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철(권씨대종회 사업국)

 

▲ 막난 권오설 열사의 88주기 추모제가 처음으로 그 본향인 안동 묘소에서 거행되었다. [사진 - 통일뉴스 권오철 통신원]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로 김단야 등과 함께 1926년 6.10만세운동을 주동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사한 막난(莫難) 권오설(權五卨)열사의 88주기 추모제가 처음으로 그 본향인 안동 묘소에서 거행되었다.

1930년 4월 17일 정오  '경성콤' 그룹의 일원인 권오설 열사가 옥사한 서대문형무소 추모탑 현장에서 먼저 박종철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추모 모임이 진행되었다.

이어 열사의 고향인 경북 안동 가일마을 현장에서는 '권오설 기념사업회(준)'가 주최한 권오설 88주기 추모제가 처음으로 열렸다. 88년만에 열린 추모제는 서울 추모모임에서 버스로 내려간 분들과 현지 종손 등 많은 분이 참석 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려 뜻 깊고 감동적인 행사가 되었다.

국악인이며 승무 전수조교인 이애리 님이 진혼무를 공연해 감동의 자리를 더욱 빛내주었다.

열사의 대를 이은 후손인 권대용 님이 감격에 겨워 짧게 한 이날의 인사말은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열사는 그 짧은 33년의 생애동안 독립지사, 농민운동가, 노동운동가, 사회주의 운동가, 교육자인 동시에 민족지사, 항일열사로 살다 장렬하게 삶을 마친 분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시대 상황에 따라 오랜 세월 왜곡되었다가 이제서야 그 고향 들녘에서, 또 순국한 서대문형무소 현장에서 무려 88년간이란 세월을 넘어 공개적으로 추모행사를 성대히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88년만의 추모제, 그 감동적인  의미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 서대문형무소 추도식을 마치고. 앞줄 가운데 앉아 있는 이가 소설가 김성동 선생. [사진 - 통일뉴스 권오철 통신원]
▲ 묘비 앞에선 참배객들. [사진 - 통일뉴스 권오철 통신원]

무엇보다도 88년만에 처음으로 공식 추모제를 그 본향인 안동 묘소에서 거행했다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종손 및 여러 어른들이 넓은 아량으로 감싸주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민족의 비극의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들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그렇더라도 자라나는 후손을 위해 민족 대화합의 현실 속에서 시의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또 소위 좌우익이 다 자의반 타의반 서로 협력하여 십시일반 뜻을 모아 행사를 할 수 있었으니 후일 자손들에게도 부담을 물려주지 않아도 되는 자랑스런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더욱이 같은 마을의 같은 집성촌에서 벌어진 갈등의 골을 권씨 종친회에서도 도와줘 이날의 추모제가 진행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
 
이와 함께  아직 저평가된 6.10만세운동의 의의와 그 과정에서 민중과 민족의 편에 섰던 사회주의자들의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되었다는 점에서 다소 미흡하긴 하지만 통일 후 재평가받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겠다.

아울러 새로운 세상의 개막이 보수적 고장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곧 이 민족의 앞날에 비치는 서광과도 같다는 기대가 생기고 있다.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그 의미는 더욱 지대하다고 할 것이고 평화와 통일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 '기념사업회'가 활성화되면 추모제는 더욱 규모가 커질 것이다. 여기에 잃어 버린 『막난집(莫難集)』이 예천 어느 고가에서 발견 된다면 그것은 후손에 남겨줄 빛나는 유산이 될 것이다.

그래서 1930년 열사의 유해가 실린 철관을 안동역에서 22km떨어진 '가일마을'까지 운송하는 장대한 행렬이 재현되는 날이 곧 올 것이고, 이후 권오설의 동생인 권오직, 권오상과 인근의 권태양, 옆 동네의 김재봉,김시현, 유림 등에 대한 기념사업도 활성화 될 것이다.

▲ 추모제에 참석한 200여명의 추모객. 독립운동가 후손들 사이로 초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김재봉 선생의 후손 김탁 선생이 인사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권오철 통신원]

지난해 안동권씨 대종보에 권오설 기념사업회 창립 기사를 시작으로 이제 그 자랑스런 권문의 인물들이 권애라, 권정생을 위시 하여 하나둘 그 위상을 높혀 갈 것이다.

이날 추모제에는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후손인 이항증 선생과 초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인 김재봉 선생의 후손 김탁 선생,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교 장관의 후손 김정희 선생, 장준하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 사상계 발행인, 권영길 (사)평화철도 이사장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추가-25일 09:40)
 

▲ 권오설.

막난(莫難) 권오설(權五卨, 1897-1930)은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운동가, 교육가, 농민운동가, 애국열사 등 그 짧은 33년의 생애를 불꽃처럼 살다간 권문(權門)의 영걸이다. 안동 경북독립기념관은 권오설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그의 부친 권술조(權述朝)가 아들의 제문을 지으면서 한탄하던 그 말은 "아, 원통하고 슬프다! 내가 너와 인간 세상에서 부자라는 이름으로 정해진 것이 겨우 33년인데… 네가 과연 죽었느냐, 죽었다면 병으로 죽었느냐, 충직(忠直) 때문에 죽었느냐, 사람의 삶은 올바름에 있는 것이니, 네가 만약 죽을 자리에서 죽었다면 어찌하겠는가!"였다.

