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은 ‘유권자의 날’이다.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를 기념해 2012년 제정됐다. 5.10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의원들은 ‘제헌헌법’을 제정,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1조에 따라 선거권은 기본권으로 규정됐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5.10 총선거는 남한에서 진행됐을 뿐이다. 1945년 해방 이후 분단선을 없애려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반쪽짜리 선거였다. 그리고 70년 전 남한 총선거는 분단을 가속했다. 5.10 남한 총선거 70년을 돌아본다.

‘총선거’, 짜인 각본으로 시작하다

1945년 해방 이후 들어선 미군정은 남한 우익과 중도파를 결집한 정무위원회를 선정, 조선인에 의한 과도정부를 구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좌익을 탄압하는 한편, 이승만과 임시정부 요인을 귀국시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했다. ‘모스크바회의’를 앞둔 방책이었다.

신탁통치가 결정된 ‘모스크바 3상회의’ 후속조치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임정요인으로 구성된 반탁세력은 미군정이 이름붙인 ‘남조선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이라는 비상정치회의를 소집했다. 남한의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구성된 ‘민주의원’은 미군정 자문기구였지만, 좌익은 배제되고 여운형 등은 탈퇴한 반쪽짜리 기구였을 뿐,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를 지켜본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를 끌어들일 심산으로, 1946년 10월 법령 118호 ‘조선과도입법의원의 창설’을 발표, 제헌의회 총선거를 위한 선거법을 제정할 과도입법기관을 만들었다. ‘조선과도입법의원’은 ‘정부의 한 기관’이라는 성격 규정에서 보듯,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아닌 미군정에 따른 총선거, 즉 남한 만의 총선거를 암시하고 있었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2차 회의를 앞두고 미군정은 ‘조선과도입법의회의 창설’ 법령을 발포한 지 20일도 채 안 돼 민선의원 선거를 끝내고 11월 4일 입법의원 개원 시나리오를 짰다.

한 집에 성년이 10명이 있어도 투표권은 세대주 1명에게만 주어졌을 정도로 선거법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불법 선거가 난무한 가운데 45명의 민선의원이 11월 3일 선출됐다. 9월 초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불법화해 촉발된 대구 총파업과 뒤이은 10월 항쟁으로 자연스레 좌익세력은 선거에서 제외됐다.

우익인사 일색이던 민선의원에 대한 반발도 일어났다. 좌우합작위원회는 선거 결과에 항의, 10월 항쟁과 관련해 경찰 수뇌부 해임을 요구하고 미군정이 임명하는 45명 관선의원 추천을 거부했다.

결국, 미군정은 서울시와 강원도의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재선거를 시행, 1946년 11월 20일 입법의원이 개원했다.

▲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 당시 투표 모습. [사진출처-중앙선거관리위원회/국사편찬위원회]

일련의 정치일정은 미군정이 남한 만의 단독선거를 통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취지가 분명했음을 보여준다. ‘입법의원’ 선출을 위해 제정된 법령 118호는 38선 이남에 적용됐고, 그렇게 선출된 ‘입법의원’들에게는 제헌의회 총선거를 위한 보통선거법 제정이 최우선 과제로 부여됐다.

1947년 2월 입법의원들은 선거법 제정 논의에 들어갔다. 미군정 장관 러취가 제안한 초안과 입법의원의 선거법기초위원회안이 논의됐다. 미군정은 6월 말까지 선거법이 통과되지 않으면 사법부에서 선거법을 입안하겠다고 압박했다. 우익을 중심으로 한 입법의원 법제사법위원회는 투표연령을 높이고 특별선거구를 도입하는 등 수정된 초안을 본회의에 상정했다.

수정된 초안에 대한 반발이 거세고, 미군정도 우려를 제기해, 투표연령 등이 일부 수정된 ‘입법의원의원선거법’이 9월 3일 공포됐다. 남한 단독선거는 시행만 남았다.

남한 단독 총선거, 영구분단의 길로 가다

남한 만의 총선거 준비가 착실히 진행되던 1947년 5월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됐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으로 넘겼고,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7년 11월 14일 제2차 UN총회에서 UN이 파견한 위원단의 감시 아래 한반도 전역에 걸친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가를 구성한다는 결의안이 채택됐다.

미국은 소련이 총선거를 거부한다면, ‘UN임시한국위원단’(UNTCOK)의 ‘자유재량권’으로 남한 단독선거를 추진한다는 생각이었다.

1948년 1월 9개국으로 구성된 UN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소련은 이들의 입북을 거부했다. UN 위원단은 남한은 ‘경찰국가’로 자유선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2월 26일 UN소총회에서 남한 단독선거가 결정됐다. 미군정이 치밀하게 준비한 결과가 빛을 본 셈이다.

미군정은 3월 1일 ‘조선인민대표의 선거에 관한 포고’를 통해, “연합국임시조선위원단과 상의 후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개정을 가한” 선거법에 의해 5월 9일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UN위원단은 “언론, 출판 및 집회의 자유라는 민주적 권리가 인정되고 존중되는 자유분위기 하에서 선거가 행해질 것이라는 조건”에서 선거 참관을 결정했다.

UN위원단은 입법의원이 만든 ‘입법의원의원선거법’을 투표연령 21세, 특별선거구 폐지 등으로 수정하도록 했으며, 3월 17일 법률 175호 ‘국회의원선거법’으로 공포됐다. 그리고 3월 30일부터 4월 16일까지 선거인등록이 마감됐다.

미군정은 등록률이 90%가 넘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한민당을 제외한 남한 모든 주요 정치세력이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등록률 90%는 조작이라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우익세력의 압도적인 총선 승리를 예고했다.

▲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 당시 투표 모습. [사진출처-중앙선거관리위원회/국사편찬위원회]

밀어붙이기식 남한 단독선거은 남한 전역에 상처를 남겼다. “총선거가 완전독립과 통일을 위한 것이며 선거에 반대하는 것은 비애국적”이라는 미군정의 선전은 강제성을 띠었다. 경찰과 우익세력은 쌀 배급과 선거인등록을 연계시키는 방법으로 강압적인 유권자등록에 나섰다.

좌익세력은 전국 각지에서 경찰서와 투표소를 습격하는 등 단독선거 반대를 행동으로 옮겼다. 2월 7일부터 5월 14일까지 선거와 관련, 좌우와 관민을 합쳐 45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제주 4.3항쟁도 단독선거와 무관하지 않았다. ‘비국민’으로 몰린 제주도민은 학살의 대상자였다.

주요 정치인들도 바삐 움직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4월 평양으로 올라가 김일성을 만나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를 갖고, 단선.단정에 반대한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미군정의 불도저식 밀어붙이기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200명을 뽑은 제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85명,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명, 한국민주당 28명, 대동청년당 12명, 조선민족청년당 6명,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2명 등이 뽑혔다. 예상대로 이승만과 우익세력의 승리였다.

“5.10선거는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선거인 동시에 최초의 보통선거”라는 평가이다. 하지만 5.10선거는 국민의 주권행사라는 입장에서 과연 당시 전체 국민의 뜻을 담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여기에 민주주의의 장치라는 선거는 한반도에서 분단을 고착시킨 수단에 불과했다는 불편한 진실은 70년째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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