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방규 (비전향장기수, 전 통일광장 대표)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 임방규(86) 선생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2011년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필자는 2010년 6월부터 2011년 1월까지 29회에 걸쳐 자서전 ‘광주형무소 이가사’를 연재했으며, 곧바로 2011년 1월부터 그해 3월까지 8회에 걸쳐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를 연재해 오다 중단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연재는 8회에 이어 9회부터 시작됩니다. 필자는 2000년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송환될 때 남쪽에 남는 길을 선택했으며, 그 뒤 빨치산 격전지 현장을 답사하며 사라져가는 빨치산 역사를 재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습니다. 이 연재는 매주 토요일에 아래와 같은 순서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 주

<연재 순서>

충남 빨치산 전적지 답사
전북 북부지역 전적지 답사
지리산 전적지 답사(남원)
김제 임실 전적지 답사
부안 선운사 정읍 전적지 답사
고창 정읍 전적지 답사
전남 전적지 답사 (1)
전남 전적지 답사 (2) (유치지구, 백운산)
전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전적지 답사(1)
경남 전적지 답사(2)
경남 전적지 답사 (3)
경남 동부지역 및 경북 전적지 답사

 

 경남 동지들을 만나다

 2011년 4월 23일 양재에서 9시 40분에 김은정은 목디스크가 악화되어 못 오고, 김교영 동지, 나, 정부영, 김영진, 네 명이 출발했다. 화창한 봄 날씨였다. 대전 톨게이트에서 허찬영 동지, 이창근 동지를 반갑게 만나서 차에 태우고 통영고속도로를 달렸다. 함양에서 남원으로 빠지는 길로 굽어 들어갔다. 올해는 예년과는 달리 봄꽃이 늦게 피었다. 산 여기저기에 벚꽃이 활짝 피어 있고 진달래가 보이고 개나리도 아직 남아 있었다. 남원에서 구례로 가는 길목에서 박현희를 만났다. 현희 차에 타고 온 박순자 동지, 한창우 동지, 민경옥 동지, 그리고 희숙이가 나와서 서로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2시가 넘어서 출출했지만 우리를 기다리는 동지가 있기 때문에 머뭇거리지 않고 달렸다. 3시가 넘어서야 화개장터에서 송송학 동지를 만났다. 나무 그늘 밑에 깔개를 깔아 놓고 현희가 가져온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이현상 동지가 돌아가신 빗점골

 동지들과 잠깐 일정을 의논하고 떠났다. 대성골로 들어가는 길은 양 옆으로 수십 년 된 가로수가 하늘을 덮고 있었다. 내를 따라서 구불구불 나무 굴 속으로 달리는데 운전하는 정부영은 처음 길이라 감탄하면서 이야기에 팔려 있는 우리에게 저것 좀 보시라고 했다. 가본 길이지만 새 잎이 나와서 더욱 운치가 있었다. 우심부락을 지나서 얼마를 달렸을까?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이 나왔다. 길이 끝나는 곳까지 차가 들어갔다. 등산로로 조금 올라가자 너덜겅이 있고 이현상 동지가 적의 매복에 돌아가신 빗점골이 나왔다. 초봄에 비가 많이 와서 내를 건너기가 힘들어보였다. 위로 올라가다가 큰 돌을 하나 놓고 뛰어서 내를 건넜다. 김영진만 카메라를 메고 따라왔다. 한 번 가본 길인데 사람 왕래가 없어서 희미하지만 더듬어갔다. 길을 잃은 곳에서 짐작으로 산죽을 헤치며 두 능선을 넘었다. 위에 바위가 보였다. 올라가자 세 바위가 있고 안이 널찍한 트 자리가 나왔다. 옆에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이 있던 트 자리라고 쓰여 있는 푯말이 두 곳에 꽂혀 있었다. 숨차게 올라와서 속옷이 땀에 젖어버렸다. 지퍼를 풀고 이현상 동지와 남부군 사령부 지도 일꾼들이 한때 머물렀던 트에 앉았다. 내가 있던 곳은 아니지만 지리산이라고 다를까? 60년 전에 이곳에서 트 생활을 하던 동지들을 상상해 보았다. 지리산 빗점골 첩첩산중이라 짐승소리만 들릴 뿐 고적했을 이곳! 트 안에도 붉은 전사들이 투쟁을 기획하고 지시하고, 조국애와 투지와 열정이 가득했으리라! 빗방울이 떨어졌다. 김영진은 트 안팎을 카메라에 담느라고 부산했다. 밑에서 동지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트를 뒤로하고 떠났다. 갈 때와는 달리 내려올 때는 길을 제대로 찾았다. 이현상 동지가 최후를 마친 장소를 바라보며 너덜겅을 가로질러서 차 있는 곳으로 왔다. 이현상 동지는 적구에서 전사하였다. 잡히기보다는 적탄에 잘 가셨다고 한마디 했다.

