경북도당위원장 박종근 동지와 여러 동지들이 전사한 곳이다. 경건하게 묵념을 올렸다. 음복을 하고 구연철 동지가 설명했다. 

 “1947년부터 우리가 비합으로 들어가자 경북 동무들은 야산대를 조직하여 가지산에 근거지를 두고 경북일대에서 정치 활동을 했습니다. 전쟁시에도 가지산, 신불산은 미해방구로 적구였어요. 1950년 7월인가 확실치 않습니다만 박종근 동지가 경북도당 위원장으로 오면서부터 경북 동지들은 본격적으로 유격전을 하게 됩니다. 내가 경북에 대해서는 들어서 알 뿐 자세히 모릅니다. 다만 경남 동부처럼 수없이 소규모 전투를 했구요. 제2전선에서 정치군사적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경북도당위원장 박종근 동지

 “박종근 동지는 애석하게도 1951년 말인가, 52년 초에 이 가지산에서 전사했습니다. 박종근 동지의 경력은 잘 모릅니다. 1946년 10월 대구인민항쟁을 지도한 한 분이고 전평에 있다가 49년에 월북했으며 30세 전후의 젊은 나이에 도당위원장으로 격전 끝에 전사하셨다는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당중앙상임위원회 94호 결정에 의하여 경남동부지역과 경북이 합해서 4지구로 조직 개편이 있었습니다. 박종근 동지가 전사한 후 경북도당부위원장 이영섭 동지가 4지구당 위원장으로 이 지역 당과 유격부대를 지도했습니다.”

 말을 마친 구연철 동지는 지팡이를 짚고 힘들게 일어났다. 가지산 상봉을 바라보았다. 

 ‘박종근 동지는 어느 곳에 묻혀 있는가?’ 박종근 동지가 열렬히 사랑했던 아내, 남편을 불같이 사랑했던 여인, 이숙의 동지는 결혼생활 2년이 안 되었지만 남편을 가슴에 품고 딸을 고이 키우면서 지조 있게 살다가 갔다. 그녀는 글을 남겼다. 딸 박소은은 어머니요 혁명가의 아내가 남긴 유고를 <이 여자 이숙의>라는 책으로 묶어서 세상에 내놓았다. 감동적인 책이다. 

 ‘박소은은 이국땅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며 조국통일을 열망하면서 뛰고 올곧게 살아가고 있겠지?’

 좀 더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 이 골짜기 저 골짜기 돌아다니며 동지들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을.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동지들이 오르내린 능선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국방군이 운문사를 불지르다

 일정이 많기 때문에 서둘렀다. 재를 넘어서 운문사로 가는 길에 하도 단풍이 좋아서 차를 세워놓고 감상하는데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참 아름답지요.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네요.” 하지 않는가. 여인의 마음 또한 고와보였다. 구연철 동지는 차를 타고 내려가면서 “여기가 어름골입니다. 저기에 굴이 있는데 여름에 굴 안에 들어가도 소름이 돋고 덜덜 떱니다. 유명한 양산 얼음굴입니다. 허준 선생이 해부학을 배운 곳으로도 알려진 곳입니다. 이 고장에서 나는 사과 맛이 좋습니다. 어름골 사과라고 하면 알아주지요.” 

 이 고을 자랑을 하는데 차가 어느덧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사과밭 옆에 멎었다. 사과를 쌓아 놓고 팔고 있는 할머니가 무턱대고 사과를 쪼개 주면서 먹어보란다. 사과 맛이 좋았다. 이쯤 되면 사과를 안사고는 못 가지. 현희가 사과 한 상자를 샀다. 운문사는 전에 와본 적이 있지만 입구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좋고 토요일이라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雲內僧伽大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갔다. 가지가 땅으로 굽은 누가보아도 놀랄 만한 소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수명이 500년 쯤 된다는 설명문이 붙어 있었다. 우리는 사람 왕래가 적은 절 모퉁이에 가서 의자에 앉았다. 구연철 동지가 입을 열었다.

