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국학 월례강좌>

‘국학과 민족주의 만나다’를 주제로 ‘2018 국학 월례강좌’가 매월 한 차례씩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사회가 민족통일이라는 커다란 시대적 소명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학과 민족주의는 거의 백안시되고 있는 실정에서 절박한 마음들을 모아 기획된 강좌입니다. 이 강좌는 (사)국학연구소와 21세기민족주의포럼이 공동 주최하고 통일뉴스가 후원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12강) 김동환 “홍익인간.접화군생은 지고지선의 인류애”

(11강) 강철구 “신자유주의 무너지면 민족.민족주의 가치 커질 것”

(10강) 김치관 "분단으로 단절된 동학.국학은 민족통일운동의 원천"

(9강) 정영훈, ‘통일을 위한 중심이론’ 삼균주의와 신민족주의

(8강) 임영태 “과거사 청산은 ‘기억 책임 미래’”

(7강) 임찬경 “많은 시민들이 ‘고대사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

(6강) 신운용 “나철의 대종교 중광, 한국 민족주의 근대의 기원

(5강) 주요섭 ‘다시 개벽’으로 모두가 ‘진인’인 시대로

(4강) 박용규 “남북 언어 이질성, 교류만 하면 해결될 문제”

(3강) 이병한 “현대와 전통 분단체제 극복이 최대 화두”

(2강) 정수일 “진정한 민족주의자는 진정한 국제주의자”

(1강) 김동환, “국학을 세워 분단을 넘는다”
 

 

수운 최제우의 제3의 길, ‘다시 개벽’

▲ 주요섭 한살림연구소 사무처장은 17일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2018 국학 월례강좌’에서 ‘수운의 다시개벽과 삶‧사회의 전환’을 주제로 강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당대의 지식인에게는 세 갈래의 길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19세기 조선에게는 3개의 살 길이 있었다. 첫 번째는 척사의 길이 있고, 두 번째는 개화의 길이 있고, 세 번째는 후천개벽, 다시 개벽, 제3의 길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주요섭 한살림연구소 사무처장은 17일 오후 7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 430호에서 열린 ‘2018 국학 월례강좌’에서 ‘수운의 다시개벽과 삶‧사회의 전환’을 주제로 강연에 나서 동학의 ‘다시 개벽’을 화두로 제기했다.

주요섭 처장은 영화 <설국열차>를 사례로 들어 “두 주인공, 아빠와 딸은 전혀 시선이 다른데 있었다”며 달리는 열차의 머리칸(보수)도 꼬리칸(진보)도 아닌 창밖이었다고 말하고 “150년 전, 120년 전에 ‘수구적 질서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수구적 질서를 무너뜨릴 것인가’하는 2차원적 구도에서 새로운 상상력, 새로운 전망, 새로운 비전을 다시 개벽 속에서 발견을 하는 거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1824-1864)의 삶을 통해 ‘다시 개벽’을 풀이했다. 당시는 굶주림과 전염병, 전쟁의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이상향 ‘궁궁촌(弓弓村)’을 찾아 헤매던 때였고, 수운은 △‘아니다’는 생명감각(각비 覺非) △다시 돌아옴(재귀 再歸) △하느님 체험(시천주 侍天主) △새로운 공동체(접 接) △체제 전환(보국안민 輔國安民)이라는 과정을 거쳐 ‘대전환’, 즉 다시 개벽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재귀’에 주목했다. 수운은 궁궁촌을 찾아 주유하며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고 다시 경주 용담 집으로 돌아온다. “‘다시’라는 말에는 어게인(again)과 함께 뉴(new)가 같이 들어가 있다는 거다. 뉴가 없는 어게인은 기계적 반복이다. 그래서는 새로운 게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오늘의 감각이 탈노동으로 가서, 그 탈노동은 귀촌이 될 수도 있고, 귀향이 될 수도 있고, 귀휴가 될 수도 있다”며 “제자리에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니고 새로운 자리로 가야 한다. 새로운 출발점이 만들어지는 거다. 그게 재귀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수운 선생의 깨달음의 차원 변화가 계속 이루어지는데 처음에는 개인의 숙명의 문제였다가, 조선사회 전체 문제로 본다. 이때 보국안민 이야기를 한다”며 “그런데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1860년대 수운 선생이 깨달음 체험을 할 그 당시에 베이징이 함락됐다”고 짚었다. 이미 한 나라를 바꾸는 문제를 넘어선 세계사적 전환의 거대한 태풍이 몰려오고 있었다는 것.

이같은 궁궁촌을 찾는 과정에서 접한 외부 세계의 변화와 더불어 “내면의 새로운 차원을 발견했던 것이 수운으로 하여금 5차원으로 도약할 있게 했던 것”이라며 “태극(太極)이 현재의 질서라면 궁궁(弓弓)은 카오스다. 카오스는 잠재성의 세계다.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세계다.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세계로 되돌아가서 다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 다시 개벽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다시 개벽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이지 세상이 두 번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재설정함으로 해서 다시 개벽을, 내가 이 세계를 재창조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만들어졌다”고 해석했다.

