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덕 (원불교 교무)
 

평화 세미나를 준비하며 과학의 길을 걷는 과학자 3분에게 평화에 과학을 연결할 수 있는 분을 물었을 때 똑같이 추천하신 분이 노벨화학상 수상자 라이너스 폴링(미국 1901~1994)이었습니다.

20여 년간 영광 핵발전소의 부당성을 알리고 핵폐기장 설치에 반대하며 홍농 원자력발전소 앞에서 무작정 앉아있던 시절, 인권운동을 하는 양심있는 핵과학자를 쫓아다니며 핵의 위험성, 부당성을 강연해달라고 했지만 “때가 안됐다, 제자들이 걱정됩니다” 등으로 늘 실망을 안겨주던 아쉬운 기억도 있었습니다.

왜 우리에게는 핵은 개발해서도, 보유해서도, 사용해서는 더더욱 안된다는 거리의 과학자가 없는가? 라이너스 폴링의 용기, 지식인의 양심, 모두를 위한 선한 과학자의 삶을 평화일기에 모시고 싶습니다.

"나는 전 세계 인류의 목표는 무장해제라고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에너지와 각자의 시간 그리고 각자의 돈을 들여서 이 위대한 목표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정신의 선두에서 세상을 리드하다

1954년 노벨화학상, 1963년 노벨평화상까지 두 번에 걸쳐 노벨상을 단독 수상했던 과학자 라이너스 폴링은, 과학자가 시대정신의 선두에서 세상을 리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성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분자 생물학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위대한 과학자인 동시에 인류를 위한 반전·반핵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했던 한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습니다. 과학자가 어떻게 실험실 밖에서 과학으로 야기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책임 있게 고민하고 용기를 내야 하는지 화두를 던진 분입니다.

수소폭탄 실험에 반대하여 정치적 활동에 나서다

폴링은 특수한 형태의 분자인 결정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으며,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책 가운데 한 권인 『화학결합의 본성 및 분자와 결정의 구조』를 1939년에 발간했습니다. 1954년 폴링은 화학결합의 본성에 관한 연구로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았고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폴링은 정치활동으로 더욱 두드러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폴링은 아인슈타인이 의장을 맡았던 원자과학자 비상위원회에 가입해 전쟁과 핵무기에 대한 반대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폴링의 이러한 활동은 1954년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 이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1946년부터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폴링은 반전·반핵·평화운동에 적극 참여합니다. 특히 전 세계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핵실험 중지를 지지해 달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해, 9,000명이 넘는 과학자들의 서명을 모아 추가적인 핵실험 중지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유엔 사무총장에게 제출하게 됩니다. 

1940년대 초반에 이미 원자탄 개발을 목적으로 맨하탄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오펜하이머가 폴링에게 화학책임자를 맡아 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으나 폴링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또 한 번의 노벨화학상 대신 핵실험을 넘어 모든 무력의 형태에 항거하다

폴링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원자폭탄의 위험을 알리는 강연을 수행하던 시절, 미국은 1950년 2월부터 매카시즘의 선풍에 휘말리게 됩니다. 당연히 반핵운동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던 폴링은 표적의 대상이 되었으며, 칼텍대학 당국과 정부로부터 뒷조사를 받기 시작했고 언론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들어야 했습니다.

1957년부터 폴링은 부인 에바와 함께 대기 중 핵실험 금지를 위한 전 세계인의 서명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과학자로서 핵전쟁의 위험과 지상 핵실험이 인체 건강에 미치는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 로터리클럽, 시청강당, 대학, 강의실을 구별하지 않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대기중 핵실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대중강연의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폴링의 이런 활동은 전 세계 언론의 주목거리가 되었고 급기야 한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에서 수소폭탄의 아버지 에드워드 텔러와 핵실험과 관련하여 공개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주요 일간지에서 반핵문제를 다루는 일이 어려워지자 폴링은 『더 이상의 전쟁은 없다』라는 책을 발간하는데, 이 책은 과학과 정치가 결합되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과학이 전쟁을 위한 파괴의 무기가 아니라 인류평화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 1962년 라이너스 폴링이 백악관 앞에서 미국의 핵실험 재개에 항의하며 벌인 시위 모습. [사진제공-정상덕 교무]

폴링은 1962년 어느 날, 오전에 백악관 앞에서 "케네디씨 우리는 핵실험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반핵시위를 하다가 저녁에 백악관 만찬에 초대받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그에게 “굽히지 말고 계속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라”고 조언했다고 합니다. 

1963년 폴링은 또 한 번의 노벨상인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1963년 10월 10일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영국 총리,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육지에서 핵실험을 금지하는 조약에 서명했고 노벨상위원회는 같은 날 폴링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공포했습니다.

당시 노벨상위원회 위원장 무너잔은 폴링이 끊임없이 반핵운동을 전개해 왔는데, "그는 단지 핵무기 실험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핵무기의 확산과 나아가 핵무기 사용을 반대했으며 국제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되는 모든 형태의 무력에 항거했다"고 말했습니다.

칠흙 같은 어둠을 헤쳐 미지의 길을 가는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과학자

아무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길을 걸으며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는 과학자들은 때로 무모해 보이기까지 할 만큼의 도전의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폴링이 온갖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반핵운동의 최전선으로 나아가는 데는 아마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2018년 3월 24일 정 상 덕 합장

 

 

원불교 교무로서 30여년 가깝게 시민사회와 소통하고 함께해 왔으며, 원불교백년성업회 사무총장으로 원불교 100주년을 뜻 깊게 치러냈다.

사회 교화 활동에 주력하여 평화, 통일, 인권, 정의와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늘 천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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