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일 / 전 한신대학교 교수

 

북미 정상회담에서 통일의 희망을 건 그 자체가 잘못이었다. 멕시코 전쟁의 원인과 오크라호마 주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북미회담에 기대를 건 그 자체가 바보일 것이다. 이 글은 트럼프가 북미 회담을 취소할 것을 예측하고 써 둔 것인데, 예측이 사실로 돼 발표한다. 인간이 자연을 이긴 적이 없다. 더욱 우리 민족 스스로 힘을 모아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통일 과업을 이루어나가야 한다. / 필자 주

 

우리 민족의 통일은 역사나 인간을 통하거나 중심해 보면 실망하고 절망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연이 있다. 자연의 변화를 섭리라고 하여 자연의 섭리로 보면 우리는 반드시 통일 될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된다. ‘트럼프’란 말 ‘홍준표’란 말 입에 담고 싶지도 않다. 이들이 결코 자연의 섭리를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51년 7월 8일은 10일에 있을 정전회담을 위한 첫 준비모임이었고, 양측이 처음 만난 준비모임은 판문점이 아닌 개성 북쪽 광문동에 있는 내봉장이란 작은 민가 집에서였다. 첫 준비모임의 광경은 가관이었고 유치하기 짝이 없었으며, 어쩌면 그날의 장면이 오늘의 남북 관계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누가 남면을 하고 누가 북면을 하느냐를 놓고 승강이를 벌인다. 왕조 시대 때에 왕이 앉는 자리는 항상 남면이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북측이 다과를 내 놓지만 유엔군 측이 이를 거절하였다. 다과는 승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시혜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유엔군 측이 앉은 의자가 좀 낮았기 때문에 또 시비가 벌어졌다. 다시 오후에 소형 유엔기가 책상에 등장하자, 북측은 대형 인공기를 들고 나왔다. 회담 장소가 문제시 되었다. 개성은 중립국 지역인데 유엔군이 폭격을 했기 때문에 회담 장소로 적합하지 않다고 북측이 주장했기 때문에, 10월 25일 현재의 판문점(널문리)으로 장소로 옮겼다.(이기환 저, <<분담의 섬 민통선>>, 2009, 474-5)

이렇게 판문점 회담은 시작부터 서로 상대방을 향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거짓말쟁이’라고 삿대질하면서 시작했다. 그리고 첫날의 이 한 장면은 75년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무려 159회 본회담과 575회 공식회의가 열렸고 양측이 뱉어내 놓은 단어는 1,800만자이었다. 양측의 논리는 간단하다. 서로 상대방을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란 없다.

그러나 무려 75년이 지난 2018년 4월 27일 그 날의 한 장면을 목포대 하상복 교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얼마나 대조가 되는가?

“이러한 병리적 정치사와 역사의 무대 위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판문점에서 만난 두 정상은 파격에 파격을 거듭했다. 잘 짜인 기획일 수도 있고, 즉흥성 속의 선택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두 정상은 그들 스스로 '문학인'으로 하루를 보냈다. 강고한 분단선을, 누군가 말했듯, 고무줄놀이 하듯 즐겁게 넘나들었고, 파란색의 다리 위에서 초록의 나무를 배경삼아 우리에게는 침묵의 언어를 제공하고, 자신들끼리는 정교한 정치적 언어, 진한 민족적 언어를 교환했다. 그날 그 정치적 스펙터클을 본 사람들 또한 그들처럼 문학인이 되었다.” (하상복 목포대학 교수의 말)

2018년 4월 27일 남과 북의 태도와 화법이 확 변하고 말았다. 만찬 석상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 도로 사정이 나빠 문재인 대통령을 백두산 모시기에 민망하다고 한 것과 리설주 여사가 “한 일 없이 온 것 미안하다”고 한 것은 판문점의 화법이 변해도 엄청 변했다 할 수 있다고 했다. 말이 변한 것이 아니고 화법이 변했단 말이다. 한쪽이 ‘거짓말쟁이’라 하니 말을 받는 쪽이 ‘그 말이 옳아’라고 판문점 화법 자체가 변했다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 크레타 섬 철인 에피메니데스가 자기 동족을 두고 “모든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와 같은 화법이 판문점에 등장했다.

