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판문점선언 후속 이행 논의를 위한 고위급회담 개최 예정일 새벽에 일방적으로 회담을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한국과 미국의 공중연합훈련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이유로는 태영호 전 공사가 지난 14일 국회에서 출판기념 기자간담회라고도 한다.

어떤 이유로든 통일을 비롯한 모든 일에는 진행돼 나가는 과정 자체가 이렇게 문제의 본질이 되어 버린다. 양자물리학자들이 처음으로 관찰 과정 자체가 결과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안 것 같다.

마리 퀴리 부인은 방사선을 발견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방사선에 자신이 노출돼 죽었다. 그녀는 방사선이 자기 몸을 해치는 줄을 모르고 실험을 한 것이다. 방사능에 과대 노출돼 재생 불량 빈혈로 죽고 말았다. 최근 가까운 한 분이 2년 전 위암을 발견하고 키모 세라피로 거의 완쾌를 했으나 키모 세라피 과정에서 백혈구를 너무 많이 죽여 버려 결국 백혈구 0인 수치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방사선 발견에는 성공했고 위암 치료에는 성공했지만 발견하고 치료하는 과정 그 자체를 몰랐거나 무시했기 때문에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과정이 결과를 결정하고 말았다. 목적 지향적 삶의 태도가 가지고 온 위험성을 알리는 경고이다. Being보다는 Becoming이 중요하고, 후자가 전자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서양 철학이 안 것은 최근이다. 이것을 안 철학에서 생긴 것이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Being에 집착하는 사고 유형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고 유형에 벗어나지 못하고 4차 산업에 진입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지금 통일을 목적으로 숨 가쁘게 달리고 있다. 판문점선언에 대한 국민 지지도가 80% 혹은 90% 이상인 결과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잠시 퀴리 부인의 예로 돌아가 한 번 생각해 보자. 방사능은 발견했지만 막상 발견 당사자는 그 방사능 때문에 죽는 역설이 생기지나 않을지 점검의 점검을 해야 할 것이다.

판문점선언 국회 통과 과정 그리고 트럼프가 북미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성사시킨다 하더라도 의회 통과라는 관문을 넘는 문제 등, 국내 여론 지지에 흥분할 때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운전자론이 성공을 거두는 것 같지만, 아직 마음 조이며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운전석에는 가속 장치와 제동장치 그리고 기어 장치가 있다. 속도에는 가속도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가속도는 속도의 속도로서 속도 자체에 따르는 속도이다. 이런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자동차의 기어 장치이다.

현대과학의 획기적인 발전은 수학에서 미적분을 발견한 이후부터이다. 속도와 관련하여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누가 먼저 발견했느냐의 논쟁은 뒤로 하고라도 운전석의 운전자에게는 반드시 알아야 할 사안이 바로 미적분학이다.

지금 한반도라는 거대한 물체가 움직이고 있다. 움직이는 물체의 속도를 측정하려면 우선 그 물체의 ‘위치position’를 알아야 한다. 한반도는 지금 4대 강대국들로 포위돼 있는 위치에 처해 있다. 위치를 안 이후, 극히 짧은 시간이 흐른 다음 어디로 움직일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물체가 이동한 거리를 경과 시간으로 나눈다. 이것이 속도 조절이다.

그런데 미적분학이 발견된 다음부터는 어느 물체가 가속화 되고 있는 경우, “그 결과는 계산을 위해 사용된 시간 간격에 따라 달라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 따옴표(“  ”) 안에 인용한 부분의 글이다. ‘계산을 위해 사용된 시간 간격’이란 위치 변화를 측정하는 시간 자체의 관계를 계산할 때 사용된 시간 간격이란 말이다. 이것은 ‘메타 시간’이다.

집에서 하루 사는 일과에 해당하는 시간표를 만든다고 할 때에 다름 아닌 이 시간표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도 계산을 하고 본래의 일과 시간표  속에 이 시간도 넣어야 한다. 과연 메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샌디가 3년 치에 해당하는 자서전을 쓰는 데 6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를 ‘샌디의 역설 Shandy's paradox’이라고 한다. 3년 치 자서전을 쓰는데 6년이 걸리다니. 이런 역설은 쉽게 발견된다. 24시간 용 시간표를 작성한다고 해 보자. 과연 시간표 작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경우에 따라서는 25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통일을 위해 쓰는 시간을 70년 이상 사용했다.

뉴턴 이전의 과학은 이 메타 시간을 몰랐다. 미적분학이란 바로 이 메타 시간을 아는 데서 출발하고, 이것이 현대 수학과 과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시간표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짧을수록 좋다.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은 이 메타 시간을 해결하는 데 뛰어난 직관력을 발휘해 현대 과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언 스튜어트의 말을 들어 보자. “계산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 간격(메타 시간 간격)은 짧아야 한다.” 통일 자체에 걸리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그래서 “쇠뿔도 단숨에 뽑아야 한다” 하지 않았던가?

염려와 우려가 앞을 가로 막고 있다. 어떤 과정이 결과를 엉망으로 만들지 우려와 염려가 앞서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과정 자체를 만들어 가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은 외세와 보수 언론이다. 과정 자체를 우리 자신이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통일은 항상 원점에서 맴돌 수밖에 없었다. 외세에 편승한 보수 정당과 언론들이 과정 자체를 언제나 좌지우지하고 말았다.

문재인 대통령 지금 기어 장치 없는 차의 운전석에 앉아있다. 부디 성공을 빌지만 퀴리 부인의 비극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 과학자의 희생으로 오늘날 방사능이 발견돼 의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거듭 부탁한다. 자율주행에 맡기시라고. 과정이 결과를 결정한 큰 사건이 바로 촛불이다. 

‘속도조절’을 두고 속도를 줄이고 올리는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큰 오해를 야기할 것이다. 이런 이해 방법은 매우 단순한 이해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속도 조절이란, 속도 자체를 자각하는 것이어야 한다. 성의정심 없이 그것이 극히 불가능하다.

아무래도 촛불을 다시 들어야 할 것 같다. 민중의 간절한 바람만이 과정이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2016년 초심으로 돌아 가 촛불 앞에서 성의정심 할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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