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사수하자! 우리의 생명, 우리의 존재는 우리 국어를 지킴으로써만 의의가 있다!”

1948년 연합군총사령부(GHQ)의 지시에 따라 일본 정부가 재일 조선인들이 세운 학교를 폐쇄하기에 이른다. 이에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일제히 항의했다. 단순한 학교 지키기가 아니었다. 해방 후 조선인 말살정책에 대한 항거였다.

70년 전 일본 한신지역을 중심으로 ‘4.24 교육투쟁’이 시작됐다. 그리고 교육투쟁은 70년째 현재 진행형이다.

해방 후 재일 조선인은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자녀들에게 조선말과 조선역사, 조선문화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재일 조선인 사회 스스로 학교를 만들어 갔다. 1945년 10월 재일조선인연맹(조련) 결성과 함께 일본 전국에 흩어져 설립된 ‘국어강습소’가 ‘조선학교’로 발전해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재일 조선인의 자녀교육이 민족교육으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1948년. 새 학기를 앞둔, 1947년 10월 GHQ는 ‘조선학교는 일본의 교육법령에 따른다’는 지령을 발표한다. 이어 1948년 1월 일본 문부성 학교교육국장은 ‘조선학교 설립의 취급에 대하여’라는 통달을 내린다. 재일 조선인의 민족교육에 대한 권리를 부정하고 일본학교에 취학시키라는 의무였다.

그리고 추가통첩을 발표, 일본인 학교를 빌려 운영하던 조선인학교에 대해 학교를 비우라고 요구했다. 조선학교 폐쇄령이었다.

해방 후 조국 조선의 독립을 지주로 삼고, 재일 조선인의 조직화.권익옹호 운동을 토대로 해 자력으로 조선학교를 만들고 민족교육의 행로를 개척하던 재일 조선인에게 ‘지령’, ‘통달’, ‘추가통첩’은 다시 식민지배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 연합군총사령부(GHQ)의 명령을 받은 일본 경찰들이 조선학교에 들이닥치고 있다. [사진출처-몽당연필]

미국과 일본, 재일 조선인을 불순세력으로 보다

GHQ와 이를 등에 업은 일본 정부는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우선, 해방 후 일본에 남아있던 조선인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

1945년 11월 미국은 일본의 점령 및 관리에 관한 기본적 지령 1항에서 “대만 출신의 중국인과 조선인은 군사상의 안전이 허락하는 한 해방 인민으로서 처우하지만 필요한 경우 적국민으로 취급할 수 있다”고 밝혔다.

여기에 일본은 귀국하지 않은 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그대로 보유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일본법령을 따르는 자로 규정했다. 해방 이후 분단으로 귀국길을 주저할 수 없던 조선인을 모두 일본인과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것. 행정적으로도 조선인은 외국인에 해당하지도 않았다.

여기에 냉전의 시작은 재일 조선인 억압의 구실이었다.

1948년 1월 미국 로얄 육군장관은 “앞으로 극동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새로운 전체주의의 위협에 대해 방어벽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충분하고 안정된 민주주의를 강력히 구축하는데 있다”고 일본의 역할을 강조했다. 일본은 중국과 북한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대륙의 공산주의를 막는 보루라는 의미이다.

실제 GHQ는 해방된 민족인 재일 조선인을 후방교란자로 바라봤고,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을 불순세력으로 인지했다. 재일 조선인이 왜 일본에 살 수밖에 없고, 돌아갈 수 없는 처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 GHQ의 눈에 조선학교는 ‘정치학교’에 불과했다. 일본 전역에 556개의 조선학교가 설립된 이유가 해방된 민족의 자녀 육성이라는 목적을 바라보지 않고 일본에 동화되지 않고, 미국에 배타적인 세대를 키우는 불순학교의 수단이라고만 인식했던 것.

‘조선학교 폐쇄 통달’ 그리고 저항, 죽음

이런 배경에서 나온 통달은 1948년 1월 각 도도부현에 회람되고, 구체적인 조치를 담은 통첩은 2월부터 3월에 걸쳐 각 시정촌에 내려졌다. “재일 조선인 자녀에게 취학통지를 내어 공립학교에 수용할 체제를 갖추고, 일본인 교사(校舍)를 차용한 조선인학교에 대해서는 교사를 비워줄 것을 요구하고 각 조선학교에 사립학교 인가신청을 요구하라.”