그는 “수운 선생 스승 연담 이운규에게서 동학, 남학, 정역 이렇게 세 갈래로 나뉘었다”며 “연담을 조선시대 선맥, 기학 쪽 흐름으로 보고 있다”고 전제하고 “한사상이나 풍류도나 한국적 선맥이 숨어있다가 현도한 것이 동학이 아닌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역사적 연원을 풀이했다.

특히 “동학의 경우에는 내안에 하느님을 자각하고 나를 통해서 하느님을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서학과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당시 천주학(서학) 역시 순교자들을 배출했지만 “서학의 경우는 하느님이 교회 안과 천국에 가두어져 있다”는 것.

그는 동학혁명의 중심지였기에 정읍, 부안, 고창으로 찢긴 ‘고부’ 지역의 당시 특수성에 대해 △부안에 반계 유형원이 귀양와 오래 살아 그의 토지개혁 정책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정약용의 <경세유포> 별본이 몰래 유포됐고 △고부 옆 임실이 정여립의 땅, 반란의 땅이라는 점을 꼽았다.

수행공동체에서 정치공동체로..“60년 정도를 보자”

▲ 주요섭 한사림연수원 사무처장은 고 무위당 장일순에서 시작된 한살림운동에 20여년 진력해왔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전북 정읍에서 목회 활동을 하며 동학에 관심을 기울인 부친 덕에 일찍 동학에 관심을 갖고 20여년을 한살림운동을 해온 그는 “한살림이 동학에 실천적으로 주목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수운 선생이 깨달음을 얻고 나서 처음으로 실천했던 것이 접(接)이라는 공동체를 새롭게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수운은 깨달음 체험을 하고 나서 <용담유사>라든가 가사들을 써서 보급하고 <논학문> 같은 글을 써서 나누고 이러는 과정에 실천적으로 했던 것이 16개의 접을 만든 것”이라며 “접이라는 것은 그 당시 조선사회에 있었던 모임을 말하는 건데, 그것을 고유명사로 쓰게 된 거다. 보통명사인데 고유명사가 된 거다”라고 설명했다.

접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는 수행(신앙)공동체로 시작해 생활공동체가 되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에는 정치공동체로 전환했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생활협동조합(생협)의 모태가 된 한살림운동을 발원시킨 무위당 장일순(1928~1994)의 “계산 있는 협동도 있지만 계산 없는 협동도 있다”는 발상이 동학의 ‘유무상자(有無相資)’에서 비롯됐다고 봤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자신의 것을 내어서 함께 살아간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관념이 아니라는 거다. 아주 핍진한 삶의 문제라는 거다.”

그는 동학의 접이 정치공동체로 발전하는 과정에 주목했다. “1864년 수운이 죽고 나서 해월 선생에게 도통이 전수되고, ‘고비원주(高飛遠走), 높이 날아서 멀리 뛰어라’ 이렇게 얘기했고, 그 명을 받은 해월 선생이 전국을 다니면서 30년 동안 16개 접을 160개, 1,600개로 만든 거다. 신앙공동체로 출발해서, 생활공동체가 되고, 유무상자의 공동체를 만들고, 1892년부터 교조신원운동을 하고 각 지역마다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활동들을 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정치공동체로 변한다. 그런데 그 싹이 이미 여기 있다는 거다.”

수운 최제우가 1860년 도를 깨닫고 1864년 처형당한 뒤 해월 최시형이 30년에 걸쳐 접과 접들을 더 넓게 아우르는 포(包)를 조직해 비로소 동학의 접포(接包)에 근거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가능했다는 것.

그는 “아주 큰 틀에서의 ‘다시 개벽’운동, 동학운동이 쭉 전개돼 왔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그 시간을 60년 정도를 보자는 거다”며 “1894년을 중심으로 해서 30년 전, 30년 후로 보자”고 제안했다.

▲ '2018 국학 월례포럼' 참석자들은 진지한 질문을 이어갔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수운의 득도와 순교에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까지의 30년은 비교적 알려져 있지만, 이후 30년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1894년 동학혁명 이후 1904년 갑진개화운동을 거쳐 마침내 1919년 3.1운동이 분출했고 3.1운동 당시 3대 교주 의암 손병희와 천도교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고 봤다.

나아가 1926년 고려혁명당 창당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파악해 눈길을 끌었다. 고려혁명당은 정의부의 민족유일당 형성 운동으로 출발해 민족주의 좌파가 주류를 이뤘지만 사회주의자들의 활동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21세기민족주의포럼이 주최한 2014년 ‘동학 2주갑 특별강연’에서 최시형의 아들 소수 최동희(1890~1927)가 1919년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났고, 당시 레닌은 최시형과 천도교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최동희는 1926년 고려혁명당을 조직했지만 이듬해 상하이에서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실제로 국사편찬위원회는 지난해 4월 최동희가 1924년 4월 13일 러시아의 조선전권위원인 이델슨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 천도교가 약 10만 명 규모의 비밀결사를 은밀히 양성하고 있다고 밝혔고, 같은해 8월 25일 소련 외교위원장에게 보낸 서한에는 15개 여단 규모의 ‘고려국민혁명군’을 결성할 계획이라며 지원을 요청했다고 발표했다. 그 규모로 보아 천도교와의 연관성을 빼놓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는 “천도교인들이 북한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정부 쪽에 붙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며 “지금까지 줄곧 50년 동안 천도교가 한 번도 민주화운동을 지지한 성명을 내본 적이 없다”고 꼬집었다. 오히려 박정희, 전두환이 자신들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수운회관을 짓는 등 천도교를 활용했다는 것.