 대성골의 참사

 우리는 차에 흔들리며 내려왔다. 의신부락에서 좌로 굽어 들어갔다. 공터에 차를 세워놓고 대성골로 가는 능선 하나를 넘고 또 한 능선을 넘었는데 한창우 동지가 다리가 아파서 더는 못 걷겠다고 했다. 우리는 앉아 쉬면서 한창우 동지의 설명을 들었다.

 “능선 둘을 더 넘어야 대성골이 나옵니다. 여기도 대성골에 포함되고 동지들이 돌아가셨어요. 이인모 동지가 쓴 글에서 경남 빨치산이 2,000여 명 있었는데 대성골에서 3분의 2가 희생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참 많은 동지들이 대성골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경남도당위원장 남경우 동지와 부위원장 허동욱 동지를 비롯하여 경남도당 간부들이 돌아가시고 비무장 동지들은 물론 수백 명의 무장부대도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나는 어깨 부상으로 환자 트에 있다가 바위틈으로 기어서 포위망을 빠져 나왔어요. 대성골에서 살아나온 동무들은 몇 명 안 됩니다. 환자 트가 여러 곳에 있었는데 동무들은 환자를 두고 차마 못 가고 환자들을 지키다가 모두 전사했어요. 능선마다 기어오른 적들이 총탄을 퍼붓고 포 사격에 비행기로 폭탄을 떨어뜨리지…….”

 한창우 동지는 그날의 처절했던 광경이 떠오르는 듯 분노와 아픔을 토해냈다. 김교영 동지가 보충을 했다. 

 “이인모 동지는 대성골에서 도당 간부부장(전 하동 군당위원장) 심상태 동지가 복부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 ‘나는 아무래도 죽을 것 같다’고 권총을 꺼내 주어서 받았답니다. 이인모 동지는 총을 맞고 놈들에게 체포되었는데 권총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높은 지휘관으로 알고 들 것에 실어서 운반했답니다. 권총이 없었으면 눈 쌓인 험한 산에서 운반하지 않고 죽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데요. 제가 이인모 동지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 심상태 동지가 이인모 동지를 살렸지요. 그 당시 놈들은 환자들을 현장에서 다 사살했습니다.”

 피아골 산장 김교영 동지

 우리는 날이 저물어서 돌아 나왔다. 박순자 동지가 전화로 예약해 놓은 피아골 산장 숙소로 갔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옮긴 우리는 짐을 풀어놓고, 김영진은 카메라 장치를 했다. 김교영 동지가 대성골에서 못다 한 내용을 보충했다.

 “전날 경남도당은 거림이골에서 도당조직위원회를 소집했습니다. 소조편성, 비상선 1,2,3,4선 및 군호 정하는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도당 일꾼들이 공세가 끝날 때까지 함께 몰려다닐 게 아니라 2개 조로 나누어서 활동하기로 결정을 보았습니다. 제가 1조 조장을 맡게 되었어요. 우리 1조는 그 날 대성골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 인민위원회 사무장 허규왈 동지로부터 도당부위원장 조정래 동지가 소나무에 매달려 있다는 가슴아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능선으로 올라갔습니다. 아! 조정래 동지 외 네 동지를 소나무에 목을 달아놓고 밑에 불을 질렀대요. 반쯤 탔더군요. 분노에 치가 떨렸습니다. 우리는 눈물을 삼키며 동지들의 시신을 묻었습니다.”

 방안에 찬 물을 뿌린 듯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에 김영진은 김교영 동지께 그대로 앉아서 경력을 간략하게 들려주시라고 했다.

