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덕 (원불교 교무)


제가 기린을 만난 것은 다섯 살 무렵 서울 동물원에서 입니다.

아버지 손을 잡고 서울 외할머니 댁에 올라가던 날, 버스를 타고 심한 멀미와 구토로 힘들어했고, 그런 저를 달래주려고 외할머니는 서울 창경궁 동물원에 데려가셨습니다. 

아주 어린 나이였지만 우렁찬 목소리로 포효하는 호랑이나 사람들 앞에서 재간을 부리는 귀염둥이 원숭이보다 기린이 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5미터에 이르는 긴 다리와 높은 목, 웃음을 머금은 묘한 표정, 품격 있고 멋스러운 알록달록한 문양과 뿔, 어느새 멀미의 고통은 사라지고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까만 사슴 눈을 가진 신기한 기린을 보던 기억이 선합니다. 
 
중국의 전설 속에서 기린은 성인이 태어날 때면 나타난다는 상상의 동물입니다. 기린은 자애심이 가득하고 덕망이 높은 생물이라 살아있는 것은 동물은 물론 식물도 먹지 않고 벌레와 풀을 밟지 않고 걷는다고 전합니다. 울음소리는 음계와 일치하며 발자국은 정확한 원을 이루며 꺾어질 때는 정각으로 꺾는다고 합니다. 수명이 1,000년에 이르고, 기린을 보면 사람들은 길조라고 믿어왔습니다. 이런 기린의 전설과 상징성 때문에 재주가 뛰어나고 지혜가 비상한 사람을 가리켜 기린아(麒麟兒)라고 불러왔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저는 기린을 평화의 대명사처럼 여겼습니다. 지금 평화일기를 적어가는 책상 앞에 놓인 기린 삼총사는 늘 선한 눈빛으로 바라봐 줍니다. 길을 가다가 또는 어떤 장소에서 기린 인형을 만나면 잠시 멈추고 기린과 눈을 마주치며 마음의 춤을 추게 됩니다.

평화의 글을 쓰고 평화의 길을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려는 저에게 평화의 해석은 경우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늘 관통하는 중요한 원칙과 개념이 있습니다. 평화는 공존이고 공생이며 자리이타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 한 생명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 자신의 겨드랑이 삶의 터전으로 선뜻 내어주는 기린의 품성과 이를 거리낌없이 받아들이며 삶을 이어가는 노랑부리소등쪼기새의 관계에서 또 다른 평화의 모습을 발견한다. [사진제공-정상덕 교무]

얼마 전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의 사바나에 사는 노랑부리소등쪼기새와 기린의 아름다운 공생의 풍경을 한 신문의 글에서 만나면서 저는 환성을 질렀습니다.
찌르레기과의 노랑부리소등쪼기새는 초식동물의 등에 올라타 진드기 등 기생충을 잡아먹고 삽니다. 그래서인지 아프리카의 초식동물들은 이 새가 등이나 옆구리에 앉아 이리저리 털을 헤집는 것을 귀찮거나 위협으로 느끼지 않고 관대하게 용인을 합니다. 널리 알려진 공생관계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노랑부리소등쪼기새와 기린의 공생관계입니다. 이 새는 놀랍게도 흔들리는 기린의 배 아래쪽 겨드랑이를 잠자리로 삼습니다. 그 이유는 높은 위치에 있어 포식자로부터 안전을 지킬 수 있고, 따뜻함과 먹이를 구하기 위해 이동하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연구를 통해 보면 둘 사이는 한쪽이 이득을 더 얻고 다른 한쪽은 큰 이득이나 손해를 보지 않는 ‘편리 공생’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생명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 자신의 겨드랑이를 삶의 터전으로 선뜻 내어주는 기린의 품성과 이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며 삶을 이어가는 둘의 관계에서 또 다른 평화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서 평화는 이처럼 상리공생의 관계를 찾아가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쪽만 이익을 보는 ‘기생’ 관계를 넘어서 서로서로 이익을 얻는 ‘상리공생’의 관계를 회복하는 노력이 바로 평화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삶일 것입니다. 이렇게 노랑부리소등쪼기새가 기린의 겨드랑이에서 잠드는 이유를 깨닫습니다.
 
2018년 3월 25일 정 상 덕 합장

 

 

원불교 교무로서 30여년 가깝게 시민사회와 소통하고 함께해 왔으며, 원불교백년성업회 사무총장으로 원불교 100주년을 뜻 깊게 치러냈다.

사회 교화 활동에 주력하여 평화, 통일, 인권, 정의와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늘 천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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