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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사찰을 가다⑤ 성불사(成佛寺) 상편<연재> 최재영 목사의 남북사회통합운동 방북기(92회)
최재영  |  9191j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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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12  10: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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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정방산과 성불사를 향해 출발하다
        
필자의 경험상 북측은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다종교를 허용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인민들은 종교에 대한 일반적 인식에 있어서 개신교나 천주교에 비해 불교에 대해서는 좀 더 우호적인 듯해 보였다. 불교신자들이 사찰 순례하듯 만일 개신교나 천주교 신자들이 이북에 있는 교회당이나 성당 순례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선 하고 싶어도 갈 곳이 없어서 가지 못한다. 해방 전부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옛날 교회나 성당이 별로 없을 뿐더러 전쟁 이후 개건이나 신축을 한 교회당이나 성당이 현재까지도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는 칠보산, 묘향산, 구월산, 금강산 등 4대 명산 위주로 고찰들이 남아 있거나 복원된 사찰들이 전국적으로 70여개에 이른다. 그렇기 때문에 북을 방문하는 불교신자들은 사찰순례를 겸해 명승지 관광도 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에 있다.

또한 북측에는 불교와 관련된 문화재나 유적지들이 많기 때문에 대중들의 종교 선호도와 친밀도에 있어 불교는 타종교에 비해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직 상징성에 머물러 있지만 남측 조계종에서 금강산 신계사를 복원한 후 조계종 스님이 북측에 주지로 파견되는가 하면 개성에 있는 영통사를 남측 천태종에서 복원한 것처럼 앞으로도 이러한 남북 불교 간의 소통과 교류를 통한 공동 불사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야만 한다고 본다.

필자는 10.4 선언을 기념해 조직된 남북해외동포 통일토론회 미주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기 위해 방북했다. 남측에서는 올라오지 못해 결국 북측과 해외동포만의 행사가 되었으나 평양 땅에서 북측과 해외동포 간의 열띤 통일 토론회를 벌였다는 사실 자체는 매우 역사적인 사건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체류기간 중에 통일로에 위치한 ‘조국통일3대헌장탑’에 들려 참관을 마친 후 황해북도 사리원 인근에 있는 정방산을 찾아 그곳 경치를 구경하고 성불사를 참관하기 위해 개성고속도로에 몸을 실었다. 필자는 이번 방문 이후로 한 번 더 성불사를 참관하였다.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도로 좌우에는 우리 일행을 환영하듯 정겨운 코스모스들이 하늘거리며 무성하게 피어 있었고 오가는 길 도로의 한가운데는 야트막한 사철나무들이 한 줄로 심겨져 늘어서 있어 중앙분리대 역할을 했다. 그뿐 아니라 가을 추수철을 맞아 논밭에는 벼이삭들과 옥수수들이 황금벌로 보이며 추수하는 농민들의 바쁜 움직임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한 시간 정도 달리니 뒷산을 배경으로 깔끔한 주택들이 밀집된 마을들이 평온하게 자리 잡은 모습들이 여기저기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덧 정방산 팻말이 보이자 우리를 태운 차량은 고속도로를 벗어나 산중 진입로로 들어섰다. 정방산은 사리원시에서 약 8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보니 이곳 주민들은 보통 ‘사리원 정방산’으로 통했다. 멀리서 바라보니 높이가 채 5백 미터도 되지 않을 듯한 산세로 보였다. 정방산에 가까이 다다르자 산속에는 소나무들과 이름 모를 나무들이 빼곡하게 산을 뒤덮고 있어 과연 듣던 대로 명산의 기품이 느껴졌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정방산은 재령벌을 끼고 있어서 그런지 주변 산들에 비해 유난히 높아 보이고 산세도 도드라지게 보인다고 했다. 황해도의 구월산이나 멸악산처럼 험난하고 수려하지는 않지만 아늑한 느낌을 준다고 했다. 그리고 예로부터 재령평야 인근에 사는 인민들은 자신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산이라서 그런지 목숨같이 여기는 산이라고 전해 주었다.