 “나는 함경남도 영흥군 인흥면 포하리가 고향입니다. 아버지 김순삼, 어머니 방방화, 두 분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27년 12월 19일생입니다. 인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영흥 명륜중학교에 다니다가 중퇴하고 북청공업학교에 다니다가 또 가정형편으로 중퇴했습니다. 아버님은 일제 때 25년을 지주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셨고 농조에서 활동하셨습니다. 해방 후 가정환경이 좋았기 때문에 46년 6월에 공산당에 입당했어요. 2대 면민청위원장으로 있다가 1950년 7월에 하동군 민청부위원장으로 남파되었어요. 9.28 후퇴 후에 입산하여 1951년 1월에 도민청 선전부장으로 있었습니다. 2월에 황매산 블록책으로 잠깐 나가 있다가 돌아와서 도민청 선전부장으로 복귀했고요. 52년 도당 직속 정치문화공작대 대장, 57사단이 기동투쟁을 나갔을 때 구국연대 연대장을 했습니다. 52년 2월에 도민청부위원장으로 다시 민청사업을 하게 되었어요. 3월에 도민청위원장으로 있다가 52년 5월에 독립8지대 정치부 선전부장으로 있었고, 53년 3월에 박문학 부대 정치위원으로 있다가 그 해 9월 1일에 경남 북부지구당 선전부장으로 덕유산에서 활동했습니다. 박찬봉 동지가 지구당 위원장이고 당시에 도당위원장은 조병하 동지입니다. 1953년 11월말에 노영호 부대가 창설되었어요. 덕유산에서 당 중앙위원회 111호 결정서를 가지고 지리산 도당연락부에 전하고 돌아오다가 분산되었어요. 함양군 서상면인가, 어느 바위틈에서 자다가 수색대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코를 몹시 곯았던 모양입니다. 수색대원이 코고는 소리를 듣고 왔답니다. ‘당신은 코를 곯아서 살았다.’고 하데요.”

 우리는 밤이 늦어서 곧 잤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하고 떠났다. 피아골 산장 주인 내외분이 극진했다. 

 화개장터

 화개장터에 가서 차를 세웠다. 허찬영 동지가 설명을 했다.

 “1951년 8월 15일 57사단 창설 직후에 기념투쟁으로 이곳 지서를 깠습니다. 십자가가 보이지요? 그곳에 지서가 있었습니다.”

 송송학 동지가 이의를 제기했다. 

 “지서는 내 동쪽이 아니라 서쪽 여기에 있었습니다.”

 허찬영 동지는 아니라고,

 “내 동쪽이 분명합니다. 저 뒷 고지에 보루대가 있었고 보루대를 먼저 까고 지서를 점령했구요. 지서를 불질러버렸습니다.”

 그때 지팡이에 의지한 노인 한 분이 지나갔다. 정부영이 인사를 하고 고향이 이곳인지 여쭈었다. 그렇단다. 82세인데 평생을 고향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옛날에 지서가 어디 있었느냐고 물었다. 내 동쪽에 있었는데 타 버려서 이쪽에 지었다고 했다. 우리는 화개장터를 떠났다.

 악양 전투

 악양면 소재지에 갔다. 지서 앞에서 한창우 동지가 설명을 했다. 

 “1951년 11월 말입니다. 우리 경남유격대는 57사단에서 불꽃사단으로 개편을 하고 첫 전투를 악양으로 나왔습니다. 악양은 들이 넓고 하동군에서 제일 풍족한 면입니다. 겨울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서 불꽃사단 3, 5, 7, 9연대까지 경남무력이 총동원 되었어요. 이 지서를 겹겹으로 싸고 정규군처럼 싸웠습니다. 3일 동안 싸웠지요. 사방에서 총을 쏘았습니다. 특히 옆에 있는 학교 지붕 위에 올라가서 사격을 많이 했어요. 동무들은 산에서 만든 지뢰를 지서 담 밑에 갖다놓고 폭발시켰습니다. 그때는 지서라고 해야 건물이 아니고 보루대 안에 있었어요.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한쪽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불길이 솟고 위력이 대단하데요. 겁에 질린 적들이 보루대에서 기어 나오는데 그만 정면에서 사격을 했습니다. 내놓고 쳐야 하는 것을, 경찰들이 보루대로 달아났습니다. 나는 담을 넘다가 어깨에 총을 맞았어요. 외각에 있던 동무들은 반동들의 창고에 쌓아놓은 벼를 농민들을 동원시켜서 지리산으로 수백 가마를 운반했습니다. 지서 보루대만 못 먹고 3일 후에 철수했어요. 1951년 12월 공세가 이미 시작된 것을 모르고 큰 작전을 했습니다. 지리산까지 운반한 식량을 다 뺏겼습니다. 악양 농민들은 지리산에 식량을 지고 갔다가 국방군에게 많은 분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는데 우리 동지들도 여러 명이 전사하고 부상을 당했습니다.”

 설명을 마친 한창우 동지는 다 변해버린 주위를 둘러보았다. 

