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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정상회담 30년 전 “미국 축출” 유서 던진 조성만 열사반미통일열사 조성만 열사 30주기에 부쳐
김삼석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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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15  1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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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석 (군사평론가, ‘반갑다군대야’ 지은이)

 

“사랑 때문이다. 내가 현재 존재하는 가장 큰 밑받침은 인간을 사랑하려는 못난 인간의 한 가닥 희망 때문이다. 이 땅의 민중이 해방되고 이 땅의 허리가 이어지고 이 땅에 사람이 사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한 알량한 희망, 사랑 때문이다.” - 1988년 3월 조성만 일기 중에서

조성만은 전북 김제시의 용암초등학교를 마치고 전주 서중학교와 해성고등학교를 거쳐 1984년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화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는 민주화와 한반도의 통일 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광주 5·18 민중항쟁 8주기를 맞아 민가협 등 재야민주단체 주최로 열린 ‘양심수 전원 석방 및 수배 해제 촉구 결의대회’의 열기가 뜨겁던 1988년 5월 15일 오후 3시 40분경이었다.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 4층 옥상에서 “양심수 가둬 놓고 민주화가 웬 말이냐!”, “공동올림픽 개최하여 평화통일 앞당기자!”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등의 목소리가 핸드마이크를 타고 약 1분간 흘러 나왔다. 그리고 이어서 흰색 한복을 입은 조성만이 손에 쥐고 있던 칼을 자신의 배에 꽂고 5장의 유서를 뿌리며 몸을 날렸다. 이내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조성만은 즉시 백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날 저녁 7시, 24년이란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5월 19일 낮 서울시청 앞에서 치러진 조성만의 장례식 노제에는 30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운집하였다. 그의 관이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들어섰을 때 8천명의 학생과 교수들의 시간이 멈춘 듯 했다. 그는 광주 망월동 묘역에 묻혔다.

두 동강 난 조국의 현실을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고, 사랑과 평화를 갈구하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던진 조성만(요셉)이 우리 곁을 떠난 지 30년이 되었다. 그는 멀리 하늘의 별이 되었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부활하여 늘 함께하고 있다.

“한반도의 통일은 그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막아져서는 안 됩니다. 한반도에서 미국은 축출되어야만 합니다.” - 1988년 5월 15일 조성만 열사의 유서 중에서

스무네 살 청년이 목숨을 던지며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와 과제는 30년 만인, 2018년 6월 비로소 북미 평화협정 체결과 수교,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이라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하나씩 현실로 되어가고 있다. 조성만 열사가 열사의 꽃이 된지 30년하고도 한 달 뒤 인 6월 12일, 세계사의 대격변을 장식할 북미 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린다.

조성만은 1964년 12월 전라북도 김제시에서 태어났다. 저와 같은 나이에 같이 활동했다. 조성만은 1987년도 명동성당청년단체연합회(명청연) 문화위원회 소속 가톨릭민속연구회 회원이었다. 저는 선교위원회 소속 가톨릭선교회 회원이었다.

저는 조성만에 대한 빚이 남다르다. 반평생을 조성만보다 더 살면서 조성만의 삶을 살아야 하겠구나 생각을 하며 일상을 살아왔지만 살아남은 자로서 빚만 잔뜩 진 채, 2018년까지 무얼 했나 싶다.

남다른 큰 빚은 이거다. 그는 저 대신 통일제단에 바쳐진 것이다.

1988년 5월 15일 그가 올라간 명동성당 교육관 4층 옥상은 사실은 제가 1987년 5월 먼저 올라갔다. 이른바 민주화의 대장정에서 21~23살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치고, 군사정부 타도를 외치고 서울대 사거리에서, 한강에서, 청량리 맘모스백화점 등에서 분신, 할복, 자결 등으로 투신해 제단에 줄줄이 바쳐지던 때였다.

동시대 같은 젊은이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제단에 표표히 자신을 던지는 것이었고, 그것이 당시 한 가톨릭 청년으로서 부활하는 것이라고 저도 받아들였다. 할복 투신 장소로 교육관 4층 옥상 모서리를 사전 점검했던 것이다. 한양대 인근 집 부근의 한양마트에서 과도를 사가지고... 그러나 아무 일 없이 일주일이 흘렀다.

명동성당 내 가톨릭 청년들은 1987년에도 5월 광주영령 추모제와 투쟁을 일주일동안 펼쳤다. 사람 키만 한 고성능 앰프를 미도파백화점으로 방향을 틀고서, 광주학살을 규탄하는 연설을 며칠 동안 해댔다.

이윽고 87년 5월 중순 명동성당 성모마당에서 열린 가톨릭 청년 5월 광주학살 진상규명 총궐기대회에 제일 마지막 순서로 제가 나섰다. 마이크를 잡고 “교황님과 추기경님께 바치는 글”을 낭독하고 “군부독재타도”, “미군 철수”를 외치면서 왼쪽 주머니의 과도를 꺼냈다. 이내 바로 기절했다.

