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규 (비전향장기수, 전 통일광장 대표)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임방규(86) 선생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2011년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필자는 2010년 6월부터 2011년 1월까지 29회에 걸쳐 자서전 ‘광주형무소 이가사’를 연재했으며, 곧바로 2011년 1월부터 그해 3월까지 8회에 걸쳐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연재해 오다 중단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연재는 8회에 이어 9회부터 시작됩니다. 필자는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될 때 남쪽에 남는 길을 선택했으며, 그 뒤 빨치산 격전지 현장을 답사하며 사라져가는 빨치산 역사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습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아래와 같은 순서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 주

<연재 순서>

충남 빨치산 전적지 답사
전북 북부지역 전적지 답사
지리산 전적지 답사(남원)
김제 임실 전적지 답사
부안 선운사 정읍 전적지 답사
고창 정읍 전적지 답사
전남 전적지 답사 (1)
전남 전적지 답사 (2) (유치지구, 백운산)
전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전적지 답사(1)
경남 전적지 답사(2)
경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동부지역 및 경북 전적지 답사

 

 2011년 10월 14일 오후 7시 30분에 김교영 동지, 한재룡 동지, 나, 정부영, 김영진이 양제구민회관 앞에서 출발했다. 대전에서 허찬영 동지를 태우고 밤중에 함양군 안희면 월점리 1302번지 국학연구소에 도착했다. 원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늦은 시간인데 푸짐한 도토리묵에 두부와 산채를 안주로 막걸리를 내놓았다. 수염이 더부룩한 원장이 지방일꾼 두 분을 소개했다. 정담을 나누며 술잔이 오고갔다. 밤이라 취할 수도 있건만 정부영은 내일 일정 때문에 다음날 7시에 아침식사를 부탁하고 술자리를 정리했다. 

잠을 푹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이슬이 맺힌 풀밭을 산책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떠나는데 원장이 사과 한 보따리를 차 안에 밀어 넣었다. 낙과지만 가다가 자시란다. 따뜻한 정을 뒤로하고 원장의 대안대학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면서 우리 일행은 떠났다. 춥도 덥지도 않고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차창 밖의 논들은 누런 벼가 그득하고 길가의 감나무는 빨간 감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박판수 동지가 아이들을 가르친 서상초등학교

 우리는 서상초등학교 앞에서 현희와 희숙이를 만났다. 반가웠다. 

 “이 학교에서 아버지가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오빠들이 목마를 태워주던 기억이 나네요.”

 교정을 바라보던 현희는 말을 잊지 못했다. 박판수 동지로부터 배운 어린이들 지금은 70대 후반의 노인이지만 몇 분이 나오기로 연락이 되었다는데 이른 아침이라 그런 것인지 나타나지 않았다. 마냥 기다릴 수 없는 우리라 8.15 전후 박판수 동지의 활동 근거지이기도 한 서상면을 떠났다. 아쉬웠다. 안의면에 가서 현희는 차를 길가에 세워놓고 희숙이와 함께 봉고차에 탔다. 목적지는 기백산, 가을이 짙어가는 산골 여기저기에 마을이 보였다. 논에는 벼, 밭에는 콩이 영글어가고 파란 무와 배추밭들이 보였다. 감 밭, 사과밭이 널려 있었다. 올해도 풍년인 듯싶다. 그러나 농사를 직접 짓는 농민들은 빚에 쪼들리고 살기가 팍팍하다고 한다. 농민문제를 어떻게 풀어야하나 상념에 잠겨있는데 골짜기를 타고 들어가던 차가 멈췄다. 
 
 동지들이 활동하던 기백산

▲ 기백산 작은 폭포에서 김교영 동지의 설명을 듣다. [사진제공-임방규]

 오른쪽 산이 기백산이란다. 차에서 내리자 바로 옆에 과히 높지는 않지만 수량이 많은 폭포가 보였다. 아래로 내려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파란 소에 폭이 넓은 물줄기, 단풍이 들어가는 숲에 에워싸인 폭포는 아름다웠다. 더러는 바위위에 앉고 서서 김교영 동지의 설명을 들었다.

