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뿌리는 땅속 깊숙이 박았지만 가지는 하늘로 치뻗은 나무여야 한다 (러셀)

 

 병든 장미
 - 윌리엄 블레이크

 오 장미여, 그대 병들었구나!
 폭풍 울부짖는
 어두운 밤
 보이지 않는 벌레가  날아와

 그대 침상에서
 진홍빛 환희를 찾아내
 그 은밀하고 어둔 사랑으로
 그대 생명을 파괴하는구나.


 ‘유흥업소 성폭행 피해자의 눈물 ..미투운동 보며 답답’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댓글을 읽어보니 ‘힘든 일은 안하고’ ‘죄다 유흥 등 쉽게 버는 쪽/다 집어치우고 공장이나 등등 일해라/그럼 된다’ ‘거긴 원래 그런 곳이고....제 발로 기어들어갔고....돈맛을 알아서 나오지 못하는 개미굴 같은 곳’ ‘그만한 각오도 없이 남의 술잔에 술 따르냐?’ ‘도대체 노래방 도우미는 뭘 도와주는 도우미냐?’ ‘돈 참 쉽게 벌려구하네...’ ‘옆에서 술만 따르고 연봉 1억 벌겠다는 거냐?’ 이런류의 글들이 많았다.

 나는 ‘성(聖)스러운 여인’ ‘기생’ 황진이를 생각했다. 그 당시에도 아마 많은 남성들이 기생이면 당연히 몸 팔려고 나온 것 아니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남성들의 거대한 성벽 속에서 자신의 ‘성결정권’을 지키며 당당하게 한 세상을 살다갔다고 한다.

 오래 전 전경린 소설가가 쓴  ‘황진이’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했던 기억이 난다.

 ‘제게 몸은 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밟으면서 길을 버리고 온 것처럼 저는 한 걸음 한 걸음 제 몸을 버리고 여기 이르렀습니다... 저는 그저 기생으로서 힘껏 제 명을 다하고 이슬처럼 스러지고 싶을 뿐, 굳이 무엇을 가르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구든 공부란 것은 혼자서도 늘 충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글에 한 인간 황진이가 도달한 고매한 정신세계가 다 드러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왜 온갖 미녀를 다 만나 봤을 고관대작들이 ‘미인도 아니면서 오만방자한’ 황진이를 그리도 좋아했을까?

 심층심리학자 융은 말한다. ‘남성의 마음속에는 네 단계의 아니마(여성상), 성적인 여성을 상징하는 이브, 고상하고 아름다운 헬렌, 모성과 순결을 상징하는 마리아, 지혜를 상징하는 소피아가 있다.’

 소피아는 남성에게 끝없는 영감과 신비를 준다. 남성의 영(靈)적인 힘이 깨어난다. 우리에게 모나리자의 이미지로 나타난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는 황진이가 소피아의 이미지일 것이다.

 그래서 유교 인문학을 일찌감치 섭렵하고 권력과 돈을 다 가졌던 고관대작들이 그녀에게 매혹되었던 것이다.

 댓글에서 나타난 남성들의 여성관은 상당히 낮다. 주로 여성을 낮은 단계의 아니마로만 이해하고 있다. 주로 자신들의 성(性)적 대상으로만 여성을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 문화는 남성들에게 높은 차원의 여성 이미지를 주지 못했다. 좀 더 실질적이고 차원 높은 ‘성과 사랑 교육’을 했으면 좋겠다.     

 ‘병든 장미’를 보며 윌리엄 블레이크는 울부짖는다. ‘오 장미여, 그대 병들었구나!/폭풍 울부짖는/어두운 밤/보이지 않는 벌레가  날아와//그대 침상에서/진홍빛 환희를 찾아내/그 은밀하고 어둔 사랑으로/그대 생명을 파괴하는구나.’

 미투 운동이 남녀가 함께 삶의 동반자로 나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열어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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