 “이 절은 6.25 전쟁 때 국방군이 불질러 버렸는데 타버린 절터에 다시 지은 집들입니다. 1951년 여름이지요. 국방군 1개 대대가 절에 주둔하면서 날마다 공세를 취했습니다. 쫓겨 다니던 동무들은 역으로 공격했어요. 무력이나 수적인 면에서 비교가 안 되는 우리는 밤으로만 연발총을 가지고 소부대가 기습했습니다. 밤마다 두 번, 세 번씩 기습했습니다. 우리야 교대를 하지만 적들은 전원이 당하지 않습니까. 잠인들 제대로 자겠어요. 자다가도 깰 텐데,  그러다가 언제 대부대가 덮칠지도 모르지 공포에 떨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룻밤도 거르지 않고 10일이 넘게 신경전을 했습니다. 적의 공세도 시들해지고 견디다 못한 적들은 어느 날 두시 경에 절에 불을 지르고 철수했습니다. 그를 예견한 동무들은 산기슭에 매복하고 있다가 후비를 때렸습니다. 군용차량 석 대를 잡았는데 주로 군용품을 실었더군요. 동무들은 필요한 물품만 골라서 한 짐씩 지고 떠났습니다. 나머지와 차량은 소각하고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매표소 앞 담 끝에 총탄 자국이 많은 큰 돌비석이 서 있었는데 없애버렸네요.”

 구연철 동지가 말을 마치자 모두 일어났다. 운문사는 여승만 있는 절로 터가 넓어서 다 구경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몇 군데 더 들러야 할 우리는 곧 차를 타고 포항으로 떠났다. 

 포항비행장을 습격하여 미수송기 세대를 소각하다

 꽤 먼 거리였다. 포항비행장에 갔다. 건물은 새로 지었는데 옛 장소라고 했다. 구연철 동지가 설명을 했다. 

 “1950년 8월경에 남도부 부대가 이 비행장을 3일간 해방시켰다고 합니다. 미군 수송기 세 대를 소각하구요. 야적해 있던 군수품 중에서 전투에 필요한 것은 산으로 후송하고 나머지는 인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없지만 그 당시에는 이 부근에 농가가 많이 있었답니다. 농민들을 모아놓고 선전사업도 하고 만세를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대는 비행장에서 일월산으로 이동했구요. 형제봉에서 전투를 치열하게 했답니다. 남도부 부대는 형제봉 전투 후에 신불산으로 들어가서 거점을 구축하고 본격적으로 유격전을 전개합니다.”

 구연철 동지가 말을 마치고 우리는 비행장을 돌아 나왔다. 포항까지 왔으니까 포항 명물인 가자미 물회를 먹자고 부영이는 이름난 식당을 물어서 끌고 갔다. 1인당 12,000원이라 밥값이 비싼데 그냥 먹잔다. 물회와 찬이 푸짐했다. 80평생에 처음 먹어보는 가자미 물회라 기억에 남을 것이다. 계산대에 가자 어느새 용심이가 밥값을 냈단다. 요즈음 글쓰는 사람들이 어려운데 부담이 큰 것 같아서 짠했다. 

 형상강 철교 폭파

 우리는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서 형상강 구 철교가 있던 곳을 찾아갔다. 교각 밑 부분만 물 위에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구연철 동지가 설명했다.

 “형상강 철교를 폭파하기 위해서 1개 소대(많을 때 7명)가 일주일 동안 정찰을 했습니다. 철교 양 끝에 미군 고정 보초가 서 있고 이동 보초가 다리 위 철길을 오고 가면서 감시하고 밤에는 서치라이트로 야간 감시를 했대요. 그래도 형상강을 이용하면 철교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정찰 보고에 남도부 사령관은 작전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고요. 동무들을 모아놓고 철교 파괴투쟁의 의의를 설명하고 교각에 티엔티를 묶어야 하는데 이 공작에 자원하는 동무는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여러 동무들이 자원했어요. 그 중에서 폭파 조원을 선발했습니다. 거점에서 1개 부대 70여 명이 출발했습니다. 부대의 퇴로를 보장하기 위해서 요지에 소부대를 남겨 놓구요. 폭파조를 엄호하기 위하여 나머지 동무들은 철교 가까이에 쥐도 새도 모르게 접근하여 엄폐하고 있었습니다. 남도부 사령관이 직접 인솔한 폭파조는 다이나마이트를 짊어지고  한참 떨어진 상류에서 물 속으로 내려왔습니다. 무사히 철다리 밑에 이르러서 교각에 폭약을 묶어놓고 심지에 불을 붙여서 폭파했습니다. 교각 두 개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며칠 동안 기차가 다니지 못했답니다. 전 전선에서 전투가 치열했기 때문에 군수품 보급이 절실한 때 중요 보급로인 형상강 철교가 파괴됨으로써 보급이 끊긴 미 침략군은 작전 수행에 타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적에게 물적 손실을 주었으며 적 후방을 교란시키고 중요 수송로를 차단시킨 대단한 전과를 올린 것이지요. 우리는 못 보았습니다만 워싱턴 포스트지에 형상강 철교가 빨치산에 의해 폭파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고 하대요.”