사회자가 저의 낌새를 알아채고, ‘부~웅’ 날라서 저를 발로 차버린 것이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집회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청년회 지도신부님과 수녀님, 청년들이 눈물범벅이 되었다. 그 다음 주의 명동성당 주보 한 켠에는 조그맣게 한 청년의 자결 시도 소식을 전했다.

1987년의 5월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1988년 5월! 조성만 열사가 거사를 일으킨 소식은 제가 단기사병으로 입대한 신병교육대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찢어진 신문을 통해서 겨우 알았다. 조 열사의 투신할복 소식과 추모 투쟁 소식이 가뭄에 콩 나듯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아 나보다 먼저 가다니” 군복을 입고 죽은 듯 눈물을 흘려야 했다. 4주 동안 엠16 소총의 찔러 총, 베어 총이 몸에 맞을 리가 없었다.

1985년 초에 입대한 조성만 열사! 그는 의정부에 위치한 한미연합사에 배치를 받았다. 한반도의 모순이 미국에 의해 비롯되었고,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가로막는 장애물로서 미국을 인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군대 경험 때문이었을 거라고 말한다.

88년 저는 신병교육대를 마치고, 제일 먼저 조성만 열사의 영정이 차려져 있는 명동성당으로 쫓아갔다. 저보다 1년 뒤에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을 찾은 조 열사를 생각하면 몸서리쳐질 정도로 살아있는 것이 분했다.

“민족의 독립을 외쳤던 제주도민의 학살인 4.3, 한국전에서 보여준 미군의 우리 민족에 가했던 살상, 5.16의 지원, 저 잊을 수 없는 80년 광주학살 등 오직 제국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미국의 모습은.... 민족문제의 해결은 미국을 축출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사실은 더 이상 민족반역으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 - 1988년 5월 15일 조성만열사의 유서 중에서

그의 죽음을 전후로 대중적인 통일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됐고, 1989년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의 방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저는 노태우 정권 당시 1991년 그를 생각하면서 ‘청년과 군대’를 집필했다. 표지의 저자 이름은 ‘민족자주군대쟁취투쟁위원회’. 이름만 거창하다. 당시 주한미군과 한국군을 민주적으로 개조하려는 최초의 책이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에게 전달되었다. 물론 지하출판물이었다. 1992년 일본의 가야서방에서 일본어로 ‘합법’ 출판되어 각 현의 도서관에까지 배치되었다.

이런 저런 일도 있었지만, 1993년 9월 안기부에 연행되어 ‘간첩’이라는 낙인을 찍혀 반평생 붙어 다닌 저의 진술조서에는 ‘청년과 군대’가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7년 전 2011년 광화문에서 열린 조성만의 23주기에 적지 않은 가톨릭 청년출신들이 함께 했다.

그해 2011년 5월, 저자 송기역은 <사랑 때문이다>라는 제목의 조성만 열사 평전을 펴냈다. 이 책은 조성만 열사의 삶과 죽음, 1980년대 정치·사회·문화적 변화를 배경으로 고민하고 흔들렸던 청춘들의 삶과 사랑, 투쟁을 다루고 있다. 조성만은 워낙 조용하고 말이 없는 성품인지라 학교에서 별로 튀는 학생이 아니었다.

“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척박한 팔레스티나에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고행 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 1988년 5월 15일 조성만열사의 유서 중에서

2018년 5월 15일 저녁 7시 명동 가톨릭회관 2층에서는 통일열사 조성만 30주기 추모사업위원회가 발족한다. 19일에는 광주 망월동 순례를 하며, 31일에는 조성만 30주기 미사가 명동성당에서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주관으로 열린다.

1964년 12월 13일 전라북도 김제군 용지면 용암리 126번 지에서 부친 조찬배씨와 모친 김복성 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던, 그는 55년 만에 ‘청년 예수’로 부활해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민족의 부활을 경험하고 있다.

1988년 5월 14일 명동성당청년회 주최의 ‘광주민중항쟁 계승 마구달리기대회’ 행사준비를 마치고 술자리 후 후배와 집으로 돌아온 조성만은 술에 취한 후배를 옆에 눕히고 유서를 써내려갔다. 그리고 향한 명동성당, 행사가 준비되던 시간에 조성만은 유서를 복사하여 명동성당 교육관으로 올라갔다. 그 날 그 하늘도 유난히 맑은 날이었을 것이다. 올 5월은 광주대학살 38주기다.

“민족의 한인 광주학살을 주도한 현 군사정부 자랑스러운 조국 아메리카의 후예들!” - 1988년 5월 15일 조성만 열사의 유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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