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민족자주문제와 통일문제에 천착해 온 노중선 <통일뉴스> 상임고문의 ‘역대 국회와 통일문제 논의’를 연재한다. 필자는 제헌국회에서부터 20대 국회에 이르는 역대 국회에서 통일문제와 관련한 논의들을 ‘민족화해와 자주통일’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아울러 필자는 향후 국회가 평화통일과 민족자주 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의를 거쳐 민족화해시대에서 분단 극복을 위해 자기 역할에 적극 나설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 연재는 매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14. 제14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1992.5~1996.5)

제14대 국회는 1992년 3월 24일 총선에 의해 총 299명(지역구 237명, 전국구 62명)을 선출하여 그해 5월 개원되었다.
 
14대 국회에서 특기할만한 일은 재벌 총수 정주영의 정치참여 선언과 그에 의한 통일국민당이 31석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전에 없이 예술 연예계 출신 의원들이 여럿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코미디언 출신 정주일 의원은 국회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면서 “정말 코미디 잘 배우고 갑니다”라는 자기 소회를 표현했었다. 이는 다수 국민들로 부터 불신 받고 있는 국회의 실상을 영혼 없는 웃음판으로 빗대어 조롱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그 같은 사실은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기도 했다.

1992년 10월 13일~15일까지의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당시 민자당과 민주당 그리고 통일민주당 대표는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각각 다음과 같이 언급(주1) 하였다.

  “…통일은 자주, 평화, 민주의 3대 원칙아래 남북한이 국가연합단계를 거쳐 민족대통합을 이루하는 것을 말한다. 통일에 대비하여 안으로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사회적 내실을 다져 나가야 하며, 밖으로는 북한의 변화를 꾸준히 유도해 나가야만 한다. 머지않아 한민족공동체가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한민족공동체를 창조하는 것, 이것이 신한국이다 …”(김영삼(민주자유당)의원)

   “…우리 당의 통일정책은 3원칙 3단계에 의한 점진적 통일이다. 평화공존 ‧ 평화교류 ‧ 평화통일의 3원칙 위에 제1단계는 1연합 2독립정부의 공화국연합제이며, 제2단계는 1연방 2지역 자치정부이고, 제3단계는 1민족 1국가 1정부의 완전통일을 이루는 3단계의 통일정책이다. 흡수통일을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김대중(민주당)의원)

  “…통일민주당은 통일문제를 정권적 차원에서만 다루지 않겠다. 국민의 정서가 하나로 되는 동질성 회복의 통일, 민족의 경제가 하나로 뭉쳐서 더 잘살게 되는 통일이 되도록 통일의 주체를 국민으로 규정하고 집권 2년 안에 자유로운 남북왕래와 본격적인 경제 교류를 이루어 우선 ‘국민의 통일’ 시대를 앞당겨놓겠다 …”(정주영(통일국민당)의원)

그리고 1992년 10월 26일 국회 통일문제에 관한 질문에서 손세일 의원은 “…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내전을 겪었던 민족이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호신뢰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한 상호신뢰의 바탕위에서 합리적인 방법과 절차에 따라 통일작업이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남북합의서는 현재의 남‧북 관계에 대해 ‘쌍방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 관계다’ 이렇게 천명하고 있다.”며 유엔에 각각 독립국가로 가입하고 있는 사실과는 어떻게 관련되는지 정부의 공식견해를 밝혀달라고 했다. 그리고 남‧북이 두 개의 독립정부 자격으로 연합체를 구성하여 통일을 추진하는 단계, 대내적으로는 두 제도이면서도 대외적으로는 한 국가의 성격을 갖는 단계, 그리고 대외적으로 하나의 국가이고 대내적으로도 하나의 제도, 하나의 정부로 이루어지는 민주당의 3단계 통일방안(주2)을 제시하였다.