시골에서 동화학교와 남명학교를 마치고 경주 최부자 '최준'의 도움으로 대구고보를 수학하고 광주에서 고용원으로 일하다가 3.1만세운동에 참여하니 독립운동가이다.

또 그의 서적에서 '삼일신고'와 대종교 계통의 조직표가 나오는데 이는 서울 중앙학교 재학시 대종교도이며 국어학자인 김두봉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곧 민족해방에 전념한 민족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귀향하여서는 원흥의숙과 풍산학술강습회를 설립운영한 교육자며 계몽가이다. 또한 가곡농민조합과 풍산소작인회등을 조직하여 투쟁한 사회노동운동가였다. 

결정적인 것은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까지 한 사회주의자로서 6.10 만세운동의 실제적 실행자로 천도교, 민족주의 계열, 사회주의 계열을 아울러서 스러져가는 민족정기에 불을 당긴 위인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상하기도 한 것이다. 당시 내건 캐치프레즈도 매우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은 더욱 극적이다. 왜정에 의해 옥중에서 고문 치사되었으니 곧 열사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그의 손자 권모와 양아들 권대용이 겪은 이중의 고난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집안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웅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최초로 안동에 자리를 잡은 권항(1403~1461)은 류개의 손자인 류서의 사위가 되면서 당시 풍습에 따라 류씨 땅인 안동으로 온 것이며, 그 증손자인 권질(1483-1545)이 갑자사화, 그 동생 권전(1486-1521)은 기묘사화로 집안이 망하니 그 권질의 딸 중의 하나가 그 퇴계 이황의 유명한(?) 두번째 부인 권씨이다.

"유가(儒家)에는 3년마다 금부도사가 드나들어야 하고, 갯밭에는 3년마다 강물이 드나들어야 한다." 즉 올 곧은 선비의 집에는 '부당한 죽음의 그림자'가 너울거려야 정상이라는 것이다. 그 전통이 권오설에게까지 이어졌으니 일부 반민족적 부당한 무리들의 비난이 있기도 하지만 권오설, 권오직 형제 외에도 권준희, 권오상, 권오운, 권오창 등 수많은 애국지사가 이 집안에서 나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 그의 죽음은 의문에 쌓여서 일제가 적극 통제(철제관, 평장)하였으나 안동역에서 가일마을 까지 침묵의 행렬은 긴 띠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는 분명히 권문의 위인이고 자랑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겨레에 대한 변함없는 단심(丹心)처럼 권오설의 붉은 인장이 찍힌 삼일신고와 핏빛으로 검붉게 녹슬은 그 주검의 철제관은 한민족의 과거와 미래의 명암을 강렬하게 조명하고 있으며 그의 장렬한 죽음과 아버지 권술조의 애끓는 편지에서 안동인의 뼛속 깊이 깃든 '효(孝)와 충(忠)'을 발견할 수가 있다"

 

<막난 권오설 선생 88주기 추모시>

가곡지 회화나무

권옥희

들립니다. 가일 못 둑 옆 회화나무가 환하게 흔들립니다. 
가지마다 연둣빛 새순 말아 올리는 커다란 옹이에 귀를 대면 
캄캄한 한 시대의 언덕에서 제 뼈를 깎아 만든 횃불을 들고 
외치던 님의 뿌리 굵은 목소리 하늘을 울립니다.
 
‘조선 민중아,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횡포한 총독 정치를 구축(驅逐)하고
 일제를 타도하자’
3.1에서 6.10까지 오직 님의 창창한 젊음은 
조선인의 조선을 위한 조선 독립 만세의 격문으로 펄럭였습니다.
일제의 심장을 겨냥한 서늘한 화살이었습니다.
그러나 님의 화살은 미완(未完)의 반도에 붙들려 있고
부끄러운 역사는 님의 시위 앞에서 고개 들지 못합니다.
아직 반도에는 먹구름 남아 있고 가끔 천둥번개 칩니다. 

조국과 겨레의 희망에 불씨를 당기고 겨우 삼십을 조금 넘긴 나이, 
일제의 감옥에서 별이 되신 님, 
밤마다 고목 우듬지를 서성이는 별빛이 되어
넘고 넘은 여든 여덟 고개가 수피에 깊은 골을 새겼습니다.
님이 흘린 녹슨 눈물이 오늘 가곡지에 출렁입니다.
고향집을 나설 때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이던 안방과 툇마루와 
우물은 바람이 되어 정살미 숲속에 푸른 솔잣나무로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들립니다. 휘어진 고목의 가지마다 새 시위를 당기는 소리,
바닥에는 살아남은 자들이 이마에 꽂고 달려야 할 화살이 수북합니다. 
사월의 정살미 숲에서 한 무리의 새떼가 사방으로 날아오릅니다.

님과 그리고 님과 함께 같은 길을 달리다 같은 길을 간 수 많은 목숨들이  
구멍 난 문장으로 혁명의 제문을 열어 기어이 여든 여덟 번째 봄을 맞이하는 오늘, 
님은 영원히 반도의 언덕에 푸른 희망을 쏘는 거목입니다.

들립니다. 가곡지 옆 회화나무에 안기면 
화살 날아가는 소리 환하게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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