 청학동 삼성궁 뒤 무덤

 우리는 하동읍을 거쳐서 묵계리에 갔다. 한동안 불꽃사단 사단 본부와 몇 개 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곳이라고 송송학 동지가 설명했다. 되돌아 나와서 청학동으로 들어갔다. 기와집 여러 채가 보였다. 불교와 토속종교가 어우러진 곳이다. 유교도 한 몫 하고 있는 듯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우리는 삼성궁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7,8년 전에 왔을 때와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노인 외에는 입장료를 5,000원씩 받고 있었다. 들어가는 길과 나오는 길을 별도로 만들어놓고 돌로 길 양편을 쌓아 놓았다. 꼬불꼬불 들어가는 길  옆에 조형물이 있고 작은 굴도 만들어놓았다. 꽤 큰 피라미드형의 탑이 돌담 안에 있고 재를 넘어가자 삼성궁이라는 현판이 작은 문 위에 걸려 있었다. 문을 열고 토굴을 지나서 밖으로 나가자 눈 아래 여러 채의 기와집이 보이고 크고 작은 탑이 수없이 늘어서 있었다. 우리는 삼성궁 위 산비탈을 올라가서 빨치산 7명이 묻혀 있는 돌무덤 앞에 갔다. 비문이 없는 표지석이 묘 옆에 서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묻혀 있는 동지들은 물론 지리산에서 전사하신 전체 동지들의 명복을 빌었다. 내려오다가 한풀이 민속종교 교주와 만났는데 흰옷에 머리와 수염을 기른 교주는 동지들을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박순자 동지가 소개했다. 인상이 좋았다.

 중산리 견벽청야

 우리는 나와서 점심을 먹고 시천면 내대리 거점이골 중산리에 갔다. 이 일대에 경남도당부와 무장부대와 기관들이 있었다고 한다. 골이 어지간히 깊었다. 위에 관광버스 몇 대가 있고 넓은 주차장에 승용차 여러 대가 있었다. 층 높은 콘도도 있고 집마다 거의 민박이었다. 천왕봉에 오르는 길목이라 사람들의 왕래가 많다고 했다. 위쪽 산기슭에 빨치산 전시관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저들의 선전용이라 그렇고 특히 1963년 11월 12일까지 산에 있다가 이홍이 동지는 즉사하고 적탄에 다리뼈가 부서져서 체포되었던 정순덕 동지의 사진이 걸려 있어서 마음을 아프게 했다. 또 하나 눈길을 끈 것은 백선엽이 빨치산 토벌사령관으로 있을 때 堅壁淸野 전술로 승리했다고 뻔뻔스럽게 액자를 걸어놓았다. 남쪽 큰 산 골짜기 골짜기마다 사람이 사는 집에 불 지르고 아이, 어른 가리지 않고 학살한 견벽청야 전술을 지금도 자랑하는가. 제 놈들은 발에 가시만 박혀도 아파하면서 혈육을 잃고 살림살이와 집이 불타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던 그 많은 사람들의 피맺힌 고통을 알기나 하는가? 그에 대한 죄의식이 없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중산리를 떠났다. 정순덕 동지의 고향에 가보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가는 도중에 외공리 민간인 학살현장에 가기 위해서 길가에 차를 세웠다. 어린이를 포함하여 400여 명이 군경에 의해서 학살된 곳이라는 푯말이 있었다. 막 올라가려는데 과수원 쪽에서 아주머니 두 분과 남자 한 분이 내려왔다. 이장이라고 했다. 학살지를 묻자 위쪽에 있는데 구덩이를 파서 유골을 경남대에 옮겨놓았다고 했다. 어른들에 의하면 1951년 2월경에 진주, 진양 지역에서 싣고 온 분들과 이 근방에서 살던 분들이 죽었다고 들려주었다. 아기들에게 총을 쏘다니, 한 핏줄인 것을.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다. 

 달뜨기산을 바라보며

▲ 박현희 아버지 박관수 선생이 계셨던 달뜨기산. [사진제공-임방규]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덕교리 다리 옆 웅석봉(달뜨기산)이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웠다. 김교영 동지가 설명을 했다.

 “우리 동지들이 북부로 갈 때나 야지투쟁을 나갈 때 달뜨기산에서 하루나 이틀씩 쉬었다 가곤 했습니다. 현희 아버지 박판수 동지가 진양군당위원장, 진주시당위원장을 겸직하고 계실 때 달뜨기산에 거점을 두고 활동 하셨습니다.”

 달뜨기산을 바라보며 “아버지! 아버지!” 현희가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현희가 왔구나 하고 달려오실 것만 같은 아버지. 달뜨기산에 아버지 모습이 겹쳤으리라. 현희가 서럽게 울어서 눈물이 넘칠 뻔했다. 
 