이에 조선인들은 △조선인의 교육은 조선인의 자주성에 맡길 것, △일본 정부는 조선인 교육의 특수성을 인정할 것, △교육비는 일본 정부가 부담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일본인과 구별하지 않는 교육을 강조하며, 조선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3월 31일 야마구치현을 시작으로 4월 8일 오카야마현, 10일 효고현, 12일 오사카부, 20일 도쿄도에서 차례로 조선학교가 폐쇄됐다.

조선인의 저항은 거셌다. 첫 폐쇄조치가 내려진 야마구치현에서는 1만여 명의 조선인이 현청 앞에서 집회를 열어 24시간 동안 교섭 끝에 폐쇄연기를 약속받았다. 오카야마현에서는 폐쇄 명령 거부 이유로 조련 위원장이 구속됐지만, 4월 19일 8천 명의 조선인이 모여 교섭을 통해 구속자 석방과 폐쇄연기를 끌어냈다.

4월 20일 도쿄 아라카와구 조련 제1초등학교 학생들은 대자보를 걸었다.

“학교를 사수하자! 우리의 생명, 우리의 존재는 우리 국어를 지킴으로써만 의의가 있다!”, “최후까지 싸우자! 선생님을 지키자! 학교를 지키자! 선생님이 안 계셔도 열심히 공부하자! 조선인의 자주교육! 불법탄압 절대반대!”

▲1950년 12월 20일 모리야마 조선소학교에 들이닥친 일본 경찰들이 학생들을 창밖으로 내던지는 장면. 붉은 원 속 아이가 배영애 전 조선학교 교사이다. [사진출처-몽당연필]

조선인의 거센 저항에 일본 정부가 한발 물러서자 GHQ는 다급했다. 자신들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인식한 GHQ는 직접 지휘를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4월 24일을 정점으로 한신지역에 비상사태가 벌어졌다.

4월 10일 효고현은 조선학교 폐쇄를 명했다. 이에 고베시는 11일 폐쇄 명령 벽보를 각 학교에 붙였다. “조선인의 교육 자주성을 인정하라”, “교사의 계속적인 사용을 인정하라”는 조선인의 요구를 묵살한 고베시는 23일 학교를 폐쇄했다.

24일 조선인 수천 명이 현청을 둘러쌌다. 그리고 지사와의 교섭을 통해 “학교 폐쇄 명령을 철회하며, 조선학교를 특수학교로 인정하고 위원을 보내 협의 결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현재의 학교를 인정하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민족교육에 대한 권리를 실질적으로 인정받은 것. 이것을 두고 ‘4.24 교육투쟁’이라고 한다.

그런데 상황은 급변했다. GHQ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지사와 조선인의 약속을 무효로 하며 조선인 일제검거를 강행했다. 제8군사령관 아이켈바카 중장이 직접 고베에서 지휘를 했다. 교토, 오사카, 고베 일대 조선인 1천 5백여 명이 체포됐다.

같은 시기 오사카. 4월 23일 1만 명의 폐쇄반대 집회가 부청 앞 오테마에 공원에서 열렸다. 교섭이 열리던 부청 복도에서 연좌 농성을 벌이던 조선인 179명이 4천 명의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이어 26일 1만 3천여 명의 조선인이 모였다. 24, 25일 고베사건을 지켜본 아카마 오사카 지사의 태도는 강경했다. 그리고 미군 제1군단장은 명령을 내렸다. “조선인과의 면담을 신속히 중단하고 부청 앞에 모여 있는 군중들을 해산시키라.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펌프나 화기를 사용해도 된다. 만약 상대편이 폭력을 사용하면 헌병이 방위를 담당한다.”

명령이 떨어지자, 부청 앞에 보인 1만 3천여 명의 조선인들에게 해산명령이 내려졌다. 이어 소방호스로 물을 뿌려댔다. 조선인의 저항이 거세자 권총을 난사했다. 그리고 16세의 조선인 소년 김태일이 사살됐다.

