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일 / 전 한신대학교 교수


 
‘봄이 온다’는 현재인가 미래인가? 구태여 영어로 번역하자면 ‘Spring has come’과 같은 현재 완료형일 것이다. 4월 27일이면 늦봄이 된다. 이 봄이 가기 전에 마음은 왜 이렇게 초조하고 설레는가? 과연 남북 두 정상들의 만남이 잘 될까? 한반도에 평화는 올 것인가? 승냥이들은 아직도 광야서 피에 굶주리고 있는데.
 
2015년 7월 초는 이재용과 최순실, 그리고 박근혜 3인이 모종의 모의를 할 때이다. 7월 6일 한국에 들어 온지 3일 만인 9일에 11시간의 가택 압수 수색을 받고 경찰조사, 검찰조사 그리고 바로 시작된 재판은 박근혜 탄핵 3일 후인 2017년 1월 12일에 끝났다.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3년, 보호관찰 3년. 그 동안 염려해 주시고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아직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나에게 적용된 국가보안법 죄명은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통일뉴스>에 연재한 것과, 일본 강연, 그리고 미주에서 한 활동과 쓴 글들이었다. 무려 2000여 건의 경찰 수사기록 가운데 단 한 건도 무죄인정을 받지 못했다. 변호사 님들(심재환과 김종귀 향법 변호사팀)께서 누구 보다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1년 사이에 세상이 이렇게 변하게 한 것은 천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주요 죄명 가운데 하나가 이명박 전 대통령 취임 직후에 쓴 글, 북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김일성 회고록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손자병법에 ‘지피지기 필전필승’이란 말이 있다. 전쟁에서 상대방을 먼저 알고 자기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쿠바 핵미사일 위기 때에도 구소련과 미국은 서로 수시로 정보를 교환하였다. 그렇지 않을 때의 전쟁은 이기는 전쟁이 아니고 서로 공멸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즉, 그렇지 않을 때에는 전쟁에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피지기’는 서로 이기는 전쟁을 하기 위해서라고 풀이하고 싶다. 아직 휴전 상태에 있는 남북관계 일수록 지피지기는 필요하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남북 관계에서 ‘지피지기’는 상대방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살기 위해서도 필수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북을 바로 아는 첩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답이 있다고 나는 보았기 때문에 글을 썼다. 남북이 공멸하지 않으려면 서로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남에서 북을 아는 첩경은 회고록에 그 답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문 지상과 방송 매체를 통해 수많은 북한 전문가들이 나와 일가견들을 늘어놓고 있지만, 그 어느 하나도 적중한 것이 있는가? 없었다고 본다. 그 이유는 회고록을 읽지 않고 수박 겉핥기로 북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과 학자들, 누구 할 것 없이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회고록부터 읽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국가보안법에 의하면 회고록을 지참하거나 읽을 경우 회합통신, 유인물 제작 반포, 고무 찬양 등에 걸린다. 나는 법정에서 지피지기를 아무리 강조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통일뉴스에 실린 글을 읽고 국가보안법으로 재판 중인 사람들이 13명이나 된다고 한다. 물론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른다. 북과 중국과의 관계 소위 북중 관계, 그리고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와 세습이란 문제가 첨예한 북에 대한 알아야 할 것들이다.
 
전 8권의 회고록을 검색어로 찾아 볼 때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하나있다. 그것은 ‘민생단’(民生團:이다. 4권에서 주로 다루어지지만 전 8권에 걸쳐 빠짐없이 등장하는 문제가 일본이 조작한 민생단과 그것을 빌미로 조선 공산당원들을 살해한 중국공산당(중공당)의 반민생단 사건이다. 많은 주제들이 있지만 이 하나의 주제에 북중관계, 주체사상, 지도자 숭배와 세습의 문제를 한 눈에 다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 전문가들이라는 논객들마저도 이에 대한 언급은 안하는지 피하고 있다.