 정순덕 동지가 살았던 귀틀집

▲ 정순덕 동지가 살았던 귀틀집. [사진제공-임방규]

 정순덕 동지가 살았던 마을로 구불구불 골짜기를 따라서 차가 달렸다. 그리도 깊은 산중에서 살았던가? 아마 3,40분 달린 것 같다. 차가 멈췄다. 안내원리에 왔단다. 새로 지은 집들이 고급스럽다. 별장인 듯. 박순자 동지가 마을에 갔다가 와서 안내원리는 더 가야 나온단다. 우리는 차에 탔다. 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좁은 길로 산모퉁이를 돌아가자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분이 정순덕 동지의 옛 집을 알려주었다. 잘 지은 집 옆으로 좀 올라갔다. 마루는 찌그러지고 녹슨 자물쇠가 걸려 있는 문살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벽지가 너덜거리는 방 한 칸짜리 귀틀집이었다. 통나무를 엇쌓아 놓고 흙을 바른 작은 집인데 둘러보아야 문은 하나밖에 없고 밖에 아궁이가 있었다.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가 짐작이 갔다. 동지들은 더러 앉고 서서 정순덕 동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1951년 초로 기억됩니다. 어느 날 보초가 한 여성을 데리고 왔어요. 머리를 뒤로 질끈 맨 작은 여성인데 소녀 같기도 하고 몇 마디 물어보았습니다. 남편이 산에 있는데 함께 싸우려고 왔대요. 체구는 작은데 당차게 보였습니다. 정순덕 동지는 신원이 확실했기 때문에 사령부 취사부에 배치했습니다. 어려운 때 잘 싸워서 그 후 무장부대에 배치되어 총을 들었습니다. 대원으로 있다가 분대장으로, 내가 구분대장으로 있을 때 정순덕 동지가 부구분대장으로 있었습니다. 날쌔고 용감했습니다.”

 한창우 동지가 정순덕 동지와 함께 싸웠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편의투쟁을 할 때 동무들이 국군복으로 갈아입고 노획한 트럭을 타고 가는데 정순덕 동지가 하도 작아서 적들이 의심할까봐 앉도록 했답니다. 정순덕 동지는 산에서 우리글을 배웠습니다.”

 김교영 동지가 보충했다. 박순자 동지도 정순덕 동지와 산에서 감옥에서 석방된 후에 가깝게 지낸 동지요. 민경옥 동지도 잘 알지. 송송학 동지, 허찬영 동지, 이창근 동지도 경남부대에 있었기 때문에 정순덕 동지와 아는 사이다. 나 또한 정순덕 동지와 응암동 악세사리 가공공장에서 함께 일했던 사이다. 다 정순덕 동지와 각별했던 동지들이다. 정순덕 동지가 살았던 귀틀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나보다 두 살이나 적은 것을. 아직 살아 있을 나이인데, 가버린 정순덕 동지가 눈 앞에 어렸다. 귀틀집을 돌아보며 떠나왔다. 사람이 태어나서 정순덕 동지처럼 고생한 분이 세상에 몇 사람이나 있을까? 아픔이 파고들었다. 동지들 모두가 정순덕 동지를 생각하는 듯 차 안이 조용했다. 

 손광일 부대장의 최후

 우리는 갔던 길로 되돌아 나와서 대포리에 갔다. 한창우 동지가 마을 위로 안내했다. 

 “1953년 8월이에요. 손광일 부대장이 돌아가셔서 시신을 이곳에 묻었는데 놈들이 파갔습니다. 동지의 시신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손광일 동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게 아픕니다. 밤에 저 큰 길 양쪽에 부대를 매복시켜 놓고 한밤중에 매복부대를 점검하기 위해서 불쑥 나타났다고 합니다. ‘누구야? 군호 대라! 군호 대라!’ 자신이 정해서 알린 군호를 깜빡 잊은 듯 군호를 못 대고 머뭇거리다가 ‘나요, 나, 나!’ 라고 하면서 다가오자 동무가 총을 갈겼습니다. 그날따라 구름이 꽉 끼어 있어서 먹뿌린 듯 깜깜했대요. 손광일 동지는 동지의 총에 맞아서 희생되었습니다.” 

 원통한 일이었다.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대원사 골짜기 위의 식당

 차는 불을 켜고 달렸다. 저녁식사는 정한 곳이 없었다. 가다가 적당한 식당이 나오면 먹고 잘 판이다. 불빛에 민박집은 보이는데 식당이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식당이 나타났다. 들어가려는데 현희가 아는 식당이 있단다. 앞장섰다. 겨우 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좁은 길로 대원사를 지나서 한없이 올라갔다. 골짜기로 한 시간 가까이 올라간 듯싶다. 재 위에 식당이 나타났다. 우리는 들어가서 짐을 풀어놓았다. 식당 겸 민박집이었다. 전화도 없이 손님들이 들이닥쳐서 찬을 마련하는데 시간은 좀 걸렸지만 산나물에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널찍한 식당에서 밥상을 치워놓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살아오신 경력을 간략하게 들려주시지요.”