 “이 기백산은 지리산에서 덕유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대부대가 자리를 옮겨가면서 기동 투쟁은 할 수 있어도 지형적 조건이 거점으로 활용할 수는 없습니다. 연락부 성원들이나 지방 조직이 비트를 파놓고 은밀하게 활동했던 곳입니다. 기백산 덕유산 일대에서 싸운 경남 부대로는 303부대 8.15부대, 102부대, 때로는 박문학부대, 노영호부대도 이곳에서 전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현상부대가 남하하면서 충주를 해방시키고 영동 민주지산에서 두 방향으로 이동했어요. 남부군 인민여단과 혁명지대를 합해서 연합부대라고 하는데 연합부대는 수도산, 단지봉, 가야산, 성산으로 이동하구요. 승리사단 본부대(이현상 동지와 정치부, 참모부, 의무과, 연락부 총무과가 속해 있음)는 무주를 경유하여 덕유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송치골에서 6개 도당회의를 갖고 2개월 후에야 위천면에서 서로 만나게 됩니다. 전 부대가 이 기백산에 임시 거점을 두고 백운산, 장안산으로 계내, 계복, 명석리, 이천, 석산, 서하 안의 봉산대병, 신안면, 오부면, 차황면을 치고 가회 지서를 때리다가 총참모장 박종하 동지가 전사했답니다. 유능한 군사간부를 잃었습니다. 나도 기백산에 파견되어 얼마동안 있었네요.”

 20대의 자신이 떠오르는 듯 김교영 동지는 기백산을 올려다보았다. 우리는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용추사를 둘러보고 돌아 나왔다.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 동지가 전사한 망봉

 차는 덕유산 망봉을 향해서 달려갔다. 망봉은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 동지가 최후를 마친 곳이고 항미연대 50여명의 전사들이 치열한 격전 끝에 4명이 살아남고 전원이 전사한 곳이다. 정확한 위치를 찾고 싶은 열망이 일고 있었다. 먼저 덕유산 들머리에 관리소를 찾았다. 뜰 앞에 차를 세워놓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에게 관광안내물을 부탁하고 “나는 역사기록문을 남기기 위해서 답사하고 다니는 글 쓰는 사람인데 전쟁 때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 씨가 망봉에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 위치를 알고 있습니까?” 하고 묻자 자기는 이곳에 온지 1년밖에 안되어서 모른다고 했다. 

관리소 오른쪽 산이 망봉이고 1,046m 왼쪽에 또 망봉이 있는데 699.7m로 덕유산 국립공원 안내도에 표시되어 있다. 60여년 전 방준표 동지가 전사하신 곳에 와본 적이 있는 김교영 동지는 기억을 더듬으며 699m 고지 망봉이 맞다고 했다. 차를 타고 가다가 한 번 두 번 내려서 지형을 살피고는 아니란다. ‘공정리’란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차를 세웠다. 

 “내가 이곳에 왔을 때 논두렁길로 논 여러 배미를 지나서 올라갔습니다. 여기가 맞습니다. 얼마 안 됩니다.”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한우 축사 뜰에 차를 세워놓고 교영 동지를 따라서 싸목싸목 올라갔다. 위쪽 논은 벼가 아닌 잡초가 들어차 있었다. 골짜기로 흔적만 남아 있는 길이 얼마 못가서 없어져 버렸다. 김교영 동지와 한재룡 동지는 왼쪽 능선, 나와 영진은 오른쪽 능선을 오르기로 했다. 꽤나 가파른 곳을 무찔러 올라갔다. 나무나 나무뿌리를 거머쥐고 힘겹게 올라채자 트 자리가 보였다. 아! 동무들이 있던 자리! 위치나 규모로 보아서 초소가 분명했다. 위로 올라갔다. 능선을 잘라서 큰 길을 만들어 놓았다. 더는 못 올라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또 동지들의 흔적이 있나 하고 살펴보면서 천천히 능선을 내려왔다. 허사였다. 산을 내려와서 돌아보았다. 골짜기 어딘가에 물이 있었을 것이고 트 자리로 보아서 분명히 동지들이 있었던 곳이다. 전북도 유격대 사령관 방준표 동지와 항미연대 전사들이 여기에 있었는지 이 능선에서 격전 끝에 최후를 마쳤는가…….

