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꿈속에서는 하늘로 오르려고 나는 것이 아니라 날기 때문에 하늘로 오른다 (바슐라르)


 빈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대단한 도둑들의 탈출-호타카 준야 글->이라는 그림책을 읽었다. 세 도둑이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얼룩말, 호랑이로 변신한다. 교도관을 속인 그들은 무사히 교도소 밖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들은 얼룩말, 호랑이에서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오지 못해 이번엔 동물원에 갇힌다. 아마 그들은 평생 동물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것이다. 

 한 번 변신하면(자신의 감옥에서 나오긴 하지만) 그게 자신의 운명이 되는 비극! 인간의 원초적 비극이 아닐까!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도 벌레로 변한(약육강식의 인간세상에서 탈출한) 그레고르 잠자는 끝내 벌레로 죽는다.

 한 동화작가는 내게 ‘두 얼굴’이 있다는 말을 했다. 하나는 ‘천진난만한 아이 얼굴’이고 하나는 ‘데드 마스크’란다.  

 고등학교 다닐 때 자취방에 돌아와 거울을 보았다. 아, 시체의 얼굴 같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표정. 아무리 애써도 풀리지 않았다. 그 얼굴로 밥을 하고 숙제를 했다.

 나는 안다. 내 ‘데드 마스크’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를. 나는 십 여 년 전에 그야말로 죽을 정도로 아팠던 적이 있다. 병이 나기 전까지 한동안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었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는데, 여길 가보아도 저길 가보아도 다들 ‘빈집’이었다. 그러다 잠에서 깨어났다. 

 반복해서 그 마을 꿈을 꾸며 그 마을이 어느 마을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 태어나 세 살까지 살았다던 산골 마을 ‘골테’. 6. 25 한국 전쟁 이후 어수선한 시절. 내 마음에 엄청난 상흔이 남았나 보다. 
 
 그 때 세 살 아이는 ‘사랑을 잃고’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데드 마스크로 그 상황을 버텼을 것이다.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나는 나의 데드 마스크를 벗을 수가 없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한 번 데드 마스크로 변신한 후 다시는 원래의 얼굴을 되찾을 수가 없다. 도대체 그 어린 아이가 어떤 상황을 벗어나려 했을까!   

 장자의 나비가 되면 다시 내 얼굴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그리스의 주신(主神) 제우스처럼 천변만화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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