 구연철 동지는 토막난 교각을 바라보았다. 형상강 강물은 교각에 부딪혀서 파도를 일으키며 흘러가고 있었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르는 오늘의 반동파와 견주어 보았다. 교각 위의 다리, 우리 땅인데……. 우리를 감시하는 미군이 철교 위에 있고 엄청난 폭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다리. 총소리가 볶아댈 때 물에서 나온 동무들이 엄호조 동무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곳을 떠났다. 날은 이미 어두워가고 있었다.

 호계역을 습격, 쌓아놓은 군수물자에 불을 당겼다

 호계역에 갔다. 구연철 동지는,

 “남도부 부대가 1951년 초에 이곳에 와서 호계역을 소각했습니다. 두 번째로 51년 말에 소부대가 급습해서 이 부근에 노적가리처럼 쌓아놓은 군수물자에 불을 지르고 신속하게 빠졌습니다. 치고 빠지는 데 10분도 안 걸렸을 것입니다. 총탄과 포탄이 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폭탄 터지는 소리가 대단했어요. 위험 지대를 벗어나서 하늘 높이 치솟는 화광을 보며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1952년 봄에 나까지 네 동무가 양산에 사업차 갔다가 3소지구당이 있던 토함산 쪽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이 호계마을 부근입니다. 경주 울산간 도로를 넘으려는데 헤드라이트를 켜고 차가 오데요. 연발총이 있겠다. 길가 논두렁에 엎드려서 갈겼습니다. 총알이 튀어서 보니까 장갑차예요. 우리는 냅다 뛰었습니다. 중기가 불을 뿜었지만 다 무사했어요. 날이 새면 적의 공격이 있을 것 같아서 적들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야산 끝머리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아니다 다를까 다음날 10시경에 군인 일개부대가 와서 산으로 올라가데요. 주변산을 뒤지고 다니던 국방군이 4시쯤 내려왔는데 한 개 소대가 가지 않고 우리가 다니던 산모퉁이에 자리를 잡데요. 우리는 한밤중에  발소리를 죽여가며 접근했습니다. 담뱃불이 보이고 말소리가 들려요. 매복치고는 허술했습니다. 우리는 10여 미터 거리에서 일제 사격을 했습니다. 군인들은 놀란 산짐승처럼 다 팽개치고 튀었습니다. 전투 경험이 있는 사람은 총성을 듣고 무기 종류와 인원을 파악할 수 있지 않아요? 지체할 수 없는 우리는 배낭에 총탄과 총을 욕심껏 짊어지고 산을 탔습니다. 희생은 없고 그것도 네 명이 거둔 큰 전과지요. 기쁨에 차 있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부용산에 들르지 못했는데 53년 말 아니면 54년 초로 기억됩니다. 정전 후라 전선에 있던 국방군이 유격지구에 내려와서 진을 치고 있을 때입니다. 밤에도 철수하지 않고 골짜기마다 빗질하듯 뒤졌습니다. 지구당과의 선이 2,3개월간 끊겼습니다. 보고할 내용도 있고, 그때까지 3소지구당에서 살아남은 세 동무가 부용산에서 가지산으로 가다가 태화강 상류에서 적의 매복에 걸려들었습니다. 연락원 동무는 총에 맞고 제주도 출신 임영길 동무와 나는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우리는 이리저리 3일 밤을 걸어서 가지산에 갔습니다. 군인들이 깔려 있데요. 낮에는 가랑잎을 덮고 자고 밤에만 활동했는데 능선을 넘나들다가 여러 번 사격을 받았어요. 임영길 동무는 전사하고 총상을 입은 나만 살아서 지휘부 동지들을 만났습니다. 살아왔다고 끌어안고 반가워하데요.”

 우리는 곧 떠났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현희 집으로 갔다. 

 구연철 동지의 이력

 김영진은 인터뷰하기 위해서 비디오카메라 장치를 했다. 정부영은,

 “선생님의 이력을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고 아름다운 추억담을 들려주시지요.”