 60년 전 일들이 어제인 양 선하게 떠올랐다. 1951년 4월 초에 박근주 동지, 이동욱 동지, 이상훈과 나, 이렇게 네 사람이 선이 떨어져서 성수산과 팔공산을 헤매고 다니다가 삼각산 넘어 덕대산에서 도당과 선이 닿았다. 군사부장 김명곤 동지가 임실군당과 선이 연결될 때까지 도당 호위부대에 있도록 배치했다. 군경은 매일같이 10시경에 덕대산 주위를 포위하고 공격하다가 4시경에 철수하곤 했다. 그날도 아마 2시쯤 되었을 것이다. 밑에서 방어하던 동무들이 밀려서 적들이 능선에 올라와버렸다. 산불이 났을 때 옮겨 붙지 못하도록 능선을 따라서 나무를 베어버린 7, 8미터의 공간을 사이에 두고 전투가 치열했다. 위급한 상황이라 도당호위부대도 전원이 전투에 투입되었다. 총탄이 무수히 날아오고 수류탄이 터지고 매개 동무들은 소나무 뒤에 숨어서 적이 몸을 드러낼 때마다 단발총, 연발총을 갈겨대는데 어느새 왔는지 방준표 동지가,

 “저 놈 잡아라!”

 고함을 지르며 권총을 난사했다. 놀란 동무들이 달려가서 앞을 막고 불문곡직하고 끌고 갔다. 망봉 어느 능선에서 생을 마쳤는지 아직 모르지만 최후 결전시에도 대담무쌍하게 싸우다 가셨을 것이다. ‘한 몸을 조국에 온전히 바친 방준표 동지, 항미 연대 전사들이여! 그대들은 우리 민족과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 영진은 왼쪽 능선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 가고 나만 혼자 생각에 잠기며 축사에 돌아왔다. 뒤늦게 온 김교영 동지는 능선 중턱에 큰 묘가 있는데 산주가 묘연고자를 찾는다는 푯말이 묘 앞에 꽂혀 있는 것으로 보아 방준표 동지의 직계나 친척이 방준표 동지가 돌아가신 곳에 산주 모르게 묘를 써놓은 게 아닌가 여겨진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다리지에 불탄 절터에서 기습당한 부대는 능선에 올라가서 싸우다가 최후를 마쳤다는 생존자의 증언으로 보면 1046미터 고지의 망봉 줄기에서 전사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근 동지의 기록에 의하면 방준표 동지는 1905년 4월 8일에 경남 통영에서 출생, 1954년 1월 18일 덕유산 서쪽 줄기에 있는 망봉에서 국방군 5사단 36연대와 전투 중 전사했다고 쓰여 있다. 

 우리는 무주로 갔다. 구천동 입구에 차를 세워놓고 한재룡 동지와 나는 영진이와 함께 등산로를 따라 들어갔다. 아직 단풍철이 아닌데 몇 그루의 아름드리 은행나무 잎사귀는 온통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와 젊은 연인들이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는 6-700m 들어가다가 일행이 기다릴 것 같아 더 안가고 인터뷰를 했다.