2006년도 미국 UCLA 챨스 영 도서관에서 회고록을 구해 읽을 때만 해도 회고록에 대한 역사적 진실성에 대해 회의를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민생단’이란 낯선 단어에 호기심을 가지면서 회고록에 대한 관심은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항일 투쟁에 관한 기록은 과장과 허위가 있을지 몰라도 같은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 간의 살육에 이르는 갈등은 ‘내부자’의 문제로 사실이고 진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4.3사건만 하더라도 그것의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미국의 만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견주어 보면 중국 공산당이 같은 조선 공산당을 살해 한 사건을 그렇게 최고 지도자가 자기 회고록에서 내부자 고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외교적 고려에서도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930년대 초에 일본이 만주에서 조선인들의 복지와 오족협화, 그리고 간도 땅을 중국으로부터 찾아준다는 명분으로 만든 단체가 민생단이다. 이광수와 최남선 같은 지식인들이 친일행각을 합리화 하는 명분이 되었다.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과 특히 지식인들이 거의 모두 이 노림수에 속아 넘어 갔다. 구글 검색어에서는 민생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민생단 사건(民生團事件)은 일제강점기 1930년대 전반에 일본제국 당국이 동만주의 중·조 연합 세력에 조선인 밀정을 잠입하게 하여 중·조 연합을, 항일 유격대와 공산주의 세력이나 중국공산당 조직과 대중단체를 분열하게 하여 와해하게 하려고 획책했던 공작으로 말미암아 조선인들이 서로 일본제국 밀정이라고 의심하여 서로 살해한 사건이다.” 
 
민생단은 생긴지 1년도 못 되어 사라졌지만 중국공산당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조선인들을 일본의 앞잡이라고 마구 잡이로 조선인들을 마구 학살하기 시작한다. 달밤에 달 쳐다보고 고향생각만 해도 민생단원으로 몰아 죽였다. 중국공산당은 무려 5000여 명(500-2000여 명 설도 있음)의 조선공산당원을 학살한 사건이다. 김연수의 ‘밤은 울고 있다’는 민생단 사건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과 김찬과 그의 부인 도개순이 모두 이 때에 중국공산당에 의해 희생된다. 종자운과 동장영 같은 중국공산당의 우두머리들이 주도한 사건이다. 마안산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민생단 혐의자들이 김일성 주석이 찾아가 문건들을 불태우고 그들을 모두 석방한다. 김일성 주석은 다홍왜 회의(1935년 2월)에서 중국공산당과 담판을 통해 반민생단 사건을 종식시킨다.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는 몸을 이끌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중공당의 잘못과 죄상을 낱낱이 그 회의 주최자 중공당을 향해 고발한 이 회의는 유격활동 역사상 장엄한 한 장면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중공당도 예기치 못한, 회의장 주변을 동행한 부하 군인들로 둘러 싼 효과는 선군정치의 효시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실로 총대가 앞서지 않으면 결국 무릎 꿇는다는 담대한 전술전략이었다.
 
1981년 중공은 반민생단 사건 청문회를 열었으며 그 때 동장영과 종자운은 “모르고 한 짓이라”고 변명했다.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모택동에게 처음 던진 항변이 바로 중국공산당이 조선공산당에 저지른 반민생단 과오였다. 회고록이 마치 항일운동 기록물이 주종인 것 같지만 중공당과의 관계가 더 심각하고 치열하였다. 김일성 자신도 항일투쟁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시기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자신과 김정숙 여사도 함께 반민생단 혐의로 몰렸을 정도이다. 북한이 마르크스를 너머 주체사상으로 향하는 빌미가 모두 이 반민생단 사건이라고 본다.
 
중국공산당이 동만 일대에 있던 항일연군을 모두 열하원정에 참가 시키려 할 때에 김일성 부대는 참가를 거부했고, 결국 열하원정은 대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중공당 수뇌부가 판단 잘 못한 두 번째 큰 사건이다. 중공당 동만성 위원장 위증민이 말년에 자기 몸을 의탁한 곳도 김일성 부대였다.
 
