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민족자주문제와 통일문제에 천착해 온 노중선 <통일뉴스> 상임고문의 ‘역대 국회와 통일문제 논의’를 연재한다. 필자는 제헌국회에서부터 20대 국회에 이르는 역대 국회에서 통일문제와 관련한 논의들을 ‘민족화해와 자주통일’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아울러 필자는 향후 국회가 평화통일과 민족자주 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의를 거쳐 민족화해시대에서 분단 극복을 위해 자기 역할에 적극 나설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 연재는 매주 금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5. 제5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1960.7~1961.5)

제5대 국회는 1960년 7월 29일 실시된 총선에서 민의원 233명, 참의원 58명을 선출하여 각각 개원되었는데 민의원 총 233석 중 민주당 175석, 무소속 46석, 사회대중당 4석, 자유당 2석, 한국사회당 1석, 기타 군소정당 5석이었다.
 
이처럼 4.19 직후 정치적 과도기를 맞아 당시 군소 정당의 난립 현상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남북 간의 대화와 교류문제와 같은 지극히 초보적인 통일문제만이라도 제기할 수 있었던 혁신 정치세력이 참패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실망스럽고 불행한 분단 현실이었다. 그나마도 5대 국회는 다음 해 5월 박정희 군부쿠데타에 의해 10개월여 만에 강제 해산되어야했던 단명한 국회였다.

이 시기 4.19민중봉기에 의한 정권교체라는 정치정세의 변화에 따라 그동안 억압되었던 통일문제에 관한 논의들이 여러 형태의 토론모임, 연구회 활동들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학생통일운동 진영은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를 부르짖으며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하기도 했고, 혁신정당 및 통일운동 세력은 신문기자, 문화, 체육, 서신 등 각종 형태의 남북교류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외세배격과 남북협상론을 제기하는가하면 그동안 무력북진통일이나 유엔감시 하 이북 지역 선거만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거론할 수 없었던 논의들이 폭발적으로 제기되었다.
 
이와 같이 그동안 탄압받고 위축되어야 했던 통일논의와 실천운동들이 4.19라는 변혁적 시기를 맞아 활기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의의 수용 기관인 국회에서는 그와 같이 분출되는 민의들을 전혀 담아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1960년 10월 31일 민의원 외무위원회는 ‘한국통일 및 유엔가입에 관한 결의안’을 제출하면서 그 제안 이유로 “한국 국민은 한국에 관한 유엔의 모든 업적과 결의를 감사 존중하면서 이번 유엔총회가 한국 통일에 관하여 보다 더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한다”며 그 실천방안으로서 3개항의 원칙에 입각해야 한다면서 “동시에 한국은 유엔의 주선으로 수립된 국가임은 물론, 유엔이 그 결의로서 한국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정부라 승인하였으며 유엔헌장 제4조 1항에 규정한 의무이행의 능력과 의사가 있는 평화애호국가이므로 유엔에 가입할 충분한 자격과 정당한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보이사회의 일특정 이사국의 한국의 유엔가입 반대는 이유 없는 독단이라 단정치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헌장 제4조 2항의 신규 가입국에 대한 안보이사회의 권고절차는 유엔헌장 정신과 법리면에 비추어 제27조 2항의 수속사항을 적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확신한다. 4.19혁명으로 전례 없는 민주개혁을 성취한 한국 국민은 15년간 갈망해온 조국의 통일과 유엔가입에 대하여 심심한 고려와 목적 달성을 가능케 할 조치를 강구할 것을 재요청한다”(주1)고 하였다.

이에 따라 다음날인 11월 1일 국회 제37차 본회의 토론에서 “강대국에는 지극히 약하고 약소국에는 지극히 강한 것이 유엔의 윤리인데 이 유엔이 설혹 한국 통일을 위한 총선거안을 결의한다 해도 중공과 북괴의 무장해제를 할 힘이 없는 이상 아무런 성과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통일방안은 유엔을 통한 평화적 통일을 계속 추진하는 일방, 북괴의 재도발의 경우에 대비한 북진무력통일이라는 2개의 통일방안이 수립되어야 한다(김응조 의원),
 
“남북한 총선론은 이미 유엔감시하의 총선거와 유엔의 결의에 따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인 한국을 부인하는 결과가 되므로 남북총선안은 이를 반대한다”(김준연 의원),
 
“남북총선거라는 대한민국 주권을 부인하는 통일방안을 대한민국 국회가 논의할 수는 없으므로 통일방안에 대한 논의는 뒤로 미루고 유엔가입에 대한 문제만 논의하자”(유옥우 의원),
 
“한국의 유엔가입에 대한 저해요인은 남북이 분단되어 있기 때문이므로 통일문제를 제외한 유엔가입 문제는 무의미하며 유엔을 떠난 우리의 독자적인 입장에서의 통일논의 역시 곤난하다”(이종린 의원),
 
“현실적으로 유엔에서는 한국문제에 관해서 통일과 유엔가입 문제를 동시에 토의하고 있으며 국내 일부 학생들이 중립론을, 소련과 북괴는 연방안을, 맨스필드 미상원의원은 소위 오지리식중립안을 내 놓고 있는 차제에 국회가 통일문제는 제쳐 놓고 유엔가입문제만을 논의할 수는 없는 문제다”(우희창 의원) 등 여러 논의 끝에 11월 2일 문안을 조정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한국통일 및 유엔 가입에 관한 결의안>을 가결하였다.