 “나야 내놓을 게 있어야지. 나는 경남 양산군 하북면 초선리 통도사 입구에서 1931년 11월 27일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일찍이 일본에 탄광 광부로 가셨구요. 시골에서 농토도 없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소학교 2학년에 다닐 때인데 아버지가 가족 모두 일본에 오라고 하셨어요. 하잘 것 없는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여섯 식구가 고향을 떠났습니다. 옷가지 등 올망졸망한 보따리를 들고 어쩌다 있는 버스로 부산에 갔지요. 부산에서 부관 연락선을 타고 일본에 갔습니다. 일본 여자들이 밀감 따는 것을 보았으니까 아마 가을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가사키로 가는 열차 안에서 집에서 만든 찰떡하고 개엿을 꺼내어 먹으려는데 할머님이 주변에 있는 분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시데요. 쑥스러웠지만 떡과 엿을 들고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일본 여자에게 권했어요. 불쾌한 안색으로 뿌리쳐서 떡과 엿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모욕을 당했어요. 그때부터 왜놈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았어요. 마중 나오신 아버님을 따라서 하시마라고 하는 섬에 갔습니다. 탄광촌인데 경사진 곳에 층층이 지어놓은 작은 사택에 들어갔습니다. 가족이 있는 광부는 회사에서 사택을 주고 혼자 지내는 광부는 함바에서 합숙을 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 조선 사람, 중국 사람들이 징용으로 끌려왔는데 위생상태가 말이 아니었어요. 석탄 가루는 날아다니지, 아파트에서 일 못 나가는 광부에게 매질하는 것을 여러 번 봤습니다. 나는 탄광촌 소학교에 다녔어요. 공부를 반에서 제일 잘 했는데 1등을 한 번도 안주데요. 고등과에 다닐 때 일입니다. 내가 혼자 있는데 와다나베 선생이 네 조국이 어디냐고 묻더군요. 나는 배운 대로 (다이닛봉 데이고구데스) 대일본제국이라고 하자 꿀밤을 주면서 네 조국은 조선이라고 하데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루는 방공호에 있다가 새벽에 집에 왔는데 창문에 불빛이 번쩍하더니 광장한 폭음이 들렸습니다. 하시마에서 나가사키까지는 70리 나 되는데 원자폭탄이 터질 때 불빛도 보고 폭음도 들었어요. 3일 후에 농촌으로 피난가기 위해서 통통배로 나가사키에 갔는데 그 큰 도시가 집 한 채 없이 날아가 버렸어요. 기차 레일도 녹아버리고 해골만 흩어져 있을 뿐 미쓰비시 조선소도 흔적 없이 사라졌더군요. 참 참혹했습니다. 해방 후에 고국으로 돌아왔구요. 서울 대신중학교에 다니면서 학비 때문에 인쇄소에 취직했습니다. 김두영 선배가 맑스 레닌주의에 관한 서적을 보내주었습니다. 인쇄노동자 전국평의회에 참가하여 활동했어요. 동국대학에 입학하구요. 48년 5.10 단선 반대투쟁이 치열했습니다. 화신백화점 옥상에 올라가서 삐라도 뿌리고 연판장 투쟁을 했구요. 1949년 19세 때 서북청년에게 체포되어 서빙고에서 20여 일 동안 억수로 고문을 당했습니다. 29일 구류를 살고 나왔는데 학교에서 제적을 했어요. 1950년 3월까지는 서울에서 버티었는데 5.30 선거 전에 예비 검속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을 빠져나와 부산으로 왔습니다. 직장을 구하러 다니는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미군 트럭에 헌병이 타고 다니면서 청년들을 보는 대로 잡아다가 전선으로 보냈습니다. ‘놈들에게 끌려가서 개같이 죽어야 하는가?’ 혼자 고민하다가 설두옥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우리는 논의한 끝에 입산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1950년 7월에 경남 동부 지구당 근거지 신불산에 입산했습니다. 사상 검토도 받구요. 당학교에서 3개월 동안 맑스레닌주의, 변증법적 유물론, 잉여가치론, 제국주의 패망론을 체계적으로 배웠습니다. 대학 하나를 나오는 엄청난 기간이었고 내 생애에 가장 행복했던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양산군당 조직부에 배치되었습니다. 53년 정전 후 우리당 상임위원회 111호 결정에 의하여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금정산에 있다가 부산 시내에 방 한 칸을 얻어서 아지트로 사용했어요. 도민증을 만들려고 사진관에 가서 증명사진을 찍고 일주일 후에 사진을 찾으러 갔다가 잡혔습니다. 사진사가 내 사진이 잘 빠져서 진열장에 확대한 사진을 내다 놓았답니다. 사찰계 형사가 지나가다가 보았대요. 어처구니없이 잡혔습니다. 그게 1954년 4월이에요. 징역 20년을 살고 나와서 아내와 두 아이들을 두고 여직까지 살고 있네요. 나 같은 사람에게 이 사회는 큰 감옥입니다. 한 일 없이 나이만 먹어버렸어요. 오직 조국과 인민을 향한 한마음으로 가신 님들을 가슴에 품고 헤쳐 왔습니다.”