또한 1993년 2월 11일 국회 통일문제와 관련한 질문에서 신기하 의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 긴긴 단일민족의 역사 앞에 가로 놓인 민족분단의 어두운 반세기는 우리 민족사가 뛰어넘어야 할 힘겨운 민족의 아픔이며 분단시대 분단체제의 극복과 자주적 민족통일국가의 건설은 우리 현대사가 해결해야 할 최대의 과제이다.
  … 분단구조는 그 동안 남북 모두에게 불구적인 사회구조를 잉태시켰다. 대외적으로는 민족의 자주성과 자결권의 침해를 초래하였다.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적 독재정치와 정치세력의 양극화를 가져 왔으며 경제적으로는 군비부담의 가중과 경제의 군사화라는 기형적 예산구조를 낳았고 사회 문화적으로는 양극적 이데올로기와 가치관의 황폐화 그리고 군사문화의 지배 속에서 겨레를 허덕이게 하였던 것이다. 분단의 역사 반세기동안 남북은 공히 한시도 통일을 부르짖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나 통일을 위한 노력의 흔적은 이제 겨우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효시켜 놓고 그나마 해석상의 차이 등으로 삐걱거리고 있지만 그간의 숱한 통일논의 속에서 남북 상호간에 이의 없는 통일의 기본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자주와 평화, 민주통일의 원칙일 것이다.”(주3)

그러면서 자주통일의 원칙과 관련해서는 남과 북의 새로운 협력과 단결이 보장되지 않으면 한‧쏘수교와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거나 미국과 일본을 통해 북한의 개방에 압력을 가한다고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평화통일 원칙과 관련해서는 우리나라 국방예산 이 전체예산의 4분의1이나 되는 현실에서 군비경쟁을 강제하여 북한을 압박, 개방시키는 정책을 취한다면 그것은 힘에 의한 대결은 될 수 있을지언정 통일정책은 될 수 없는 것인 만큼 군비축소를 통한 국방비 부담을 줄여 죽어가는 경제를 회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계속해서 민주통일 원칙은 통일문제가 정권의 안보 이데올로기로 이용되는 것을 막고 전민족 구성원이 참여할 수 있는 민주적인 제도적, 절차적 통로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며 이것은 남북정부의 민주적인 개혁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민주주의가 보장되지 않는 한 민족구성원의 합의에 기초한 통일방안이란 허울에 불과한 때문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신기하 의원은 “통일을 위한 전제 조건인 민족동질성의 회복을 위해 인적 교류를 우리가 먼저 일방적으로 허용하자”며 로동신문의 가두 판매, TV나 라디오 방송도 개방하면 북한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학자, 예술인, 종교인, 학생, 회사원, 체육인 기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북한 방문 등 인적 교류의 일방적 허용, 인도적 견지에서 인민군 종군 기자 출신 이인모 노인의 송환 등을 주장하였다.

한편 1993년 5월 18일 제161회 국회 제10차 본회의에서는 <북한의 핵문제해결촉구결의안>을 의결하였다.

이어서 1993년 10월 29일 국회 통일문제 관련 질문에서 한화갑 의원은 통일은 전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그 방안을 밀고 갈 수가 있는 것인데 역대정권 중에 통일방안을 영구히 세워놓은 정권은 한 정권도 없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북진통일, 민주당 정권의 유엔감시하의 총선거, 5.16이후에도 그 정책 답습했다면서 국민발의의 원칙, 국민참여의 원칙, 국민합의의 원칙에 따른 통일방안을 국민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야 통일방안이 된다고 하면서 “… 흡수통일론은 과거 무력대결이 우세했던 시절에 유행했던 북진통일론의 변종에 지나지 않으며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냉전적 사고에 길들여진 수구세력들로서 기실은 통일을 원하지 않는 반통일 세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흡수통일도 통일의 한 방식이며 나름대로의 논리적 근거와 현실적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흡수통일이 얼마나 큰 후유증을 낳는가를 통일 독일의 예에서 짐작할 수 있다.…”(주4)고 했다.
 
1994년 3월 4일에는 국회 여야총무가 국회법사위에 국가보안법 개폐소위원회를 구성키로 합의하였고, 같은 해 7월 1일에는 국회 정당대표 연설에서 이기택 대표는 국가보안법 개정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1994년 7월 5일 통일문제에 관한 질문에서 박상천 의원은 남북정상회담의 첫 과제는 남북대결을 종식한다는 기본 원칙에 양 정상이 합의하는 일이라고 전제한 뒤 남북정상 간의 합의는 첫째 한반도평화선언 채택, 둘째 남북 간의 평화정책을 보장하는 국제적 보장 장치를 만들 실무협의 기구 설치, 셋째 이산가족의 판문점 면회소 설치 그리고 양 정상과 남북 군당국간의 직통전화 설치 우선 합의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정부는 1992년 12월에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한 이후에 우리 당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국회비준동의를 받지 아니했다. 이렇게 해서 현재 남북기본합의서는 법률적 효력이 없는 정부 문서에 불과한 상태로 남아 있다. 왜 이렇게 했는지 그 이유를 밝혀주기 바란다. 동서독이 동서독기본조약을 의회의 비준동의를 받았고 또 북한도 남북기본합의서를 최고인민회의 비준동의(주5)를 받았다. 유독 우리만 국회의 비준동의를 받지 아니한 것은 이 합의서에 남북한이 상호 체제를 인정하고 교류 협력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 따라서 이것을 국회의 비준동의를 받아서 법률적 효력을, 법률과 같은 효력으로 인정할 경우에는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의 개폐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의 개폐를 피하기 위해서 비준동의를 안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주6)

