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8년 4월 19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역사적인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가 열렸다. [자료사진-통일뉴스]

1948년 4월 17일 평양행을 굳힌 대한독립당(한독당) 당수 김구는 일갈했다. “오직 우리 통일과 독립과 활로를 찾기 위하여 피와 피를 같이 한 동족끼리 마주 앉아 최후의 결정을 보려고 결연 가련다.”

이보다 앞서 3월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은 “남북조선의 모든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의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구체적 계획과 방침을 채택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에 의한 분할통치로 남북 분단이 가속화되던 1948년. 남측의 이승만 등을 제외한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은 분단만은 안 된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리고 4월 19일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연석회의가 열렸다.

남북.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는 지금, 70년 전 남북연석회의를 되돌아본다.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는 1947년 10월부터 논의가 시작됐다. 한반도 통일임시정부 구성을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가 교착상태에 빠지고, 미국의 일방적인 한반도 문제의 유엔총회 표결 결정은 한반도의 영구분단을 기정사실로 하는 상황이었다.

단선.단정을 추진하던 이승만 세력에 맞서 통일정부 구성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그즈음 본격화됐다.

근로인민당(근민당)이 “미.소 양군이 조속히 동시 철퇴하고 조선민족의 자주자결적 권리를 승인하는 동시에 정권을 조선인민에게 이양하여 주기를 주장한다”고 밝혔다. 뒤이어 한독당 내 중도파를 중심으로 ‘남북대표회의’를 주창하고, 민족자주연맹 준비위원회, 근민당, 신진당, 사회민주당 등이 잇달아 남북협상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11월 4일 한독당 내 중도파, 근민당, 민주독립당 등 10여 개 중도파 군소정당은 회합을 열고, 남북대표회의 구성과 이를 위한 ‘각정당협의회’(정협)을 결성했다. 이어 김규식을 지도자로 하는 민족자주연맹(민련)으로 확대, 남북통일 중앙정부의 조속수립을 촉진하기 위한 ‘남북정치단체대표자회의’ 개최를 천명했다.

당시만 해도 김구는 정협이나 민련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승만의 우익진영 통합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가 12월 22일 “이승만이 추구하는 남한선거에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구.김규식, 평양행을 결심하다

▲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은 김구 일행. [사진출처-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김구는 왜 갑자기 입장을 바꿨을까. 북로당은 서울공작위원회의 성시백을 통해 김구에게 안우생, 김규식에게 권태양, 홍명희에게 김기환을 연계해 남북협상을 성숙시켜나갔다. 이들은 1947년 9월 좌우합작위원회를 해소하고 새로운 민족통일 연합체 성사를 위한 활동을 본격화하던 각 당에서 정치적 신임을 받던 실무자들이다.

아무런 사전 준비없이 정치지도자들의 결정만으로 남북협상이 시작됐다기보다는, 국토분열과 단정 수립에 대항해 싸우던 민중의 뜻을 받들어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남북연석회의를 성사시키 위해 활동가들이 남한 내 정치세력의 연합체를 착실히 준비해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노력을 남한 내 정치지도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었던 셈.

비슷한 시기인 1947년 10월 3일 김일성은 북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중앙위원회 의장단 회의에서 ‘남북협상방안에 대하여’를 발표, 남북 정당, 사회단체대표 연석회의 소집을 제안했다.

이어 1947년 11월 북로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12월 전원회의를 통해 남한에서 유엔위원단과 단선 반대투쟁 분위기가 고조되고 북한에서 2차 당 대회가 끝나는 4월 중순에 남북연석회의 개최를 결정했다.

그리고 1948년 1월 중순 김일성은 김구와 김규식에게 남북연석회의 소집을 제안하는 편지를 비밀리에 보냈다.

당시 김구를 담당한 안우생은 “나는 백범선생 앞으로 이미 북의 서신이 도착했음을 알게 되었다. 백범선생이 한독당 막료진과 북에 회신할 내용을 논증할 때, 백범선생은 민족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확고한 입장이 표명된 북의 서신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던 터이라 연공 합작에 동조하게 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밀서를 받은 김구와 김규식은 2월 16일 ‘남북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을 통하여 통일정부 수립과 새로운 민주정부 건설에 관한 방안을 토의하자’는 공동명의의 편지를 김일성에게 보냈다.

