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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회담 이후 정치지형이 구조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요약하면 문재인 정부의 높은 지지, 자유한국당의 궤멸 조짐, 중도세력의 분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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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정점을 찍고 있다.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다.

첫째, 문재인 정부가 잘한 점은 조정자 역할이다. 특히 대통령의 정무적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둘째, 운이 좋았던 측면이 있다. 현 상황을 결정적으로 좌우했던 것은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이다.

북한은 작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인적·내용적 인프라를 구축한 상태에서 현재 존재하는 핵·미사일을 폐기하는 파격적인 양보안을 냈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미국을 견제할 수 있고 협상도 가능해야 하는데 두 가지 모두를 실현할 수 있는 경로를 확보한 것 같다.

여러 자료 중 신기욱 교수가 지적한 “핵 전문가들에 의하면 북한은 핵물질과 시설만 있으면 몇 주내로 다시 핵을 만들 수 있고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3~6개월이면 가능”하다는 평가가 가장 객관적인 것 같다.

이런 정도면 지금까지 북한이 보여준 태도가 이해가 된다.

셋째,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남북 정상회담 결과를 과신하고 있다. 주로 현존 핵을 폐기하는 데 방점을 두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북한은 핵 견제력을 유지할 것이다. 파격적인 양보를 한 만큼 그에 따른 반대 급부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후자가 간과되고 있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 주류가 여전히 의심을 갖고 있는데 비해 트럼트 대통령의 의욕이 앞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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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고공 지지는 촛불의 완성 또는 마지막 국면처럼 느껴진다. 촛불은 껍데기만 남은 구세력을 성숙할 대로 성숙한 민주화 세대가 밀어낸 사건이다.

촛불 이후 민주화 세대는 그들이 가져왔던 구상과 열정을 남김없이 분출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억눌린 감정을 해소하고 있다. 마치 장기간 축제를 즐기는 것 같다. 촛불-문재인 정부 출범-적폐청산-남북관계 등으로 이어지는 국면이 그러하다.

문재인 후보의 당선 이후 나는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흥미 있던 것은 그들 대부분이 문재인 후보에 대한 지지를 그냥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내용적으로 보면 고령 저학력 세대가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것과 거의 유사했다. 고령 저학력 세대는 박근혜와 자신들이 같은 시대적 감수성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민주화 세대가 문재인을 지지하는 이유도 유사하다. 그들은 다양한 세력 중 정견을 같이 하는 어떤 후보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 유사한 시대적 감수성을 갖고 있는 정치 리더를 선택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박근혜와 문재인은 각각 산업화와 민주화, 냉전반공과 남북화해를 시대적으로 대표하는 정치리더이다.

남북 정상회담은 정치 리더와 지지세력이 함께 공유했던 시대적 감수성을 공유하고 집단적으로 확인하는 하나의 축제가 된 것 같다. 아마도 8.15 정도까지가 정점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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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이 궤멸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이 궤멸하고 있는 일차적인 원인은 자유한국당을 지탱할 사회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냉전반공 사상을 체현한 저학력 고령층 상당부분이 정치 일선에서 퇴장한 지 오래다. 민주화 세대의 첫 세대로 할 수 있는 55년생이 이미 60세를 넘었다.

자료에 따르면, 박근혜가 무죄라는 생각에 동의하는 비율이 15% 내외다. 자유한국당은 이 선을 넘을 수 없다. 이들 또한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사실 박근혜 탄핵-구속-판결 과정에서 자유한국당과 같은 보수 극우파의 궤멸은 예고된 것이었다.

이번 정상회담으로 보수 우파가 존립할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우파 상당수도 정상회담 과정에서 자유한국당을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국제 질서에서 냉전이 종언된 것처럼 한국 정치에서도 냉전반공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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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타 정치세력의 동향도 흥미롭다.

먼저 바른미래당의 안철수나 하태경이 보여준 모습은 다행스럽다. 연북화해, 남북협상과 교류협력은 나름 확고한 궤도위에 올라섰다. 이를 거부하는 세력은 존립하기 어렵다. 바른미래당이나 그와 유사한 정치세력은 남북관계에서 보다 전향적인 입장을 보일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김영환이나 하태경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김영환은 강철 서신을 쓰고 민혁당을 만들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이들은 주사파 또는 NL로 시작해서 북한 민주화 또는 반북적 입장을 띄었다가 남북화해 국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다음은 우연히 보게 된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김영환의 평가 문건이다.
https://www.facebook.com/itspolitics/posts/1949973691711037

나는 김영환이나 하태경이 개인의 안위를 위해 변절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모습은 그런 것 같지 않다. 본인의 정치적 신념이나 기조가 바뀌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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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평화가 도래했다. 한반도를 들쒸웠던 전쟁과 대결 구도는 사라질 것이다. 이를 위해 싸우다 희생했던 모든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낸다.

그러나 전쟁과 대결, 냉전과 반공 이데올로기와 싸우는 과정에서 신화화된 세계관, 감수성을 상대화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

우려하는 것은 “통일만이 살 길이어라” 식의 낭만적이거나 유토피아적 담론 또는 3.1운동-상해임정과 같은 스토리다. 사람들은 이를 독립군이나 통일협상과 같은 정치적 사건으로 기억하고 당연히 옳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세계적으로 보면 20세기 초반 사회주의-민족해방투쟁-제3세계 민족주의의 한국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실패한 이야기거나 비주류로 밀려난 생각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이 담론과 경향, 세계관을 부정하면서 발전했다. 친일파 박정희가 산업화를 시작했고 매판자본 삼성이 최첨단 IT 문명을 선도했다. 친일파와 매판자본이라는 정치적 규정과 실제 현실 사이의 괴리가 큰 것이다.

독립군 이야기, 통일 이야기는 도덕적으로는 옳고 역사적으로 기억할 필요가 있으나 현실 세계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이를 정치적 자산으로 쓰는 것은 애매한 스토리다. 또한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영감과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했으나 현실 공간에서는 주의할 필요가 있는 하나의 신화이다.

386은 그의 청년시절에, 문재인 정부는 문재인 정부가 출현하는 과정에서 이런 몽상적인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다.

2012년 대선에서 이정희는 다카기 마사오를 언급했고 암살과 같은 무수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대통령은 중국 방문 과정에서 애써 중경 임시정부를 찾으며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정치의 전면에 등장시켰다.

4.27 정상회담은 행동과 감수성으로만 본다면 21세기 글로벌 시대가 아니라 1945~70년대 초반까지 극성했던 제3세계 민족주의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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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장준하, 동북항일연군과 조선의용군, 문익환과 임수경은 자주와 통일, 남북 사이의 화해와 협력에 필요한 정신적 동력을 제공했다.

모든 역사 이야기가 그렇듯이 거기에는 일정한 비약과 신화적 덧칠이 가미되어 있다. 우리는 비약과 신화적 덧칠이 가미된 민주화 세대의 통일 이야기에 푹 젖어 있다. 그 만큼 우리 시대를 객관화할 가능성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주류 집단에서 시대를 개척하는 이색적인 사조가 출현하기 어려운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리영희 선생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다. 지금이 그럴 때이다. 지금의 정치와 사상 지형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4.27 판문점 선언으로 촛불은 끝났다. 이제는 또 다른 시대를 개척할 가능한 색다른 주장, 기존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유별난 시도에 애정을 가질 때이다.

새의 다른 쪽 날개를 개척하는 것이 진보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필자 사정으로 연재를 당분간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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