그리고 1994년 11월 1일 국회 통일문제에 관한 질문에서 제정구 의원은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 우리의 현행 법체계 속에는 여전히 구시대의 냉전적 요소가 잔존해 있다. 이북오도에 관한 특별조치법, 부재선고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에서는 북한지역이 물리적 수복대상이라는 전제 아래 미수복지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국호 및 일부 지방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건에서는 아직도 북한괴뢰정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 귀순북한동포보호법은 남북 간의 군사적 대결구도를 전제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반통일적인 법령의 표본이라 할 국가보안법은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과 상충되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남북경제협력의 활성화라는 정부정책은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점과 정책상의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따라서 평화공존의 질서를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상호체제 인정의 원칙을 실천한다는 차원에서 국가보안법을 민주질서보호법으로 대체하고 남북합의정신에 위배되는 법령의 개정을 준비할 용의는 없는지?
… 지금까지 통일문제에 대한 민주적인 국민합의의 과정이 너무도 일천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국민적인 통일논의의 활성화방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과거 군사독재정권하에서 횡행하던 창구독점의 논리는 더 이상 통일논의의 자유를 억압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통일에 대한 논의는 남과 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민주주의와 민족의 복리를 실현하기 위해 온 겨레의 지혜를 모으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범국민통일협의체 구성을 제안한다.…”(주7)

한편 1995년 10월 4일 임채정 의원은 여야 각 정당 및 시민사회단체대표가 참석하는 통일방안 대표토론회 개최를 제안하기도 했었다.

이처럼 14대 국회가 국정을 논의했던 1990년대 초중반 시기는 이른바 문민정권에 대한 기대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5.16 군부쿠데타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30여년 군사독재정권이 물러나고 1993년 2월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면서 “어떤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분단 현실에 대한 진지한 극복 의지는 보이지 않았고 “핵을 가진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는 대북 적대적 입장만을 고수함으로서 남북대화와 교류를 통한 남북관계 발전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국회에서의 통일논의도 전과 다름없이 남북관계 발전 문제와 관련된 안건의 결의는 없었다. 다만 13대 국회에 이어 14대 국회에서도 몇 몇 의원들이 내용 있는 논의들을 개진했었다.

------------------------------------------------

1.『國會史(제14대국회)』, (국회사무처, 2006.11), 229~231쪽

2. 제159회국회, 국회본회의회의록 제8호(1992. 10. 26) 148~149쪽

3. 제160회국회, 國會本會議會議錄 제3호(1993.2.11.) 56~63쪽

4. 제165회국회, 國會本會議會議錄 제10호(1993.10.29.) 242쪽

5. 북측은 1991년 12월 13일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합의한 뒤 정식으로 발효하기도 전인 1991년 12월 26일 이미 최고인민회의 및 중앙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이를 정식 승인하였다.
그러나 남측은,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남북기본합의서 국회비준동의를 촉구하는 성직자 1,004인 선언문을 발표하였고,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재야인사 1,168인 성명으로 남북합의서 국회동의와 이행을 촉구한 것을 비롯해서 재야단체들은 국회동의를 촉구하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여 국회의 비준동의를 촉구하였다. 그렇지만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북기본합의서’는 국회에서 비준동의 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2년 3월 20일 남북공동으로 ‘남북기본합의서’와 ‘남북비핵화선언’을 유엔군축회의 사무국에 제출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국제사회에서 남북당국이 남북공동협력을 이룬 첫 번째 사례로 되는 일이기도 하다.

6. 제169회국회, 國會本會議會議錄 제8호(1994.7.5.) 129~131쪽

7. 제170회국회, 國會本會議會議錄 제11호(1994.11.1.) 160~161쪽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