   
▲ 성불사 경내 대웅전인 극락전과 5층 석탑 모습. 탑은 국보유적 32호로 지정돼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정방산 터널 입구 모습. 필자가 탑승한 차량 안에서 촬영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필자를 태운 차량이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성불사가 있는 정방산을 향하는 도로에 진입한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정방산성 입구인 남문 앞에는 인근 주민들이 자주 찾아와 배구경기를 즐긴다고 한다. 자전거 앞에 입장권 매표소가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남문 우측 운동시설에서 주민들이 배구경기를 준비하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돗자리를 깔고 평양서 주문한 곽밥(도시락)을 먹다
         
필자가 찾은 정방산은 주민들이 친근하게 여기며 자주 찾는 생활 명소이자 관광명소로 이미 자리매김 했음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그동안 북측 당국은 정방산 30리에 축조된 산성을 재정비하는 것은 물론 성불사의 유물과 유적들을 복원하는 대대적인 사업을 벌여왔다고 한다. 더불어 정방산 내에 각종 주민 편의시설들을 개발하는 사업을 벌여왔는데 1997년에는 농구장과 배구장 등 체육시설과 낚시터, 잔디밭, 찻집, 식당, 상점은 물론 작은 동물원까지 만들어 유원지화 하였으며 도로를 정비하고 주차시설까지 만든 것은 물론 버스노선까지 신설해 주민들의 편의를 도모했다고 한다.

필자 일행을 태운 차량이 산성 입구에 다다르자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인근 주민들이 배구 경기를 즐기려고 준비하는 모습들과 여기저기 삼삼오오 여가를 즐기고 있는 젊은 남녀들이  보였다. 안내원은 북측 인민들이 백두산 3대장군이라고 부르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정숙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서두에 꺼내면서 본격적인 해설을 시작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생모인 김정숙에 대한 호칭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항일 려성투사“라고 불렀다. 특히 이들 3대장군들이 살아생전 정방산과 성불사에 깊은 애정을 보인 일화나 현지지도에 관한 여러 일화들을 들려주기도 했다.

어느덧 점심때가 되어 시장기가 돌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으니 일행들은 우선 평양에서 주문해서 가져온 도시락(곽밥)을 먹은 후에 참관을 하기로 했다. 1인당 주어진 식사메뉴는 김밥과 고급스런 도시락을 각각 먹을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했기 때문에 매우 푸짐했다. 정방산 한 가운데 조성된 호수가 옆 양지바른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음식을 진설해 놓으니  군침이 돌 정도로 맛나 보였다. 안내원과 기사를 포함해 전체 일행들은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음식을 나눴다. 주변 울창한 숲속에서 퍼져 나오는 맑고 상큼한 공기를 맡으며 식사를 즐기니 꿀맛처럼 느껴졌다.

때마침 우리 주변에 있는 오솔길을 따라 산을 오르내리던 인근 주민들 중에는 자신들이 애써 떠온 약수터 샘물을 인심 좋게 통째로 갖다 주어 식사의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식사 후에는 호수와 폭포 주변을 산책했으며 호수 주변에는 자신들을 만수대창작사 소속이라고 밝힌 남녀 화가들 서너 명이 각자 흩어져 앉아 그림 그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필자 일행이 한참 식사를 하고 있는 도중에 우리가 앉아 있는 돗자리 주변에는 소풍 나온 초등학교 어린이 일행들과 생수통을 들고 온 할머니 서너 분이 낯선 이들의 식사하는 모습을 신기한 듯 물끄러미 쳐다보는 바람에 몹시 민망했다.