 정부영의 요구에 박순자 동지는 자세를 바로하고 입을 열었다.

 “제 고향은 경남 하동군 경천면 진대리입니다. 위로 오빠 세 분이 있고,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경천국민학교에 다녔구요. 해방 후에 오빠들이 좌익에서 활동하셨는데 작은 오빠의 주선으로 심상태 동지와 결혼하기로 1947년 3월 11일 날까지 받아놓았다가 동지가 야산대를 조직하여 입산하는 바람에 식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저도 47년 말에 야산대에 들어갔구요. 48년 초에 부산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처음에 과자공장에서 일했고 베 짜는 방직공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1950년 4월에 진주로 갔어요. 며칠 동안 친척집에 있다가 경계가 삼엄한 때라 길 아닌 곳으로 밤에 걸어서 고향으로 갔습니다. 이웃집 골방에서 6.25를 맞았어요. 그 해 7월 20일 하동에 인민군대가 들어왔어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말로는 못해요. 심상태 동지도 살아서 돌아왔구요. 심상태 동지는 하동군 군당위원장으로, 나는 50년 8월 초에 입당하고 하동군 여맹 조직지도원으로 눈코 뜰 새 없이 일하다가 9.28 후 지리산으로 입산했습니다. 1952년 하동군 여맹조직부장, 52년 말에 군여맹위원장, 53년 도연맹지도원으로 있다가 54년 1월 13일에 변절자(도 조직부 부부장)에 의해서 체포되었습니다. 54년 3월에 사형구형에 15년 언도를 받고 감옥에서 11년을 살았습니다. 65년에 출소했고 66년에 박판수 동지의 소개로 최상원 동지와 결혼했어요. 딸 둘을 두었습니다. 많이 부족합니다만 쉬지 않고 일했어요. 범민련 결성 후에는 범민련에 몸 담고 있습니다.”

 하문석 동지는 돌아가시고 말 못하는 아내만 사는 집

 다음 날 25일에 일찍 일어나서 김교영 동지는 가까운 곳에 산에서 함께 싸웠던 하문석 동지의 집이 있다고 했다. 동지는 돌아가시고 부인이 혼자 살고 있는데 잠깐 다녀온다며 현희 차를 타고 떠났다. 얼마 후에 동지들이 돌아왔다. 

 “옛집이 없어지고 새집을 현대식으로 잘 지어놓았더군요. 하문석 동지의 부인이 말을 못하는 벙어립니다. 손짓몸짓으로 의사를 교환했는데 사위가 지어주었대요. 흐뭇했습니다. 하문석 동지는 여수 14연대 출신으로 구 빨치산입니다. 입산 초기에 충남 가야산 부대 참모장으로 있다가 경남으로 와서 북부지구당 조직부장으로 있었어요. 내가 선전부장으로 있었구요. 참 가깝게 지냈습니다. 적탄에 왼팔을 잃고 외팔인데요, 매사에 본이 되었고 적극적인 동지였습니다. 공주형무소에서 징역을 15년인가 살고 나와서 요 밑에 대원사 절에서 정식 총무는 아닌데 총무 일을 맡아보았답니다. 빨치산에 징역을 살았지, 불구에다가 돈 없고 이 사회에서 장가를 제대로 가겠습니까? 말 못하는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부인이 부지런하고 억척이었답니다. 산나물을 뜯고 약초를 캐다가 팔아서 육남매를 다 가르쳤습니다. 하문석 동지는 정신이 멀쩡한데 살아가자니 오죽했겠어요. 술을 자주 마셨고 술이 과해서 일찍 가신 듯합니다.”

 김교영 동지의 말 속에 그리운 정이 묻어나왔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동지들 모두가 애석하게 여겼다.

 대원사와 골짜기의 매복전

 우리는 아침을 먹고 떠났다. 대원사 앞에 차를 세웠다. 경내에 들어갔다. 여승들만 있는 절이라고 했다. 6.25전에 박판수 동지가 이 절에 몸을 숨기고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단다. 깨끗한 절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허찬영 동지가 카메라 앞에서 설명을 했다. 

 “산기슭에 기와집이 있지 않습니까? 1951년 1월 말에 그곳에 천막을 쳐놓고 노영호 부대 사령부가 20여 일 동안 있었어요. 무장부대들은 앞뒤 능선에 있었구요.”