그러나 야당대표 홍준표는 제비 한 마리 온 것을 두고 봄이 왔다고 할 수 있느냐고 판문점 회담을 비아냥거리고 있지만, 세인들은 “오동잎 하나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천하에 가을이 온 것을 안다”고 했다. (홍)준표가 표준을 잃어도 너무 잃어 버렸다. 판문점 화법이 변한 것 자체를 야당 대표가 모르고 있다.

도보다리 위의 대화를 만약에 고대 메소포타미아 인들이 기록을 한다면 틸문 동산에 마주 앉은 엔릴과 엔키와도 같고, 시나이 들판에서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어린 만남과도 같다 할 것이다. 그날 하늘 위에서 노래한 새들의 이름들은 청딱다구리, 직박구리, 산솔새, 되지빠귀, 박새 등이었다고 한다(경향신문 5월 1일자 참고).

▲ 그날의 박새

 도보다리 옆 사방 숲 주변에는 조팝꽃이 하얗게 너울져 그 향기마저 그윽하였다. 숲속에는 고사리들의 새싹들이 막 흙을 뚫고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곧 여름이 되면 도보다리 밑에는 개울물들이 소용돌이를 만들며 흐를 것이다.

▲ 조팝나무는 듣고 있다

“봄이 되면 판문점 비무장지대에는 고사리를 비롯한 온갖 양치류들이 피어날 것이다. 우리는 피어나는 고사리 잎 속에서 통일의 비밀을 찾아야 할 것이다. 작은 것이나 큰 것이 자기 상사성을 갖는다는 것은 관념론과 유물론 그리고 여러 상반된 가치들이 어느 하나가 부적당하고 그 반대적 가치가 성립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남북이 서로의 가치는 인정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도 결국 부분이 전체를 그리고 전체가 부분을 재귀시키지 못하는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거짓말 역설과 카오스 이론에서 이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23년 전 ‘판문점의 고사리’란 제목으로 『퍼지논리와 통일철학』(솔출판사, 1995, 49쪽)에 써 둔 글의 한 구절이다. 현대 과학의 3대 혁명은 상대성이론, 불확정성 이론, 그리고 카오스-프랙털 이론이다. 과학자들은 카오스-프랙털 이론을 말할 때에 약방의 감초같이 고사리 잎과 소용돌이를 예로 든다. 아래 글은 통일을 비는 마음으로 23년 전에 쓴 글을 발췌 재정리한 것이다.

브리기스와 핏트는 카오스-프랙털 이론의 논리적 근거가 거짓말쟁이 역설에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거짓말(F)과 참말(T)이 반복적으로 ‘되먹힘recursive’ 되는 현상에서 카오스-프랙털 현상이 생긴다고 본다. 여기서 말하는 ‘되먹힘recursive’이란 자기 모양을 자기가 반복하면서 복사를 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바로 고사리를 보면 전체의 모양이나 전체 안에 있는 부분의 모양이나 같다. 이를 두고 자기 상사라고 한다. 개울물이 흐르다 소용돌이를 만들면 작은 소용돌이 속에 큰 것이 자기 상사를 하면서 되먹힘을 한다.

▲ 판문점의 고사리
▲ 판문점의 고사리

              

 

 

 

 

역설은 고사리 잎에서와 같이 자기 상사 혹은 자기 반복이라는 규칙성을 그 구조 속에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컴퓨터로 고사리 잎 피어나는 모습을 그래픽으로 그리면 아래와 같다. 고사리 잎의 양 가닥을 남(x)과 북(y)이라고 할 때에 자기 상사를 쉽게 도표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 컴퓨터가 그리는 고사리 잎
▲ 컴퓨터가 그리는 고사리 잎

xy의 증식은 끝없는 메타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메타화는 앞의 것을 부분으로 포함하는 부분이 전체가 되고 그 전체가 다시 부분이 되는 과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것이 요즘 4차 산업에서 말하는 알고리즘algorithm의 실체이다. 이러한 알고리즘을 북한 사회주의 헌법 5장 63은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집단주의 원칙에 기초한다”라고 했다. 새 헌법에도 반드시 4차 산업에 걸 맞는 알고리즘이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국민은 정부를 위하여, 정부는 국민을 위하여”와 같이 전체와 부분이 고사리 잎같이 자기 상사를 하듯이 말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가 전부라면 이것은 자기 상사가 아니다.