▲ 1948년 4월 오사카에서 조선학교 폐쇄 반대 운동에 참가한 김태일 학생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김태일 군의 장례식 모습. [사진출처-몽당연필]

[김태일 소년 사망 당시 증언]

그때, 손을 뻗어 어깨에 대기만 하면 뒤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던 한 소년이 갑자기 푹 고꾸라졌다. 이곳은 부청사 정면이었는데, 우리 근처에는 이미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검은 학생복은 어딘가 혼란의 와중에 떨어져 버린 것일까. 모자도 쓰지 않은 15, 6세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그는 정원수를 에워싸고 있는 콘크리트 주위에 심하게 머리를 부딪쳤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그가 넘어진 것을 목격한 것은 나뿐인 듯했다. 그의 얼굴은 피범벅이었고, 반쯤 감긴 눈은 그를 쏜 경관대 쪽을 향하고 있었다. 머리가 크게 부어올라 애처로웠다. 나의 웃옷과 올 굵은 모직 바지에는 그의 머리에서 튄 핏방울이 선명하게 뿌려져 있었다. 나는 몸을 굽히고 그에게 다가갔으나 이미 숨이 끊어진 것 같았다.

싸아! 하며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소리가 들렸다. 총탄은 완전히 관통하지 않은 채 그대로 머릿속에 박혀 있는 듯했다. 내 손은 피투성이였다. 죽었다는 것을 깨닫자 비로소 나는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불렀다. 깜짝 놀란 몇 사람이 달려와 그를 부둥켜안고는 “사람이 죽었다! 사람이 죽었다!”하고 외치면서 달렸다.

나는 장소를 차마 떠나지 못하고 윙윙거리는 방수차를 계속 노려보았다. 증오의 눈물이 끊임없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방수차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면서 땅에 붙박인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 과거 부모와 우리가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당한 비분의 역사를 거부한 한 소년이 죽임을 당했다. 그 죽음은 조용하였다. 쓰려졌을 때조차 그는 아무것도 외치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맡긴 것 같았다. 그러므로 불꽃은 계속 피어나가야 한다.

(출처-白佑勝 ‘少年の死’)

5월 5일 조선인 교육대책위원회와 문부성은 일본 교육령에 따른 범위 내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한다는 골자의 각서를 교환하며, 수습책을 마련했다. 하지만 조선학교에 대한 탄압은 그치지 않았다.

1948년 4월 566개 교, 4만8천930명의 학생을 수용한 소학교는 1949년 7월 331개 교, 3만4천415명으로 줄었다. 약 1만 5천여 명의 학생들이 일본학교로 전학가든가 취학하지 않았다. 1949년 10월에 이르러 앞서 사립학교로 인가받은 27개 교 중 1개 교만 남기고 모두 취소당했다.

‘4.24 교육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오자와 유사쿠 동경도립대학교 명예교수는 “조선학교 폐쇄 시도 안에는 민족교육을 억압하는 일본 정부의 정책 원형이 내포되어 있다”고 주목했다.

“정부가 민족교육 문제를 치안문제로 파악했”으며 “반미.반일이라는 명목하에 조선학교를 억압하고 가능하면 폐쇄”해 “재일 조선인 청소년을 일본학교에 취학시켜 동화교육을 실시해 민족적 자각을 박탈”했다는 것이다.

▲ 조선학교 학생들이 일본 도쿄 문부과학성 앞에서 민족교육 탄압 규탄 집회를 열고 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70년 전 ‘4.24 교육투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70년 전 조선학교 폐쇄조치를 내린 ‘통달’은 지금도 똑같이 이어지고 있다. 문부성 차관 또는 국장의 통달, 소위 ‘통달행정’은 일본의 법률 위에 존재한다. 법이 아니라 행정가의 정치적.자의적 판단에 따른 ‘통달’이 재일 조선인 교육에 대한 정책적 집약체인 셈이다. 그리고 ‘통달’의 본질은 동화교육이다.

70년째, 문부성은 조선학교에 정규학교 자격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상황 때마다 조선학교는 ‘통달’로 다스려지고 있다. 고교무상화 정책에서 제외됨은 물론, 치마저고리가 칼로 유린당하는 상황은 ‘4.24 교육투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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