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민족자주문제와 통일문제에 천착해 온 노중선 <통일뉴스> 상임고문의 ‘역대 국회와 통일문제 논의’를 연재한다. 필자는 제헌국회에서부터 20대 국회에 이르는 역대 국회에서 통일문제와 관련한 논의들을 ‘민족화해와 자주통일’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아울러 필자는 향후 국회가 평화통일과 민족자주 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의를 거쳐 민족화해시대에서 분단 극복을 위해 자기 역할에 적극 나설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 연재는 매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12. 제12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1985.4~1988.5)

제12대 국회는 1985년 2월 12일 실시된 총선에 의해 구성되어 그 해 4월 개원되었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전두환의 장기집권 음모를 막아낼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여야합의에 의해 헌법을 개정하게 되어 12대 국회는 3년 임기로 마감해야했다.

국회는 1985년 6월 1일 <남북국회 회담 제의에 따른 서한 발송에 관한 결의안>을 가결했는데, 이는 같은 해 4월 9일 북측 최고인민회의의 남북국회 회담 제의에 대한 답신으로 남북국회 회담 개최에 관한 제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쌍방국회의원 각 5명이 참가하는 예비접촉을 7월 중 판문점에서 갖자(주1)고 한 것에 대한 국회 결의였다.

이와 같이 북의 최고인민회의와 남의 국회가 서로 국회 차원의 접촉 제의들을 받고 주면서 합의한 끝에 1985년 7월 23일 남북국회 회담 실현을 위한 남북대표단 예비접촉이 성사되었다. 그리하여 남측 대표단 수석대표였던 권정달 의원은 7월 26일 국회본회의에서 ‘남북국회 회담 제1차 예비접촉에 관한 보고’를 하였다. 이 때 권 의원은 예비접촉이 이루어지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난 뒤, 남북 각 5명의 대표와 4명의 수행원이 회담에 참가하였고, 회담은 당일 오전 10시부터 2시간 12분 동안 내외신 기자 200여명에게 공개된 채 개최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회담에서의 남측 제안 내용, 북측 제안 내용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회담형식, 대표단 규모, 회담장소, 회담일시, 2차 예비접촉일 보도 및 기록 절차들에 대해 합의했다고 하였다.(주2)

이어서 1985년 9월 25일에 개최되었던 제2차 남북국회 회담 예비접촉에 관해서는 10월 10일 권정달 의원에 의해 국회에서 보고되었다.
 
이 날 “2차 접촉은 1차 접촉 때와는 달리 비공개리에 진행되었고 주된 논의의 초점은 제1차 예비접촉에서 쌍방 간에 합의를 보지 못한 본회담의 의제문제 수석대표의 급 문제 및 제1차 본회담의 장소문제를 여하히 결정하느냐 하는데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남측은 “남북 국회회담의 의제 문제와 관련하여 통일헌법을 기초하기 위한 민족통일협의회기구를 구성하는 문제와 이에 따른 통일기반 조성에 필요한 사항을 남북 국회회담의 의제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며 북한 측이 주장하는 불가침에 관한 공동선언문제를 남북 국회회담의 의제로 상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며 “진실로 남북 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목적으로 우리 측과의 불가침선언을 채택하고자 한다면 구태여 남북 국회회담에 그 문제를 상정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밟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북한 당국으로 하여금 우리 정부 당국이 요구하는 회담에 빨리 동의하도록 촉구하는 한편 불가침문제를 포함하여 남북 간의 긴장완화와 신뢰조성문제가 단순한 약속이나 선언만으로 끝나지 않고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북측은 “우리 측의 ‘통일헌법을 기초하기 위한 민족통일협의회의 기구 구성문제’와 함께 북한 측이 제의한 ‘불가침에 관한 공동선언 발표문제’도 의제로 다 같이 선정하자는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북한 측이 불가침문제를 의제로 포함시키자는 이유는 남북 간에 긴장상태를 해소하고 전쟁을 방지하는 문제는 나라와 민족의 운명과 관련된 중대한 과제로서 이는 북한 측이 내놓은 평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현실적인 방안의 일환이라고 전제하면서 국회회담에서 불가침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불가침을 위한 해결방향과 원칙을 정하여 당국자회담에서 실질적인 집행조치를 담은 불가침선언을 채택토록 촉구하는 공동선언을 하게 되면 이는 행정당국에 의무성과 법적담보를 주게 된다고 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만이 국회와 같은 권위 있는 정치기관의 기능에도 맞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수석대표의 급 문제에 있어서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국회의장이 아니면 최소한 부의장으로라도 해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하였으며 제1차 본회담의 개최 장소문제에 있어서도 평양을 계속 고집하는 입장을 취해 왔다”고 하였다.(주3)