 우리는 대원사를 떠났다. 버스정류장까지 갔는데 송송학 동지가 매복전을 통해서 전과를 올린 곳을 지나쳐 왔다고 해서 차를 돌렸다. 왔던 길로 1킬로미터쯤 올라가서 차를 세웠다. 

 “내 이쪽 저쪽에 손광일 부대가 매복하고 있었어요.”

 내가 굽어 돌아가는 곳이다. 길 또한 굽어 있어서 매복하기에 좋은 지형이었다. 

 “선두를 보내놓고 때렸는데 지리산 밑이라 경각성을 높이고 왔을 테지만 불시에 매복에 걸려든 놈들은 맥을 못 추고 길 아래로 구르데요. 도망갈 곳이 내밖에 더 있어요? 그때는 산죽이 조금 있고 나무가 거의 없었어요. 국방군인데 중경기가 불을 뿜고 내 양쪽에서 퍼붓는 총탄에 무더기로 쓰러졌습니다. 동무들은 일제 사격을 하고 돌격을 했습니다. 속전속결은 빨치산 전법의 기본이 아닌가요? 벼락같이 치고 수습해서 신속하게 빠졌지요. 그날 M1 30여 정을 노획했어요. 큰 전과지요.”

 한창우 동지의 설명을 듣고 차가 돌아나왔다. 

 여섯 살 난 현희가 엄마 따라서 입산한 평촌마을

 한참 달리다가 차를 세웠다. 김교영 동지가 설명을 했다. 

 “여기가 산청군 삼장면 평촌부락입니다. 현희! 기억나나? 현희가 어머니랑 여기에 있었어. 여섯 살 난 현희를 이 마을에서 처음 보았구만.”

 “예! 기억납니다. 이 마을이에요. 소도 많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무엇인지 철없던 나는 어른들 모두가 사랑해 주셨구, 눈구덩이에 뛰어다니던 기억이 납니다. 곶감도 먹구요. 그 해 눈이 많이 왔어요. 한번은 어머니와 어른들을 따라서 높은 산에 올라가는데 그만 미끄러져 낭떠러지로 떨어지다가 가랑이가 나무에 걸려서 살아난 기억도 납니다. 무서워서 많이 울었어요.”

 우리 가족들은 아이들도 무척 고생을 했다. 우리는 평촌에서 떠났다. 

 덕교리 매복 작전

 덕교리 앞에 차를 세웠다. 김교영 동지는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매복 장소가 아니란다. 차를 타고 1킬로미터쯤 더 갔다. 여기도 아니라고 차를 돌렸다. 이곳 매복전에서 부상당한 한창우 동지도 모르기는 매일반이었다. 몇 년 전에 와본 곳인데 길이 새로 나고 길 양쪽에 집들이 들어서서 영 모르겠다고 김교영 동지는 머리를 젔다가 무슨 표적을 본 것인지 차를 세웠다. 동지들이 언덕으로 올라갔다. 큰 산에서 뻗어 내린 작은 능선을 보고 매복했던 곳이 여기라고 했다. 

 “1952년 길 위쪽으로 동무들이 길게 매복을 했어요. 그때에도 저 마을이 있었습니다. 길 가 집에 지휘부가 있었어요. 들 건너 저쪽 산기슭에도 병력을 얼마간 배치했구요. 길을 따라서 들어오던 적의 선두가 지휘부를 지났을 때 이영회 부대장이 쏜 총성을 신호로 일제히 퍼부었어요. 저들은 길 밑으로 굴러서 도망쳤습니다. 국방군인데 그날 엄청나게 많은 병력이 들어오고 있었어요. 들이 넓지 않습니까? 일부 병력이 들로 들어오고 건넛마을 뒷산으로 올라가데요. 이쪽 산으로도 오르고요, 화력이나 수적으로 비교가 안 되는 우리는 호랑이처럼 덮치고는 철수했습니다. 유리한 위치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쳤기 때문에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안겨주었습니다. 1951년 초까지 이 지역 일대가 해방구였습니다. 밀리고 밀고 크고 작은 전투를 여러 번 했어요.”
 한창우 동지의 설명을 듣고 그곳을 떠났다. 

 하문석 동지의 딸

 가다가 당천면 소재지에서 하문석 동지의 딸이 운영하는 미장원에 들렸다. 말 잘하고 빠진 구석이라고는 없는 어엿한 여인이었다. 동지의 딸이요, 아버지의 동지들이라 처음인데도 어색한 점이 없이 집안인 듯 모두가 반가워했다. 박현희는 외가 동생이 생겼다고 좋아하면서 수첩에 전화번호를 적었다. 동지의 딸은 아버지의 동지 분들인데 이렇게 가시면 서운해서 어떻게 하느냐고 매달렸지만 갈 길이 먼 우리들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났다.

