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가 비켜가 모처럼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11일 오전 경기도 마석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서는 이색적인 행사가 진행됐다.
다름 아닌 ‘항일운동가, 민족통일운동가 수암 최백근 선생 이장식’이 거행된 것.
1961년 12월 21일 박정희 쿠데타 세력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당시 사회당창당준비위원회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최백근 선생의 유해가 경기도 구리시 교문리 소재 망우리 묘역에서 이날 11시 마석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으로 이장하면서 동료, 관계자들이 모였다.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의 약력 보고에 이어 추도사가 진행됐다.
1960년 당시 고인과 함께 사회당 활동에 참여했던 황금수 선생은 추도사에서 “선생과 함께 활동할 때 나는 20대였는데 선생은 40대로 지도자였다”면서 “근데 이제 내가 늙어 이렇게 선생 앞에 서게 되었다”며 감개무량해 했다.
그는 최근의 북중 정상회담과 미-중 무역전쟁 그리고 앞으로 있을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소감을 밝히고는 “이제 분단된 조국이 통일될 날이 머지않았다”면서 “지금 생존해 있는 동료들이 조금 더 힘을 내 자주 평화 통일을 이루자”고 강조했다.
박중기 추모연대 상임고문은 “그동안 선생님의 망우리 묘소를 찾자면 추운 겨울에 묘역을 지척에 두고도 길이 없어 산자락 몇 고비를 에돌아야 하는 불편함을 견뎌야 했다”면서 “그런데 김영옥 동지의 헌신적인 노력이 빛을 발해 늦게나마 마석묘역으로 이장하게 돼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박 상임고문 역시 최근의 정세와 관련 북미 정상회담을 강조하면서 “북과 미국의 최고지도자가 마주앉아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 꿈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이 같은 엄중한 정황 아래 선생님의 유택을 이장하는 뜻 깊은 날을 맞고 있다”며 감격해 했다.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은 “선생님의 삶을 보니 어렸을 때 해방운동부터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일관되게 살아오셨다”고 경의를 표하고는 “선생은 남과 북을 오가면서 민족대단결, 좌우합작을 위해서 1인2역, 1인3역을 하면서 그 무거운 짐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운동함으로써 우리에게 교훈을 남기셨다”고 기렸다.
그는 “요즘 통일운동가들에 대해 재심 얘기가 나오는데 역사가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재심은 잘못된 평가로 나올 수 있다”고 경계를 표하면서 “머지않아 역사가 바로 설 때 그 기준에 맞게 선생님의 삶이 재평가되길 바란다”고 위로했다.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은 자신이 직접 고인을 뵌 적은 없지만 남민전 동지들이나 고인의 동지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망우리 묘역에 참배도 줄곧 해왔음을 알리고는, 특히 북쪽에서 고인을 뵐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즉, “2000년 10월 노동당 창건 55돌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신미리 애국열사릉을 참관할 때 뜻밖에도 선생님의 묘비를 보게 되었다”는 것.
권 명예회장 역시 최근 정세를 일괄하고는 “선생님께서 평생 염원이셨던 자주통일세상이 다가오고 있다”면서 “언제나처럼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조국사랑에 헌신할 힘을 달라”고는 이렇게 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마석 민주열사묘역으로 선생님을 다시 모시게 된 것에 대해 모든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헌화와 추모의 노래에 이어 이날 이장식을 총괄한 통일 원로 김영옥 선생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김 선생은 4월혁명의 열린 공간에서 최백근 선생과 함께 혁신계 운동을 하면서 사회당창당준비위 당무부장을 맡기도 했다.
김 선생은 인사말에서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나라가 분단되자 자주 통일을 위해 싸우다가 외세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지만 선생의 정신은 죽지 않있다”면서 “선생의 정신은 우리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민족자주 정신이 최백근의 정신이다”고 강조했다.
이날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장식에는 발언자들 외에도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 조용준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이사장, 장기수 양원진, 통일원로 권상릉, 조영건 6.15학술본부 명예위원장을 비롯해 범민련 남측본부와 사월혁명회 성원들, 그리고 광양에서 관계자들이 참가해 의미를 더했다.
□ 통일뉴스: 최백근 선생의 묘를 이장하게 된 계기는?
■ 김영옥: 선생의 묘가 망우리 묘역에 있었다. 그런데 관리소 측에서 망우리 묘역을 이전한다며 이장을 독촉하는 통지를 여러 번 보내왔다. 처음에는 선생의 고향인 광양으로 이장을 하고자 했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주변 분들과 상의를 해서 이곳에 오게 됐다.
□ 이번 이장에 큰 역할을 하신 걸로 알고 있다. 고인과의 관계는?
■ 4.19 이후 선생을 처음 만났다. 고향이 같다. 전남 광양이다. 어렸을 때부터 고향에서 선생의 명성을 듣고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1960년 7.29선거운동 때 함께했다.
□ 고인은 왜 정치를 했나?
■ 원래는 당시 내가 정치를 하고자 했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고향에서 고인의 사촌동생 되는 의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사무실에 찾아갔더니 나더러 “사촌형님이 국회의원에 입후보 했는데 선거운동 좀 도와달라”고 했다.
“누구시냐”고 했더니 “최백근이다”고 하길래, 그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길래 “한번 만나나 봅시다”고 했다. 1960년 6월 말인가 7월 초에 만났다. 그리고 선거운동에 합류해 내가 찬조연설도 했다. 그런데 낙선했다.
□ 고인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나?
■ 나는 그때 출세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선생에게 왜 정치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선생께서 “나는 할 일이 있어 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목적이 아니다”고 답하길래 놀랐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출세의 길을 접었다. 그 후 사회당준비위가 만들어질 때 함께 일했다. 선생은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맡았고 나는 당무부장을 맡았다.
□ 고인은 어떤 사람인가?
■ 한마디로 혁명가였다. 일제강점기인 어렸을 때부터 항일독립운동을 했으며 초등학교 때 독서운동의 선구자였다. 한때 한국사회경제사를 연구한 경제학자 백남운 선생이 하던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었으며 이론 수준이 높았다. 정치 경제 역사에 해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