 6지대 문화부 지대장 김태종 동지가 적의 매복에 희생당한 곳

 “저 산에 6지대 문화부 지대장으로 일부 병력을 통솔하고 내려와 충남북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던 김태종 동지가 묻혀 있습니다. 2,000년 여름에 6지대 부대장 함세환 동지, 신인영 동지, 나, 태종 동지의 딸 김혜원 님이 이곳에 와서 김태종 동지의 묘를 찾으려고 헤맸으나 끝내 못 찾고 말았습니다. 함세환 동지는 세 사람이 태종 동지의 시신을 묻었는데 모포로 여러 겹을 싸고 병에 고향과 이름, 나이, 직책, 사망 날짜를 적어서 초로 밀봉하여 깊이 매장했답니다. 두 동무는 전사하고 자신만 살아남았는데 자기 외에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을 몹시도 안타까워했어요. 혜원님은 저 산 흙 한 움큼을 가지고 가서 선산에 아버지 묘를 쓰고 비석도 세워놓았데요. 가본 적이 있습니다. 김태종 동지는 전쟁 전에 부안군당 비서도 했구요. 인민군이 서울을 해방시키자 바로 80여명의 젊은 일꾼들을 규합하여 전북 유격대를 조직하여 전선을 뚫고 남진했습니다. 2차로 내가 7월 7일에 서울을 떠났으니까 1차는 7월 초가 분명합니다. 거기까지는 내가 아네요. 뒤에 함세환 동지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김태종 동지가 지휘한 유격부대는 전북을 거쳐서 낙동강 전선에 나갔답니다. 전선을 뚫고 적 후방에 드나들면서 유격전을 수행했고요. 9.28 후퇴시에 북상 강원도까지 갔다가 6지대에 편입되었답니다. 6지대는 세 부대로 나뉘어져 지대장, 문화부 지대장, 참모장이 각기 1개 부대씩 책임지고 남하했는데 유일하게 문화부 지대장 김태종 동지가 인솔한 부대만 전선을 돌파하여 덕유산에 왔으며 충남북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답니다. 수많은 전투와 전공을 올렸다고 들었습니다. 김태종 동지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53년 여름 어느 날 요 밑에 골짜기로 걸어가다가 대낮에 적의 매복에 걸려서 희생되었대요. 그 때는 우리 루트를 꿰뚫고 있는 변절자들이 3,4명씩 숲속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해서 동지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답니다. 그놈들에게 당한 것이지요.”

 우리는 인터뷰를 마치고 곧 돌아 나왔다. 공터에 자리를 깔고 현희와 희숙이가 가져온 밥과 푸짐한 찬에 국까지 끓여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세시가 넘어서야 무주 구천동에서 출발했다.

 라제문

 가다가 삼거리에서 차가 멈췄다. 길가에 동상이 있기에 비문을 읽어보았다. 강무경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모집, 1907년에 침남 부대 선봉장으로 300여명을 이끌고 강진, 장흥, 능주, 영암, 나주, 해남, 보성 등지를 돌아다니며 왜군과 관군을 쳐서 큰 전공을 세웠으며 1909년 8월 26일 능주에서 체포되었고 1910년 7월 23일 대구에서 순국했다. 부인도 함께 싸우다가 체포당했는데 석방되었으며 절개를 지켰다고 새겨있었다. 

조국을 유린하는 왜군을 타도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할아버지들, 그 불굴의 정신, 불같은 애국의 얼은 후손들에게 핏줄로 이어지는 것이다. 누구도 어떤 정치세력도 끊어버릴 수가 없다. 친일파는 나쁘고 친미파는 좋다고 미군반대를 죄악시하는 얼빠진 인간들은 역사적인 교훈을 받아 안아야 한다. 

옆으로 50여 미터 밖에 산 능선을 뚫어서 길을 냈는데 굴 위, 아래, 양 옆이 순 돌이었다. 굴 위에 ‘라제문’이란 글이 새겨 있었다. 신라와 백제의 국호에서 한자씩 떼다가 만든 명칭이 눈에 들어오자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옛날 굴 양 입구에 신라 군인과 백제 군인이 각기 창을 세우고 오고가는 사람들이 내미는 통행증을 보면서 보따리는 건성으로 만져보고 통과시켰을 테지. 길손이 뜸하면 10여 미터의 거리라 말을 걸어보고 날마다 보는 정든 얼굴이라서 때로는 농도 하고 상급자가 오면 안 그런 척 딴전을 피웠을 것이다. 인정이 많은 민족이라 한편이 어려우면 위로하고 도시락도 나눠 먹었을 테지. 