북, 남북연석회의 공식화하다

이를 토대로 북한은 3월 25일 북조선민전 제26차 중앙위원회를 열고,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개최를 공식화했다. 그리고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 사회단체에 고함’이라는 제안서를 발표, 4월 14일 평양 연석회의를 제안했다.

해당 제안서는 이튿날인 26일 남한의 17개 정당.단체에 방송을 통해 전달됐고, 27일 김구와 김규식에게 특별서신이 도착했다. 북측의 공식반응에 김구는 26일, 김규식은 29일 각각 찬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31일 김구는 비서이자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이며 최용건의 항일투쟁 동지인 안경근을, 김규식은 민족자주연맹의 핵심이자 가장 신임했던 권태양을 대북특사로 파견했다. 이들을 통해 북측의 의사를 재확인한 김구는 즉시 연석회의 참가를 결심했다.

김규식은 4월 초 다시 권태양과 배성룡을 특사로 보내 △독재정치 배격, △사유재산제도 승인하는 국가 건립, △전국적 총선거를 통한 통일중앙정부 수립, △외국의 군사기지 제공 금지, △미.소 양군 철퇴 공포 등의 5개 항의 조건을 제시, 북측의 의사를 재확인한 뒤 평양행을 굳혔다.

남북연석회의 개최가 본격화되자 북한은 4월 1일 주영하를 위원장으로 한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조직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14일 각계 대표에게 대표증을 발급하고, 남측 대표들의 입북문제를 이유로, 연석회의를 19일로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남북연석회의 개최 일자가 다가오자 4월 초순부터 남한 정치인들이 북행길에 올랐다. 경교장 앞을 막아선 군중들로 인해 개막식보다 하루 늦은 20일에 김구는 평양에 도착했다.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 어떻게 될지 몰라도 나는 이북의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보아야겠다”던 김구의 앞길은 그 누구도 막지 못했다.

▲ 70년 전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모란봉극장. 2008년 <통일뉴스>가 단독 취재를 한 곳이다. [자료사진-통일뉴스]

1948년 4월 19일 오후 6시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역사적인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가 열렸다. 20일 이후까지 평양에 도착해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단체는 남한 41개, 북한 15개, 총 56개였다.

주석단에는 ‘통일적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하여 전조선 인민은 단결하라’ 구호가 걸렸고, 통일국가를 상징하는 한반도 지도모형과 깃발을 배경으로 ‘남조선 단선단정 절대반대’, ‘쏘미 양군 동시철거’, ‘민족자주적 민주주의 통일국가 수립’ 등의 구호가 붙었다.

해방 후 처음으로 남과 북의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넘어 통일 독립을 이루자는 하나의 목표로 한자리에 모인 모란봉극장은 장엄한 분위기였다.

[남한 주요 참석자 명단 및 단체명]

한독당 : 김구, 조소앙, 엄항섭, 조완구, 김의한, 신창균, 조일문, 최봉식

민련 : 김규식, 원세훈, 손두환, 최동오, 김붕준, 신숙, 김성향, 신기언, 송남헌, 강무, 박건웅, 권태양, 배성룡, 신철규, 심일병, 리병희, 여운홍, 김시겸

민독당 : 홍명희, 하만호, 김창엽, 전봉화, 박명환, 홍철희, 유익열, 박병직, 최성수, 김무림

남로당, 인민공화당, 신진당, 사회민주당, 민주한독당, 근로인민당, 근로대중당, 농민당, 한국독립당, 청우당, 민주독립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민중동맹, 민족자주연맹, 문화단체총연맹, 여성동맹, 자주여맹, 농맹, 민애청, 전국청년회, 유교연맹, 재일본조선인연맹, 기독교민주동맹, 불교도연맹, 불교청년당, 조선어연구회, 혁신복음당, 민주구락부, 민학련, 반파쇼투쟁위원회, 천도교학생회, 민족대동회, 삼일동우회, 전미회, 민족문제연구소, 삼균청년동맹, 독립운동자동맹, 학병동맹, 민족해방청년동맹, 청년애지회, 남조선신문기자회

(출처-김광운 저 ‘북한정치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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