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전문가
 - 기형도

 이사 온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의 집 담장들은 모두 빛나는 유리들로 세워졌다

 골목에서 놀고 있는 부주의한 아이들이
 잠깐의 실수 때문에
 풍성한 햇빛을 복사해내는
 그 유리담장을 박살내곤 했다

 그러나 얘들아, 상관없다
 유리는 또 갈아 끼우면 되지
 마음껏 이 골목에서 놀렴

 유리를 깬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이상한 표정을 짓던 다른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곧 즐거워했다
 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
 주장하는 아이는, 그 아름다운
 골목에서 즉시 추방되었다

 유리담장은 매일같이 깨어졌다
 필요한 시일이 지난 후,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충실한 그의 부하가 되었다

 어느 날 그가 유리담장을 떼어냈을 때, 그 골목은
 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
 판명되었다, 일렬로 선 아이들은
 묵묵히 벽돌을 날랐다


 비행기를 놓친 사람이 홧김에 비행기에 폭탄이 있다고 허위 신고를 하여 비행기가 이륙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공적인 영역을 쉽게 침범하는 이 뻔뻔함,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일 것이다.

 사람들은 ‘정치 이야기’를 많이 한다. 옆에서 들어보면 공허하다. 그들의 삶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이 나라에 살지 않는다는 듯이 말한다. 그러니 이야기에 김이 빠진다. 혀를 끌끌 차며 푸념하다 서로 딴 곳을 바라본다.

 우리는 일찍이 ‘공사(公私)를 구분하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났다. 그래서 공인(公人)이 되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정치할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한다. 정치를 구경꾼이 되어 바라본다. 우리의 정치 이야기라는 것들은 구경꾼의 넋두리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중고등학교 시절 사회교과서에서 배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아리스토텔레스)’이다. 이 말은 사실 ‘인간은 폴리스적인 동물’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인간은   폴리스(아테네 도시국가)라는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 멋진 말을 ‘그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야!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사는 거야!’ 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며 ‘사회’라는 거대한 무언가에 복종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사회를 이끄는 정치인을 비롯한 전문가들에게 ‘필요한 시일이 지난 후,/-/충실한 그의 부하가 되었다’     
  
 우리는 사회 시간에 이렇게 배웠어야 했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국가, 지역사회, 직장, 학교, 가정...... .)에 권리와 의무를 갖고 참여해야 하는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들이 다니는 학교에 주인으로서 참여했어야 했다. 학교 운영을 교사, 학생, 학부모가 함께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우리는 국가 경영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시했을 것이다. 우리의 정치 이야기가 그렇게 공허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그가 유리담장을 떼어냈을 때, 그 골목은/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 판명되었다, 일렬로 선 아이들은/묵묵히 벽돌을 날랐다’

 우리는 정치를 할 줄 모르게 되었다. 정치 전문가들, ‘그의 집 담장들은 모두 빛나는 유리들로 세워졌다’는 과거 기억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다. 실상은 ‘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판명’ 되었는데도 그저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만 열중한다.

 ‘촛불 집회’는 공적 공간이었는가? 사적 공간이었는가? 둘이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흡사 그리스 아테네의 아고라 광장처럼 일상의 생활공간이면서 정치 토론의 공간이었다. 사사롭게 모인 사람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 국가 대사를 논하고 집행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공사(公私)는 구분이 되지 말아야 한다. 사람살이에 어찌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이 선명하게 나눠지는가? 잡답하다가 고도의 정치 이야기로 쉽게 올라가기도 하고 그러다 행동으로 옮겨지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의민주주의, 간접민주주의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민주주의는 오로지 직접민주주의일 뿐이다. 민주(民主)인데 민(民)이 어찌 남을 통해 정치를 해야 한단 말인가?

 청와대 국민청원 참여자가 20만 명이 넘으면 청와대, 정부의 각 부처가 공식적인 답변을 해야 한다고 한다. 직접민주주의 작은 시발점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극히 사사로운 말이나 행동에도 무게감을 느낄 것이다. 정치 이야기를 남의 나라 이야기하듯이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자각하며 주인답게 변모해 갈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가는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아리스토텔레스)’이기 때문이다. 

 토스토예프스키는 말했다. ‘우리는 아무도 누구를 심판할 수 없다. 내가 오늘을 정직하게 살았다면 그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행기를 사사로이 세운 ‘이상한 사람’ 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아프게 자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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