 구연철 동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 모두는 6시에 일어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어갔다. 

 부산시내 교란작전

 다음 날 6시 전에 일어났는데 현희는 어느새 죽을 쑤어 놓았다. 새벽에 움직이기가 힘드실까봐 죽을 마련했단다. 흐뭇했다. 우리는 예정대로 6시 30분에 현희 집을 나섰다. 부두 정문 옆에 차를 세웠다. 구연철 동지는,

 “여기가 부산 제5부두입니다. 전쟁 시기에 이곳에서 연안부두까지 미군이 군수품을 배로 싣고 와서 쌓아놓았어요. 철길이 있었구요. 저 산 밑에 경남도청이 있었구, 정부기관도 있었습니다. 금정산에서 능선을 타고 몇 시간 걸으면 구덕산에 옵니다. 국방군으로 변장한 동무들이 2,3명씩 구덕산 줄기로 내려와서 연안부두까지 서너 군데를 때리고 사라지면 놈들은 밤새 총을 쏘아대고 싸이렌이 울리지, 부산 시내가 아수라장이 되어버립니다. 마대의 조명등을 쏘아버리면 몇 시간 동안 그 일대의 땅이 꺼져버린 듯 깜깜하구요. 시내 깊숙이 침투할 때는 인원이 많은 것보다 2,3명이 좋습니다. 벼락같이 치고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소조가 50년 말에서 51년 중반까지 이곳에 여러 번 드나들었네요. 금정산으로 갑시다.”

 1954년까지 빨치산이 있었던 금정산

 차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달렸다. 금정산 기슭에 이르자 운전하던 정부영이,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건물이 부산대학입니다. 학생운동 할 때 이 금정산에서 회의하고 술 마시고 내 집처럼 드나들었지요.”

 옛 추억이 떠오르는 듯 한마디 했다. 산길은 경사가 급한 것은 아닌데 급커브를 몇 번인가 꺾어서 올라갔다. 산성 옆에 차를 세워놓고 성에 올라갔다. 구연철 동지가 주위를 돌아보며 설명을 했다.

 “지금은 숲이 가려서 부산 시내가 안보이네요. 정상 밑에 가면 우물이 있는데 몽고군이 쳐들어와서 판 우물이고, 그 우물로 인해서 이 산을 금정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답니다. 저 산이 철마산인데 금정산도 그렇지만 꽤 큰 산입니다. 이 일대에서 동래군당이 활동했어요. 수시로 부산시내에 드나 들었구요.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미군 55 기지창이 있었는데 남도부 부대가 날려 버렸구요. 당시에는 빨치산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적들에게 두려움을 주었고 후방을 교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박정배 동지가 동래군당 위원장으로 계셨는데 역량있는 당 일꾼으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신불산에서 부산 시내에 들어가려면 천마산과 금정산을 경유해야 합니다. 여러 번 왔지요. 내가 신불산에서 1954년 초에 부산시내에 들어가기 위하여 이 금정산에 한 달 넘게 있었어요.”

 요양원에 있는 혁명가의 아내 하태영 동지를 방문하다 

▲ 요양원에 있는 하태영 동지를 방문하다. [사진제공-임방규]

부산과 붙어 있는 금정산에 54년까지 동지들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차는 재를 넘어서 하태영(현희 어머니) 동지가 있는 안평요양원으로 갔다. 손수레에 실려 나온 하태영 동지는 모두가 인사를 하자 방긋이 웃었다.

 “임방규 선생님입니다. 기억나세요?”

