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전적인 삶을 산 사람은 죽음을 축하하며 반길 것이다 (니체)

 

 가지 않은 길
 -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어느 성교육 강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요즘 대학가에 ‘성인용품가게’가 들어서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대학생들이 모텔에 갈 때 ‘성인용품’을 가져간다고 한다. 얘기를 들으며 우리는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요즘 청춘 남녀는 사랑을 그렇게  하나?’

 청춘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는데 무슨 ‘용품’이 필요하단 말인가? 아마 대학생들은 용품으로 ‘쾌락’을 극대화하려 했을 것이다. 그동안 학교와 학원에서 배운 대로 ‘효율성’을 최대로 높이기!

 인간의 ‘성(性)’은 동물의 성과 다르다. 동물의 성은 종족 보존을 위한 행위다. 하지만 인간의 성은 종족 보존을 넘어 ‘사랑’이 된다. 인간의 성은 육체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행위다.

 그래서 사랑의 신 ‘에로스’는 둘이다. 태초의 대모신(大母神) 가이아의 아들이면서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다. 아프로디테는 에로스를 사랑하는 프시케에게 과제들을 주어 문제를 다 풀면 사랑을 허용해 주겠다고 한다. 프시케는 ‘정신’이라는 뜻이다. 즉 사랑은 고도의 정신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은 가장 ‘원초적인 사랑’이면서 동시에 ‘고도의 정신적 사랑’이다.

 요즘 대학생들이 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단편적인 지식 위주의 공부만 하느라 고도의 정신을 체험하지 못한 그들은 ‘사랑’을 뭐라고 생각할까?

 ‘원초적 사랑’만 하는 그들은 한평생 ‘사랑’에 허기가 질 것이다. 고도의 정신적 사랑으로 승화되지 못한 성 에너지는 어디로 갈까? 정신 분석학자 빌헬름 라이히는 ‘권력욕’으로 간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 이리도 폭력이 난무하는 건, ‘사랑’으로 승화되지 못한 성 에너지들이 중음신(中陰身)처럼 이 세상의 허공에 떠돌기 때문일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서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 안에서 솟아나오는 것, 그것으로 사는 것이 이리도 힘들었던가!’
 
 내 안에서 솟아나오는 것, 그것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원초적 성 에너지 ‘리비도’일 것이다. 이 리비도가 우리 안에서 솟아나와 고도의 정신적 차원으로 승화한다. 그렇게 우리는 육체적인 동물로 태어나 신적(神的)인 존재로 성장해 간다. 우리의 교육은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깊은 허무감에 진저리친다. ‘가지 않은 길’이 있는 것 같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정말 우리 앞에 ‘두 길’이 있을까? ‘가지 못한 길’이 있을까? ‘내 안에서 솟아나오는 것’으로 사는 사람 앞에는 오로지 한 길이 있을 것이다. 공자가 평생 두려워했다던 천명(天命)처럼 그를 어느 한 길로 이끌 것이다. ‘모래 한 알에 우주가 있듯(윌리엄 브레이크의 시 <순수를 꿈꾸며> 중에서)’ 그 길은 그가 가지 못한 모든 길일 것이다.

 전혜린은 울부짖었다. ‘실컷 살지 못했어. 생(生)을 사랑해.’ 우리는 언제 반백년 전에 타계한 전혜린의 정신에서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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