그리고 1986년 10월 13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유성환 의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 우리나라의 국시를 반공으로 해 두고 과연 앞으로 다가올 올림픽 때 동구 공산권에서 대거 참가하겠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우리의 무역이 온 세계 , 지구 위에 있는 모든 나라와 무역을 해야 되는데 반공을 국시로 해 두는 것이 과연 국익에 합당하겠습니까
… 국가의 이익을 거시적으로 볼 때 우리의 국시는 반공보다는 통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강대국들의 한반도 현상 고착 정책에 많은 국민들은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 통일은 한민족 전체의 꿈이며 신앙입니다. 국가 정책, 사회 기풍 모든 역량을 통일에 집중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위대하고 영원한 화해는 통일입니다. …”(주4)

이에 대해 10월 15일 법무부장관 김성기의 명의로 ‘국회의원(유성환)체포동의요청서’가 국회에 제출되었는데 그 이유 설명’에서 다음과 같이 적시하고 있다.
 

“유성환의원은 제131회 정기국회 본회의시 사용할 대정부 질의원고를 작성함에 있어

⬡우리나라의 통일정책과 관련하여 :
–‘이 나라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
-‘통일이나 민족이라는 용어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보다 그 위에 있어야 한다’라고 하여 공산화 통일도 용인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고,

⬡인천사태와 관련하여 :
-‘인천사태는 독점재벌위주의 경제정책과 민중수탈에 대한 민중의 처절한 생존권 투쟁이며’ -‘한반도 분단과 강대국의 현상고착 정책에 대한 민중의 자발적 자주적 통일투쟁이었다’라고 하여 인천 소요사태를 일부 계층에 의한 국민수탈과 외세의 민족분령 정책에 대한 정당한 투쟁이라고 왜곡선전하고,

⬡삼민이념에 관하여 :
-‘학생운동의 본질인 삼민이념은 반외세민족자주와 반독재 민주화 및 민중생존권 투쟁이다’라고 왜곡 미화하여 비호하는 등 북괴의 상투적인 대남 모략선전에 부합하는 내용을 기재한 다음 배포한 바 있습니다.

⬡이는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 소정의 이적동조행위에 해당되며 이 사건을 수사한 서울지방검찰청에서 서울형사지방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하였고 체포동의 요구서를 정부에 제출하여 왔으므로 정부는 국회법 제28조의 규정에 따라 동 의원의 체포동의를 국회에 요청하기에 이른 것입니다”(주5)

그리하여 국회는 10월 17일 <국회의원(유성환) 체포동의안>을 가결하여 현직 국회의원 유성환은 국회에서의 발언으로 말미암아 구속되어야 했고 구속 재판 후 9개월여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결국 1980년 5월 광주항쟁은 분단 상황에서의 반미 문제를 대중 의식 속에 드러내놓은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그것은 80년대 통일운동 활성화의 초석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80년대는 각 부문에서 통일논의와 운동이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그리고 정권 차원에서도 남북경제회담, 이산가족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 국제올림픽위원회 주선으로 남북체육회담 등 남북대화와 교류들이 분단 후 처음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국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서 비록 본회담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10차례의 ‘남북국회 회담을 위한 예비접촉’이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정작 국회에서의 통일논의는 그와 같은 남북 교류접촉의 활성화와 대중적 열망을 반영하지 못한 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6,70년대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대정부 질의에서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고 발언한 유성환 의원이 구속 재판에 회부됐던 사건이다.
 
이는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과 표결에 관해 국회 외에서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는 면책 특권 조차 국회 스스로 외면한 채 ‘통일’을 강조한 동료 의원의 구속을 동의해줌으로써 12대 국회는 치욕스런 오점을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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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25회, 國會本會議錄 제16호(1985.6.1) 417~420쪽

2. 제126회, 國會本會議錄 제1호(1985.7.26) 3~7쪽

3. 제128회 국회, 國會本會議會議錄 제1호(1985.10.10.) 6~10족

4. 유성환,『떨쳐 일어나소서 님이여 -國是波動의 眞相-』(창민사, 1988.3.15.), 46~47쪽

5. 제131회 국회, 國會本會議會議錄 제8호(1986.10.16) 113~114쪽

 

고려대학교 노동교육과정 수료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간사 겸 연구원
고려대학교 노동교육원 강사 역임
평화통일연구회 상임연구원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통일뉴스 상임고문(현)

저서
『民族과 統一』(사계절 출판사, 1985)
『4·19와 통일논의』(사계절 출판사, 1989)
『現段階 統一方案』(공저, 한백사)
『남북한 통일정책과 통일운동 50년』(사계절 출판사, 1996)
『남북대화 백서 - 남북교류의 갈등과 성과』(한울아카데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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