지금과는 영 딴판이었을 정경을 상상해 보았다. 언제 돌을 쪼아서 길을 뚫었는지 모른다. 2,000년은 안되었을까? 저쪽 석문에 갔다가 돌벽을 짚어보며 천천히 돌아 나오는데 정부영이 빨리 오란다. 서둘러서 차에 탔다.

 굶고 혹한에 덕유산을 넘다가 일곱 동무가 절명하셨다

 무주 설천면 설천초등학교 정문 안에 차를 세웠다. 허찬영 동지가 입을 열었다.

 “기분이 묘하네요. 60년 만에 왔거든요.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구요. 그러니까 1950년 11월 초에 배뱅이에서 50여명을 규합하여 송리산까지 북상하다가 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이 남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내려왔습니다. 여기서 4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우리 해방구가 있었어요. 설천면에 경찰이 늦게 들어왔는데 그들을 치려고 동무들이 내 건너 저 산에 왔습니다. 경찰들이 이 운동장에서 아침운동하는 것을 보고도 언 내를 건너기가 어렵다고 총 한발을 안 쏘고 돌아갔습니다. 부대장 여석명 동무는 엄한 비판을 받았어요. 직위 해제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해방구에 105 남해여단 여단장 이천청 동지, 3연대장 이춘봉 동지가 여단 산하 300여명의 무장 대오를 통솔하고 있었습니다. 국방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있자 이천청 여단장은 200여명을 인솔하고 전북으로 가고 이춘봉 3연대장은 100여명을 인솔하고 경남으로 갔습니다. 그 해 참 추웠어요. 눈이 많이 왔습니다.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헤치면서 산을 탔네요. 며칠 동안 굶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아무튼 여러 끼를 굶고 지쳐버린 동무들이 덕유산 상봉을 넘다가 일곱 명이 얼어 죽었습니다. 나도 발은 떨어지지 않지, 죽는 줄 알았습니다. 덕유산 아래 어느 절에 가서 물을 끓여 먹었는데 맹물인데도 뱃속에 들어가자 몸이 훈훈해지고 생기가 나데요. 우리 대오는 1951년 1월 5일에 지리산에 당도했습니다.”

 아기까지 수백 명이 학살당한 금서면, 유림면, 신원면

 허찬영 동지의 설명이 끝나자 우리는 설천면을 떠났다. 차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생초면으로 들어갔다. 해가 서산 너머로 숨어버렸다. 강둑에서 김교영 동지의 설명을 들었다. 

 “저기 보이는 덕갈산이 지리산에서 덕유산으로 가는 길목인데 중간 거점으로 이용했습니다. 책임자가 홍팔십 동무고요. 아버지가 80에 득남했다고 이름을 팔십이라고 지었답니다. 잘 싸우다가 전사했네요. 52년 8.15 기념투쟁에 8지대 3연대가 생초면을 치기 위하여 뒷산에 내려와서 낮에 잠복하고 있었는데 어둡기 전에 움직이다가 그만 적들의 감시망에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날 전투가 치열했네요. 생초면을 먹지도 못하고 아깝게도 연대장 이영수 동지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까운 금서면, 유림면 12개 부락 인민들을 국방군이 519명이나 학살했습니다. 그 부대가 다음날 거창군 신원면으로 넘어가서 저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750명을 또 학살했습니다. 노인은 물론 아기들까지 학살하고 휘발유를 뿌려서 태워버린 놈들, 놈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1960년에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학살 당시 죽일사람과 살릴 사람을 가려냈던 신원면 면장인 박명보를 유족들이 잡아다가 죽였습니다.”