이들 사건들에 관한 기록이 회고록에 상세히 적혀 있다. 한국의 북한 전문 논객들은 한결같이 북한이 중국에 예속돼 있고 중국에 고분고분할 줄을 아는 데, 이것은 전혀 사실을 모르는 남에 앉아서 북을 겉핥기로 판단하는 잘못된 판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적어도 회고록 안의 민생단 사건만 하나 들어 읽어도 이런 오판은 안 할 것이다.
 
북의 지도자들이 중국에 당당할 수 있고, 중국 지도자들이 북한에 떳떳하지 못한 이유는 1930년 대 전후의 북중관계를 보아야 바로 알 수 있다. 안중근과 이봉창 같은 의사와 열사들이 기라성 같이 나타날 때에 그 넓고 그 많은 인구가 있는 곳에서 이런 인물하나 없었다. 1948년 내전 때 동북 3성의 경우, 조선공산당의 도움 없이는 혁명에 실패했을 것이다. 
 
이 밖에도 지도자 우상화와 세습 문제도 회고록을 읽지 않고는 단연코 바로 알 수 없다. 마안산에 있던 민생단 혐의자로 죽음 직전에 있던 남녀노소 50여명은 김일성 부대가 맡아 돌봐주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열 살 정도의 어린 아이들은 김일성과 김정숙 여사를 ‘어버이’라 불렀고 김일성은 자기 어머니한테서 받은 16원을 모두 이들을 위해 새 옷을 해 입혔다. 이 때 살아남아 돌아 온 세대를 혁명 1세대라고 한다. 이을설과 전문섭은 당시 10대였으며 지금은 90대가 넘거나 고인이 되었다. 당시 어린 아이들은 김일성 부부를 ‘어버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결코 해방 후에 만들어진 말이 우상화 작업으로 만들어진 말이 아니다.

회고록은 1920년대 말과 1945년까지의 기록이다. ‘지피지기’ 통일을 염원하고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는 남북 대화가 이루어지자면 전 국민 회고록 읽기부터 허락해야 할 것이다. 북한 전문가들이라고 하는 논객들의 겉도는 소리 그리고 ‘탈북자들의 토크 쇼’가 가장 북을 잘 못 알게 하는 것들이라고 본다. 회고록을 읽어야 북에 대해 바로 알고 바른 비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도자의 걸음걸이나 보고 연설할 때의 기침 소리나 분석해 북이 곧 붕괴할 것이라던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가 한 짓이란 이런 글 쓰는 사람들을 국가보안법에 걸어 감옥에 쳐 넣고 입을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모두 감옥에 있다. 이 두 전직 대통령이 저지른 죄과 가운데 남북관계를 파탄 낸 것은 포함 안 돼 있다. 이것이 역사에 길이 남을 죄가 아니겠는가?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의 두 정상이 만난다. 부디 대성공을 바란다. 미국은 뜬금없이 FTA라는 지렛대로 저울질 하고 있다. 앞으로 더 어떤 지렛대를 들고 나올지 모른다. 북중, 북미, 북일, 북러, 한중, 한미, 한일, 한러 등, 수많은 변수가 있지만 가장 주요한 것은 남북 정상 간의 대화이다. 그리고 정상 간의 고리가 주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주요한 고리는 남북 간의 민간교류 전반에 해당하는 교류이다. 정상 간의 교류가 외세의 간섭으로 어렵게 되어도 촛불이 들불같이 번져 나가면 어떤 지렛대도 부러지고 말 것이다.
 
우리 연예인들의 평양 공연과 삼지연관현악단의 서울 공연, 이유 없이 눈시울이 적셔지면서 봄은 오고 있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온다. 가을엔 서울에서 다시 만나자고 한다. 이번 평양 공연에선 북한 노래를 얼마 부르지 못한 것이 이구동성으로 아쉬웠다고 한다. 삼지연관현악단은 그렇게도 많이 남측 노래를 불렀는데 말이다. 경제력 39배라 하면서 북한 노래하나 못 부를 정도로 자신이 없는가? 회고록 하나 읽고 글 썼다고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리는 한 갈 길은 멀어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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