 딸의 질문에,

 “이름은 기억난다.”

 “2005년에 평양에 같이 갔는데요.”

 “그랬어요.”

 노안에 미소가 어려왔다. 

 “대동강에서 뱃놀이 할 때 노래를 부르셨지요. 이복순 동지와 합창을 했어요. 노래를 잘 부르시던데요.”

 “내가 노래를 잘 불렀어요.”

 “엄마 나하고 노래 부르자.”

 딸이 선창하자 따라서 함께 불렀다. 가사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곡도 틀리지 않았다. 

 “오늘은 상태가 좋으시네요.”

 “어떤 때는 정신이 말짱합니다.”

 “엄마, 젊은이들은 운동권 일꾼들인데 엄마 뵈러 왔어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러 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혁명가의 아내요, 남편을 따라서 전선에 뛰어들었고 감옥살이를 한 하태영 동지는 치매로 요양소에 있으면서도 고고한 풍모를 잃지 않고 있었다. 갈 길이 바쁜 우리라 아쉬움을 뒤로하고 곧 요양원을 떠났다. 아무 곳에서나 아침을 먹으면 되는 것을 여성은 다른가보다. 맛있는 식당을 찾아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들어갔다. 현희가 대접하는 곰탕으로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떠났다. 신불산으로 가는 도중에 박판수 동지의 묘가 있기 때문에 잠깐 들르기로 했다. 꽃과 술 한 병을 사들고 묘를 찾았다.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묘 앞 돌 꽃병에 붉은 꽃을 꽂고 먼저 현희가 술잔을 따랐다. 모두가 경건하게 묵념을 올렸다. 혁명 선배가 있었기에 우리가 있고 또 우리 후예들이 있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자기 시대에 일정한 역할을 하고 먼저 가신 선배들을 생각하며 내려왔다. 

 미군기가 미군을 폭격한 배내골

 차는 산을 넘고 넘어서 배내골로 들어갔다. 구연철 동지가 차를 세웠다. 오른쪽 내를 가리키며, 

 “의무과장(인민군 의무군관 중위)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돌다리를 건너다가 불어난 물에 휩쓸려서 희생된 곳이에요. 동지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옛일이 떠오르는 듯 노안에 아픔이 스쳐갔다. 차는 양산군 하북면 심평 소학교 이천 분교 앞에 멎었다. 

 “1950년 말에 군용트럭에 미군을 싣고 십수 대가 배내골로 들어왔습니다. 이 학교 운동장에 즐비하게 대형 텐트를 치고 사방에 붉은 깃발을 꽂아 놓았어요. 1개 대대병력이 아닌가 싶데요. 산에서 관찰하고 있던 우리는 공세를 취하기 위해서 미군이 들어온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에 미군 제트기(쌕쌕기) 세 대가 와서 폭탄을 퍼부었습니다. 기총 사격을 하구요. 미군은 박살이 났습니다. 산 자들은 왔던 길로 들고 뛰고요. 군수물자가 타는 것인지 검은 연기가 골짜기 위로 꾸역꾸역 솟아오를 뿐 비행기도 안 오고 조용하기에 오후 2시경에 동무들이 전방을 살피며 내려갔습니다. 미군 시체가 널려 있데요. 우리는 타지 않은 군수품을 산으로 져 날랐습니다. 해방구라 해질 무렵까지 운반했습니다. 식량 통조림, 의복, 총, 총탄, 다이나마이트 등 엄청난 군수물자를 총 한 발 쏘지 않고 획득했습니다.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동무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이 깊도록 노래하고 춤추고 오락회를 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군이 왜 우리의 해방구 배내골로 들어왔는가, 사방에 붉은 기를 꽂아 놓았는가, 이해가 안 갑니다. 다만 미 공병대대가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닌지 붉은 기는 공병대를 표시하는 깃발이 아닌지 나 혼자 추측할 따름입니다. 아무튼 그 날 우리는 횡재를 했어요. 여기서 노획한 다이나마이트를 가지고 형상강 철교를 폭파했습니다.”

 구연철 동지는 말을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가 몇 분 달렸는데 또 세웠다. 