 이미 날이 어두웠다. 우리는 차를 타고 새재산장으로 갔다. 점심을 늦게 먹은데다가 현희가 가져온 떡을 먹었기 때문에 저녁 생각이 없는데 그래도 그냥 잘 수는 없다고 부영이가 슈퍼에 들러서 라면을 샀다. 산장 내외는 전에 자고 간 일행이라 반가워했다. 라면을 끓여먹고 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교영 동지는 특히 노영호 동지가 희생된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 질문을 했다. 이쪽 지형을 모르는 우리는 주인 답변을 듣기만하고 교영 동지는 감이 잡히는 것인지 흥분했다. 모두 따뜻한 방에서 푹 자고 다음 날 7시에 아침을 먹고 산장을 떠났다. 

 경남도당 위원장 조병화 동지가 잡힌 조개골

 경남도당 위원장 남경우 동지가 1951년 12월 대공세 때 대성골에서 희생된 후 전북도당 부위원장으로 있다가 경남도당 위원장으로 오신 조병화 동지가 체포된 조개골에 가는 길이다. 허찬영 동지는 부상당했던 다리가 아프다고 걸음이 느렸다. 교영 동지에 의하면 조병화 동지가 체포된 지점까지 갔다. 오는데 4시간은 잡아야 된다고 하기에 허찬영 동지에게 천천히 걸어오다가 힘들면 내려가시라고 이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오르막길인데 비교적 평평해서 과히 힘들지 않았다. 세 번 쉬고 1시간 30분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개울을 사이에 둔 일대에 부대가 있었고 조병화 동지가 체포당한 트가 있었다는데 정확한 위치는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주위에 산죽이 쫙 깔려있었다. 동지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산죽을 헤치며 위 아래로 더투었다. 동지들이 자고 밥 먹고 학습하고 회의하던 트 자리 세 곳을 찾아냈다. 언뜻 보면 모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이 쌓은 돌이며 땅이 주위보다 꺼져 있어서 빨치산 아니더라도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트 자리였다. 우리는 안에 들어가서 돌도 만져보고 사진을 찍었다. 

 ‘님들은 60년 전에 가셔서 육신이야 사라졌지만 우리 민족과 인민을 위한 한 마음, 목숨을 바친 님들의 넋은 영원히 후손들에게 계승될 것입니다.’ 심장 속에 있는 님들과 교감하면서 조개골을 떠났다. 

 “도당 트에는 도당위원장 조병화 동지, 기호과장 김병주 동지, 호위대 정치지도원 송송학 동지, 호위병 강대성 동지가 같이 지냈는데 그날 송송학, 강대성 동지가 보급 사업에 나갔답니다. 트를 정확하게 아는 변절자가 경찰을 끌고 온 듯 불시에 경찰들이 트를 덮쳐서 권총 뺄 시간도 수류탄을 터뜨릴 틈이 없었다고 하데요. 1954년 1월에 사고가 났고 조병화 동지는 대구 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당했습니다. 도당 위원장과 함께 잡힌 김병주 동지는 15년 징역을 살고 나와서 수년 전에 병사했습니다. 병주 동지와는 징역도 같이 살고 나와서도 오고가며 가깝게 지냈네요. 김병주 동지로부터 그 때 상황을 자세히 들었습니다.”

 김교영 동지의 설명을 들으면서 천천히 내려왔다. 도중에 교영 동지는 길가의 바위를 보고는 여기가 맞다고 안으로 들어갔다. 넓직한 곳에서 김교영 동지는,

 “1952년 5.1절 기념대회를 이 장소에서 가졌네요. 8지대 동지들과 산청군당 성원들이 참가했습니다. 당시에 경남도당 부위원장은 김병인 동지, 사령관은 이영회 동지, 참모장은 김명식 동지, 8지대 지대장은 조인민 동지, 정치주임은 한현수 동지, 저는 도민청 위원장으로 있었습니다. 5.1절 기념대회에서 내가 작성한 보고문을 낭독했네요.”