그는 “80년대 이후 동학을 되살려 놓은 것은 내용적으로 김지하 시인이고 대중적으로는 김용옥 선생이다. 그래서 지금 천도교는 무임승차했다”며 “그 힘으로 어느날 문득 살아날지도 모르는데, 남북관계를 타고서 살아날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북한에 있는 천도교청우당하고 계속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그 힘이 이렇게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촛불 세대와 모두가 ‘진인’인 시대

▲ 주요섭 사무처장은 수운 최제우의 '다시 개벽'을 화두로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새 한울‧새 땅에 사람과 만물이 또한 새로워질 것이니라”라고 예언한 ‘다시 개벽’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는 그의 최대 관심사다. 관련 글들을 묶어 『전환 이야기』(모시는사람들, 2015)로 펴낸 바도 있다.

해월은 ‘어느 때에 현도가 되겠느냐’는 질문에 “산이 다 검게 변하고 길에 다 비단을 펼 때요, 만국과 교역할 때”라고 답했고, ‘어느 때에 이같이 되겠느냐’는 질문에 “때는 그 때가 있으니 마음을 급하게 하지 말라. 기다리지 아니하여도 자연히 오리니, 만국 병마가 우리나라 땅에 왔다가 후퇴하는 때”라고 예언했다.

그는 “이게 지금 나의 고민”이라며 “답이 없다”고 했다. 다만, “다시 개벽이 인간과 신의 새로운 관계설정으로, 새로운 세계를 여는 것”이라고만 제시했다.

대신 현재 관심이 미치는 네 가지 사안은 △생명위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자연과 사회의 불균등 진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인공지능‧가상현실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새로운 인간은 누구인가? 아니 어떻게 볼 것인가?라고 소개했다.

그 중에서는 그는 마지막 질문에 대해 “해월 선생은 후천개벽은 인심개벽이라고 명확히 얘기한다. 사람 마음의 개벽이다”며 “다시 개벽을 이야기하려면 인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우리세대들과 또 다르게 지금 촛불세대라고 하는 젊은 세대들”의 특징으로 1997년부터 7차 교육과정이 시작되면서 ‘구성주의 방법론’이 적용돼 온 것에 주목했다. “정부에서 일순간에 정책을 바꾸면서 20년 전부터 초등학생, 중등학생들이 새로운 학습방법에 의해서 새로운 인식론적인 세례를 받으며 자라난다”는 것.

그는 “지금 젊은 세대에는 그들의 삶의 경험이 있다”며 “다시 개벽의 메시지도 그 친구들 스스로가 자각하도록 어떻게 도울 것인지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도 좋지만 ‘나는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가’도 함께 가야된다”고도 했다.

“20대가 경험한 현실과 50대가 경험한 현실, 150년전 수운 최제우가 이 땅에서 경험한 현실은 다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걸 먼저 인정하고 가자”는 것이다.

“수운 선생의 깨달음 핵심 언어는 모실 시(侍)자다”며 수운 최제우의 ‘시천주 侍天主’가 해월 최시형에 와서 ‘양천주 養天主’가 되고 의암 손병희는 ‘체천주 體天主’로 바뀌었다며, 손병희 시기의 ‘공개인 公個人’ 개념에 주목했다.

그는 ‘공’에 대해 “사회적 경제이론에서 경제의 3가지 영역이 있다. 프라이빗 이코노미(private economy), 커먼 이코노미(common economy), 퍼블릭 이코노미(public economy)로 나눈다”며 “공이 바로 퍼블릭이다.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공개인에 대해서는 “전체성을 가진 존재이면서 개체성을 가진 존재, 한살림 식으로 말하면 ‘한사람’이다”며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하나이면서 전체”라고도 했다.

또한 “‘공’이 하늘이라면 인간이 ‘개’다. ‘인내천’의 내용과 같다고 이해한다”며 공을 영어로 총체성(totality)와 다른 전일성(wholeness)으로 해석했다. 더 나아가면 공은 ‘무 無’로 연결되지만 이는 현실세계 보다는 사상과 종교의 영역이다.

그는 “수운 선생은 열석자 주문만 열심히 외우면 누구나 다 신선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다시 개벽이었다”며 “개인 한사람, 공개인의 관점에서 자기 스스로 모두가 ‘진인 眞人’인 그런 시대로 가고 있는 게 오늘날이 아닐까”라는 화두를 던졌다.

(사)국학연구소와 21세기민족주의포럼이 주최하고 <통일뉴스>가 후원하는 ‘2018 국학 월례강좌’는 6월 21일 오후 7시 서울시의원회관 제1대회의실에서 신운용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국학과 단군 - 홍암의 국망도존’을 주제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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