 4지구당 위원장 이영섭 동지가 돌아가신 곳

 “여기는 이영섭 동지가 돌아가신 곳입니다. 이영섭 동지는 경북도당 부위원장으로 내려오셨고 지구당 개편 이후에 4지구당 위원장으로 경북과 경남 동부를 지도하신 당 간부입니다. 1953년 12월 어느 날에 이영섭 위원장 동지, 기호과장 장혁 동지, 나, 남도부 사령관과 부관 등 지도부가 내를 건너다가 적의 매복에 걸렸어요. 애석하게도 적탄이 이영섭 동지의 복부를 뚫고 나갔어요.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서 부축했습니다. 거구거든요. 가까스로 이곳까지 왔습니다. 이영섭 동지는 동지의 무릎을 베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땅을 깊이 파고 동지의 시신과 함께 4지구 당 문건 전부를 독안에 넣고 뚜껑을 덮어서 묻었습니다. 훗날 찾기 위해서 주위 지형을 머릿속에 각인시켜 놓았는데 못 찾았습니다. 세 번 와서 찾았으나 못 찾고 말았습니다.”

 몹시 아쉬워했다. 

 경남 동부지구사령부가 있었던 신불산

▲ 구연철 선생이 신불산에서 경남 동부지역 동지들의 활동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임방규]

 우리를 실은 차가 빨치산 사령부 트를 찾아가는데 신불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차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갈대 축제 기간이라 차량 통행을 막고 있었다. 취재팀이라고 하자 그제야 통과시켰다. 신불산으로 가는 차도는 포장이 되어 있으나 꽤 가파른 길이었다. 정부영이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고개 위에서 우리는 내리고 부영은 차를 주차시키기 위해 석남사에 내려갔다. 재 위에는 청년 한 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원지역 통일 일꾼들이 구연철 동지와 산행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우리와 겹쳐서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단다. 다른 분들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에 능선 위 석굴을 구경하러 올라갔다고 했다. 

우리는 천천히 팔각정을 향해서 행군했다. 능선을 따라 나 있는 길은 차 한 대가 다닐 만한 폭에 조금 오를 뿐 평평해서 걷기에 수월했다. 6년 전에는 파래소 위 가파른 산길로 힘겹게 올라왔다. 팔각정 옆에는 ‘공비 제2지휘부가 있던 곳’ 이라고 쓴 비석이 서 있었다. 전에 왔을 때는 ‘공비 신출귀몰하던 홍길동 부대가 있었던 곳’이라고 쓴 비석이 있었는데 바꿔놓았다. 왜 바꿨을까? 전북 회문산에 저들이 도당 트라고 만들어놓은 트 안에 들어가면 후방부, 병기과, 의무과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조잡하나마 놓여 있고 사령관실에는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금년에 가보니까 다 없애버리고 사진 몇 장에 왜곡된 저희들 입맛에 맞는 설명문이 붙어 있었다. 빨치산 투쟁을 빈약하고 하잘 것 없는 것으로 인식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바꿔놓은 것 같다. 창원 일꾼들이 도착하자 구연철 동지가 설명을 했다. 

 “오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서 잘 안 보입니다만 여기서 둘러보면 사방이 산이고 산만 보입니다. 이곳만 장악하면 시야에 들어오는 일대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길이 몇 군데 나 있습니다만 전에는 원동에서 넘어오는 길하고 석남사에서 넘어오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이 두 길만 막아버리면 적들이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고 들어왔던 적도 빠져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948년 이후 우리당과 야산대가 이 지역에서 활동하면서부터 배내골에 저들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우리 해방구지요. 산이 높지는 않지만 겹산이라 여러 곳으로 빠져 나갈 수 있구요. 유격전 하기에 지리적 조건이 아주 좋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 후 전방에 있던 국방군이 내려와서 주둔하기 전까지 해방구였습니다. 이곳은 돌에 새겨 있는 대로 제2지휘소가 아니라 명성을 떨친 홍길동 부대가 있었구요. 홍길동 부대는 사령부 보위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요 아래 능선에 사령부 트와 참모부 정치부 트가 있었는데 지형이 양면 모두 급경사라 적이 올라오기 어렵고 방어하기는 좋은 지형입니다. 당학교도 있었습니다. 우리 무력이 신불산, 간원산, 가지산 등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배내골에서 선이 닿았고 이 산으로 입산했지요.”