 말을 마친 김교영 동지는 옛일이 떠오르는 듯 주위를 살펴보았다. 우리는 새재산장에 내려갔다. 식탁에 토종닭이 나왔다. 희숙이가 점심을 시켰다고 했다. 우리 후예들의 배려와 정이 그득한 밥상이었다. 우리는 잘 먹고 산장을 떠났다. 

 문무를 겸비한 노영호 사령관이 희생당한 홍계리

 내려오다가 좌로 굽어서 들어갔다. 숲이 울창할 뿐 사람 왕래가 별로 없어보이는 좁은 길로 얼마나 올라갔을까? 집 너댓 채가 보였다. 산청군 삼장면 홍계리였다. 우리는 앞이 보이는 언덕에 올라갔다. 김교영 동지가 설명을 했다. 

 “정순덕 동지와 산장 주인의 말을 종합하면 노영호 동지가 전사한 곳이 여기가 맞습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동지들이 보급사업을 해가지고 앞산을 넘어서 이곳으로 왔답니다. 이 근방 어딘가에서 밥을 해먹다가 꼬리를 물고 따라온 경찰들에게 기습을 당했데요. 노영호 동지 외에 두 동지가 희생되었답니다. 그날 여기에 있었던 동지들은 노영호 사령관, 도당 조직부장 전정수 동지, 조직부 부부장 김희준 동지, 하동군당 위원장 이은조 동지, 구분대장 이재봉 동지, 문영태 동지, 이홍희 동지, 지동선 동지, 선명칠 동지, 김삼이 동지, 이용훈 동지, 정순덕 동지라고 합니다. 1954년 6월 19일이었구요. 정순덕 동지로부터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들었고 여기에 있었던 동지들의 이름을 잊을까봐 수첩에 적어두었습니다.”

 말을 마친 김교영 동지는 긴 숨을 내쉬었다. 54년 초까지 함께 있었던 동지들인데 아프지 않을 것인가. 노영호 동지는 문무를 겸비한 대단한 간부라고 들었다. 분노를 삭히며 홍계리를 떠났다. 높은 쟤를 넘어서 함양군 휴천면으로 갔다. 김교영 동지가 산중턱에 차를 세웠다. 

 “저 마을이 문정리 입니다. 경남도당이 9.28때 입산한 마을입니다. 임병탁 동지가 6.25 전에 도당연락부장으로 활동했고 여기가 고향이라 도당 성원들을 이곳으로 안내한 것 같습니다. 마을 뒷산이 달뜨산이고 마을 앞으로는 남강 상류인 임천강이 있어서 지도부가 얼마동안 있기에는 괜찮은 곳입니다. 문정리에서 사령부를 결성했고 덕유산으로 갔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충직한 일꾼은 흔적을 남기는 법이다

 “노영호 동지의 고향이 유림면이고 진양군당 및 진주시당 위원장 박판수 동지(현희 아버지), 부산시당 위원장 정칠상 동지(희숙 아버지), 하준수(가명 남도부) 네  동지가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대학 나온 공산주의자로 다 함양 출신입니다. 이 동지들이 일제 때 지역 인민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해방 후에는 전선에서 맹렬히 활동했습니다.”

 김교영 동지의 설명을 듣고 곧 출발했다. 안의면에 갔다. 용기며 깔개 등을 현희 차에 옮기는데 현희는 어느 사이에 준비한 것인지 사과 여섯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가시라고 봉고차에 실었다. 여성은 정이 많다. 그 점도 있지만 믿음이 가기 때문에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까? 현희와 희숙이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우리는 서울로 떠났다. 얼마 안가서 어두웠다. 조개골이 떠올랐다. ‘변절자’ 어제의 동지를 잡으러 다닌 자들! 대내의 일인의 적은 대외의 백만의 적보다 크다는 말이 있다. 곱씹어봤다. 양제역에서 내렸다. 부영이와 영진이가 언제나처럼 수고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