남과 북이 헌법상에서 통일을 하는 비결은 자기 상사에 있을 것이다. 전체와 부분이 자기 상사를 해 나간다면 그 속에 용해 못 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자기 상사의 원리를 몰랐기 때문에 대립과 갈등을 조장해 온 것이다. 자기 상사를 하는 자연 현상 가운데는 흐르는 물의 소용돌이가 예가 된다. 남과 북이 계속적으로 자기 상사를 해 나가는 자연의 힘, 즉 알고리즘이 변화를 가져 올 것이다.

▲ 프랙털 임진강 물 소용돌이

소용돌이 연구 혹은 난류 연구를 일명 ‘레오나르도 연구’라고도 한다. 소용돌이는 자기보다 작은 소용돌이를 포함하고, 이들은 또 더 작은 소용돌이를 포함한다. 이런 연속적으로 갈라지는 것을 ‘갈래질bifurcation’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 한반도는 지난 70여 년 간 이런 갈래질을 하였다. 이를 비관적으로 보지 말고 그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넘어가야 한다.

이제 여름이 오고 보도다리 밑에는 냇물이 흐를 것이다. 냇물이 큰 바위를 만나면 흐름이 갈라지면서 바위를 감싸면서 유유히 흐를 것이다. 주변의 고사리들은 이 물을 자양분으로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장마철이 되면 물의 흐름은 빨라질 것이다. 바위 뒤에서는 이들 소용돌이들을 만들면서 같은 장소에도 오래 머물 수 있다. 이를 두고 ‘한계순환’이라고 한다. 물고기가 쉴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청계천의 물살이 너무 빨라서 이런 한계순환이 형성 안 돼 물고기가 서식할 수 없다고 한다. 지금 남북은 4.27 정상회담을 계기로 이런 한계순환점에 도달했다.

물살이 빨라지면 바위 뒤에 있던 소용돌이들은 더 작은 소용돌이로 갈래질을 하면서 자기 상사를 반복한다. 그 구조는 고사리의 자기 상사 구조와 같다. 남북이 4.27 판문점 회담을 계기로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앞으로 비가 더 많이 와도 소용돌이는 자기사상을 반복할 것이다.

자기가 자기 속에 들어가는 자기 상사를 ‘포함包含’이라고 한다. 큰 것이 작은 속에 작은 것이 큰 것 속에 되먹힘 해 들어가는 것을 포함包含이라고 한다. 그러나 큰 것 속에 작은 것이 들어가는 것은 ‘포함包涵’이라고 한다. 포함包涵은 전체는 부분의 합이란 유클리드 공리에 근거한다. 이데아가 사물을 다 포함包涵할 수는 있어도 그 반대는 아니다. 그러나 포함包含의 논리에 의하면 크고 작은 것이 상호 그 안에 들어간다.

흡수통일이란 바로 포함(包含, involving)이 아니고 포함(包涵, including)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후자는 글자 모양에 있어서도 물병에 물을 담는 것과 같다. 서로 상대방을 자기 안에 담아 넣으려 한 것이 적화통일 혹은 멸공통일이다. 모두가 현대과학의 프랙털 이론과는 거리가 먼 전근대적인 논리의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서로 담고 담기는 포함包含의 관계가 비로소 이번 판문점에서 이루어졌다. 고사리도 냇물도 소리 없이 반기고 있다.

다음 리차드슨Leuis Richardson의 ‘소용돌이 시’를 생각하자.

    큰 소용돌이는 작은 소용돌이를 품고
    작은 소용돌이는 더욱 빨라지며,
    작은 소용돌이는 보다 작은 소용돌이를 품어,
    점으로 소멸될 때까지 이른다.

그 날이 오면,

    남은 북을 품고 북은 남을 품어
    품고 품어 속도는 더욱 빨라져
    소용돌이 속에 소용돌이
    이 세상 전쟁무기 다 삼켜 버릴 때
    박새, 청딱다구리, 직박구리, 산솔새, 되지빠귀
    평화로다, 평화로다
    이 땅에 평화가 왔도다
    합창하리라!
   
북미정상회담 속에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판문점 고사리와 임진강 소용돌이 속에 역사는 피고 지고 굽이친다.

자연이 결국 인간을 이기고 말 것이다. 트럼프가 어쩐다고, 판문점의 고사리 힘만도 못한 연약한 존재로 역사의 티끌로 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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