“①자주민주독립한국의 건립이라는 유엔의 기본원칙에 따라 한국의 통일에 있어서는 한국인민의 자유와 국가의 안전이 항구히 또 확고히 보장될 수 있는 조치를 강구하고 유엔감시 하에 인구비례에 따라 자유선거를 실시할 것.
②자유선거와 통일 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현존한 공산강대국가의 북한영역에 대한 군사적 지배  와 간섭과 위협이 종식되고 북한지역에 자유질서와 평화가 회복되어야 할 것.
③한국의 독립과 안전을 보전하기 위하여 연방제식이나 중립화통일방안은 절대 배격되어야 할 것.
④대한민국의 유엔가입이 실현되어야 한다.”(주2)

그리고 민의원은 1961년 3월 13일 조영규 의원 외 10인으로부터 <남북통일방안에 대한 국회결의의 재강조를 위한 유엔총회에 보내는 메시지 발송에 대한 결의안>이 제기되었다.
 
그 내용은 “… 지금까지의 한국통일 방안이 유엔감시 하에 이룩하도록 되어 왔던 것이 근자에 와서 국제감시 운운하는 말이 나와서 통일방안에 대한 일대 혼선이 야기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대한민국 국회는 한국의 통일방안에 대해서 우리들의 주장은 하등 변함이 없으며 여하한 변경 있는 유엔의 결의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유엔은 종전의 결정을 관철하여 하루바삐 한국의 통일이 달성되어 자유롭게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할 것을 요청한다는 요지의 메시지를 유엔총회에 보내기 위해 본 결의안을 제안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김준연 의원은 “우리의 통일방안은 1960년 11월 2일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결정한 ‘통일독립민주한국을 수립한다’는 유엔의 기본원칙에 따라 한국국민의 자유와 국가의 안전이 항구히, 또 확고히 보장될 수 있는 조치를 강구하고 대한민국 헌법절차에 의하여 유엔감시 하에 인구비례에 따라 자유선거를 실시할 것이라는 원칙을 벗어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윤길중 의원은 “대한민국 헌법절차에 의한 유엔감시 하의 통일선거란 통일을 하지 말자는 말과 같다. 근래 일부 우방 국가들에 의하여 ‘유엔이 승인하는 형태의 국제감시 하의 한국통일’이란 좀 더 신축성 있는 통일방안이 제시됨으로써 그들이 한국통일 문제를 보다 성의 있게 다루고자 하는 기운이 조성되고 있으니 우리는 기성 관념에만 사로잡혀 있을 것이 아니라 국제정세와 발맞추어 보다 성실성 있게 문제를 다루어야 하므로 본 건을 반대한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리고 박준규 의원은 “… ‘유엔감시’ 또는 ‘국제감시’ 등 어휘자체에 신경을 쓸 만한 가치는 없다. 다만 우리의 주장은 그 명칭이 어떻든 간에 선거감시단은 자유진영 국가로 구성되어야 하고 공정한 선거가 이루어 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이상 어떠한 유엔결의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고 했고, 이철승 의원은 “윤길중 의원은 고식적이고 배타적인 통일방안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신축성 있는 통일방안을 모색하려고 하는데 진취적이고 신축성 있는 통일방안이 과연 어떤 것인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주3) 등 찬 반 토론이 있었으나 원안대로 가결되었다.
  
제5대 국회는 4.19민중봉기로 말미암은 개헌에 의해 정권과 국회가 동시적으로 새롭게 출범할 수 있었던 민주당 정권의 의원내각제 정부와 양원제 국회로 개원되었다. 그렇다면 5대 국회에서의 통일문제 논의의 내용은 당연히 각종 형태로의 남북 간 대화와 교류는 물론 더 나아가 분단 극복을 위한 구체적인 문제들에 관한 논의가 활기를 띠어야 했다. 또한 그렇게 해서 국회는 민족구성원 대중의 민족통일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충분히 반영하여 담아낼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통일 분단독재정권 시기의 국회에서 가능하지도 않은 ‘유엔감시 하 북한 지역만의 선거’만을 주장하면서 오직 분단의 안정적 유지에 급급한 논의들로 일관했던 것과의 차이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논의 내용의 질적 수준에서도 4.19의 역사적 의미와는 매우 동떨어진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 북측에서 연방제 방식의 통일 제안을 비롯해서 각종 형태로 남북 간의 대화와 교류 접촉을 제의해 왔지만 이전 국회와 다름없이 철저히 외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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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제37회 국회, 民議院會議錄, 제37호(1960.11.1.) 4쪽
2.『國會史 (제2권(제4대국회ㆍ제5대국회ㆍ제6대국회)』, (1971.12), 402쪽
3.『國會史 (제2권(제4대국회ㆍ제5대국회ㆍ제6대국회)』, (1971.12), 4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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