 희숙이 아버지(정철상) 전 부산시당위원장 묘에 성묘하다

 서울로 가는 길 초에 비합시기 부산시 당 위원장이던 희숙이 아버지(정철상) 묘가 있어서 몇 가지 제물을 샀다. 우리 차는 산청에서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함양을 지나서 지곡면으로 들어갔다. 함양군 지곡면! 문상구의 고향이 아닌가? 숨을 거두면서 내 이름을 그렇게도 부르던 상구! 상구는 나의 동지요, 절친한 벗이었다. 상구가 죽었을 때 깊이 간직하고 다녔던 인민공화국기를 상구 가슴에 덮어주고 묻었다. 출옥 후에 두 번 가서 부근을 더투었지만 상구 묘를 못 찾고 말았다. 함양이 고향인 몇 분에게 상구 가족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는데 아직도 모르고 있다. 다만 지곡면에 문씨가 많다는 말만 들었다. 어제 일인 양 상구가 눈 앞에 어려왔다. 큰 길에서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산 속 외딴집 뜰에 차를 세워놓고 걸었다. 소나무밭 양지 바른 곳에 묘가 있었다. 제물을 차려놓고 먼저 희숙이가 잔에 술을 따랐다. 모두가 함께 절을 하고 내가 한 말씀 드렸다. 희숙이가 주부라 전선에 뛰어들지 못하고 있지만 항상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 뜻을 이어가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희숙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곳에 찾아올 수 있겠습니까? 정세도 발전하고 있고 당신의 절절한 바람이 수삼년 내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딸이나 세상일 잊으시라고 생시인 듯 위로의 말씀을 드렸다. 햇볕 따사로운 묘위에 주변에 이름 모르는 작은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우리는 집안이 성묘 온 듯 다정하게 앉아서 음복도 하고 음식을 나누었다. 차는 온 길을 되돌아서 지곡면 소재지로 나왔다. 동지들은 ‘정희숙’ 정씨 가문이 살았던 지금은 문화재단이 관리하고 있는 여러 채의 기와집 중에서 처마 끝에 풍경소리 은은한 큰 기와집을 둘러보고 나왔다. 들 가운데 식당으로 갔다. ‘메기탕 전문집’이란 간판이 걸려 있었다. 이 고장에서 음식을 제일 잘하는 집이란다. 희숙이가 점심 대접을 했다. 얼큰한 메기탕에다가 맛있게 먹었다. 

 간략한 총화

 식사 후에 동지들이 밖에 나와서 쉬는데 정부영이, 이제 헤어지는데 전적지 답사에서 느낀 점을 짧게 말씀해 주시라고 말문을 열었다. 동지들이 한 분, 한 분 발언했다. 송송학 동지는 전적지 답사 계획이 잘못되었다고 시정대책도 없이 불만을 드러냈다. 다음으로 희숙이가 좋았던 점들을 말하고 한 가지, 의견이 있으면 제기해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핏대를 올리고 큰 소리를 지른 것은 뜻밖의 일이며 실망했다고 고쳐야 할 핵심을 제대로 지적했다. 나는 일을 하다보면 결함이 나타나고 결함은 시정하면 되고 나이 먹으면 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되지 말자고, 수많은 동지들이 목숨을 걸고 싸운 역사적인 사실을 되도록 많이 정확하게 모으는 작업은 살아남은 우리들의 의무라고, 이 일에 개개인이 어떻게 이바지할 것인가 찾아보자고 했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 것인가? 다 팔십이 넘었는데 인생의 최후를 뜻있게 장식하자는 말로 마무리 발언을 했다. 

 우리는 서로가 손을 꼭 쥐고 아쉽게 작별인사를 했다. 차 한 대는 서울로 한 대는 부산으로 떠났다. 정부영은 아버지 제삿날이라고 함양에서 떨어졌다. 허찬영 동지, 이창근 동지를 대전에 내려놓고 8시가 지나서 차가 양재역에 도착했다. 영진은 가고 김교영 동지와 나는 전철 3호선을 탔다. 동지들 모두 연세가 많은데 2박3일 동안 고생하셨다. 부영이와 영진은 운전을 하고 사진 찍고 일을 추리느라고 애썼다. 현희와 희숙이, 김교영 동지, 대전의 두 동지가 지원해서 경비를 절약했다. 3일 동안 차를 타고 또 걸어서, 피곤할 것 같은데 아니다. 지리산 골짜기마다 봉우리와 능선에서 영웅적으로 싸우다 전사하신 동지들을 느끼고 와서 그런 것인지 머리는 맑고 팔팔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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