 감회가 새로운 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능선을 타고 내려갔다. 여기저기에 트 자리와 전호 흔적이 확연하게 남아 있었다. 옛 사령부 자리에 수령이 몇 백 년 됨직한 노송 한 그루가 아직도 청청하다. 당지도부 트 자리에도 노송이 서 있다. 구연철 동지는 사령부 자리에 있는 노송은 (자주의 소나무를 줄인) 주송, 당지도부 자리에 있는 노송은 통일의 소나무를 줄인 일송이라 명명했다. 주송 앞에서 술 한 잔 따라놓고 묵념을 올렸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때문에 재촉했다. 나는 영진이와 함께 당학교가 있던 곳으로 가파른 면을 미끄러지며 내려갔다. 여러 개의 트 자리가 나타났다. 아직까지는 트 흔적이 남아 있지만 6년 전보다는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수년이 지나면 흔적조차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영진도 그 점을 우려하는 듯 여러모로 주변 바위 등 지형까지 세세히 카메라에 담았다. 트 자리 열 셋을 찍고 두 사람만 처져 있었기에 숨차게 올라갔다. 영진은 이 귀중한 장소를 못 찍고 갔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텐데 잘 오셨다고 좋아했다. 일행은 팔각정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경북이나 경남 동부 지구에서는 물론 울산 비행장 일시 해방이나 형상강 철교 파괴, 매축리 제55 보급창 부산 철도 기지창 습격 등 규모가 큰 전투를 했습니다. 도처에서 소부대가 매복, 기습, 도시 침투로 끊임없이 적의 후방을 교란시켰으며 군수품 수송에 타격을 주었습니다. 남도부 사령관에게 사형을 언도한 판사는 남도부 부대를 중심으로 경상남북도 빨치산이 각종 무기 800정에 실탄 20만 발을 약탈했으며 군용열차 28회 전복, 군경 자동차 670대를 소각하고 군경 및 양민학살 2,800명, 민가 700호를 소각했다고 발표했는데 뒷부분은 완전히 날조한 것입니다. 교전 과정에서 군경과 미군을 사살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민을 해친 일은 없습니다. 빨치산을 보고도 신고하지 않았다거나 빨치산을 도왔다고 인민을 학살한 것은 토벌대구요. 빨치산이 이용한다는 구실로 산간부락을 소각한 것 또한 토벌대가 자행한 짓입니다. 최근에 내가 구술한 책 󰡔신불산󰡕이 출판되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구연철 동지의 설명을 듣고 우리는 산을 내려왔다. 도중에 양산 다목적댐 전망대 밑에 차를 세웠다. 물이 벙벙한 호수에 점을 찍어놓은 듯 섬이 하나 있고 산들이 품고 있는 호수는 아름다웠다. 남쪽으로 뻗은 물줄기 양편이 바위로 단풍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둘러보고 곧 떠났다. 

 작별

 어두움이 골짜기를 덮고 있었다. 30여 분 달렸을까, 옛스러운 집 식당 처마 끝에 등불이 보였다. 외딴 채 대로 엮어서 창호지를 바른 문을 열고 들어갔다. 뒤주와 농 위에 바가지가 놓여 있고 벽과 천정이 옛날 집 그대로였다. 고향집에 온 듯 포근했다. 밥상이 들어오기 전에 각자 소개도 하고 현 정세와 전망에 대해서 논의했다. 산채비빔밥을 맛있게 먹고 뜰에 나왔다.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창원 젊은 일꾼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구연철 동지와 현희와도 손을 꼭 잡고 이번에 수고 많이 했다고 건강하시라고 서로를 격려하며 떠났다. 김용심이가 엎어져서 얼굴에 생체기가 났는데 처녀 얼굴에 흉터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더니, “빨치산 지구에서 얻은 흉터라고 자랑할 거예요.” 한다. 얼마나 너그러운가. 마음이 놓였다. 

차 안에서 돌아가신 천장호 동지와 북에 가신 석용화 동지, 송상준 동지, 경남 동부지역에서 활동하신 동지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리고 1948년부터 1952년 4월 지구당으로 개편되기 전까지 경남 동부지구당 위원장으로 계셨던 공인두 동지는 감호소에서 13년을 함께 살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앓다가 전혀 거동을 못하고 의식까지 흐려졌다. 죽음 직전인데도 놈들은 전향하면 당장 내보내겠다고 회유했다. 그때마다 고개를 좌우로 저었던 공인두 동지, 그 길로 가신 동지가 떠올랐다. 동지여! 동지들이여! 언제나와 같이 정부영, 김영진, 김은정이 수고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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