   
▲ 일행과 함께 평양에서 주문한 점심 도시락을 먹기 시작하려는 필자.[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각자 1인당 2개의 도시락이 지급되어 점심식사가 매우 풍성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분단 깃발을 든 소학교 어린이들과 교원들이 성불사로 소풍을 나왔다. 1분단 규모는 12명이라고 한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소풍 나온 소학교 어린이들의 표정이 매우 밝고 명랑해보였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소풍 나온 소학교 어린이들과 교원들이 성불사 앞 휴식처에 모여 있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최고지도자들과 얽힌 정방산과 상불사 이야기들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북측 당국은 군인들까지 동원해 이곳 정방산 일대를 정치사상 교양구역뿐 아니라 찻집과 낚시터 등을 새로 만들어 대중문화 휴식구역, 체육과 유희 오락구역들을 조성하며 주민 편의시설과 특색 있는 유원지로 바뀌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는 김일성 주석의 교시에 의해 그 이전부터 꾸준히 개발하다가 김정일 시대에 접어든 1997년 여름부터 다시 한 번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 정방산뿐 아니라 정방산의 두 배 높이가 되는 구월산도 광유원지로 탈바꿈하는 대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여러 차례에 걸쳐 현지지도를 하며 관광지 조성사업과 문화후생시설, 문화유적지 보존과 관리에 대한 철저한 지침을 내리면서 이곳이 오늘날처럼 탈바꿈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었다. 또한 백두산 3대 장군(김일성, 김정일, 김정숙) 외에도 반일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던 김형직 선생의 혁명사적도 이곳 정방산에 깃들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의 경우, 창덕소학교 시절에 정방산으로 소풍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역사유적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그런 이유로 해방 직후인 1946년부터 이곳을 자주 찾아 이곳이 선조들의 애국심이 깃든 곳이라며, 정방산을 인민의 유원지로 꾸리도록 지시하였다고 한다.

뒤늦게 합류한 주지 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목란꽃이 북측의 공식 국화로 결정된 배경에는 소학교 시절의 소년 김성주(김일성 주석)가 이곳으로 소풍을 와서 처음 보았던 목란꽃의 매력에 흠뻑 빠지며 큰 감명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후 1964년 8월 19일 김 주석이 이곳을 직접 찾아 목란을 국화로 결정하도록 교시했다고 한다.
 
“김일성 수령님은 1923년 4월 창덕학교시절에 교원, 학생들과 함께 정방산에 원족(소풍)을 오시어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와 귀중한 력사문화유적에서 깊은 인상을 받으신 후 항일 무장투쟁시기에도 정방산에 대하여 잊지 않으셨습니다. 1962년 8월과 1964년 8월 19일, 1968년 5월을 비롯해 여러 차례 이곳 정방산을 찾으시고 경치가 아름답고 문화유적이 많은 이곳을 근로자들의 문화휴식터로, 훌륭한 교양장소로 잘 꾸릴데 대하여 교시하셨으며 어느날 이곳을 찾아주시어 목란이 우리 조선의 국화가 되도록 이곳에서 발의하셨습니다.”

아울러 김정일 위원장도 1962년 8월, 1969년 3월, 1997년 5월을 비롯해 여러 차례 이곳을 찾아 인민의 문화유원지로 더 잘 꾸리도록 현지지도를 했으며 이곳 정방산 찻집 이름도 직접 지었다고 한다.

“김정일 장군님은 1997년 5월, 성불사를 직접 돌아보시면서 ‘정방산유원지를 찾는 사람들이 우리 선조들의 재능과 슬기가 깃들어 있는 성불사를 비롯한 문화유적들을 돌아보면서 애국애족의 넋을 더욱 깊이 간직할 수 있게 그에 대한 보존 관리사업을 잘하여야 한다’고 가르쳐 주시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당국과 성불사의 관리인들은 모두 여섯 채의 목조 건물들과 5층 석탑 그리고 사찰 유물들을 원상태로 복원하기 시작해 가장 먼저 응진전과 극락전, 청풍루의 단청칠 부터 새로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지붕공사는 물론 마루를 다시 깔아 당대의 건축술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 6.25 전쟁 시기 미국의 폭격으로 파괴된 웅진전과 그곳에 모셔진 500여 나한상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해 다시 응진전으로 모셨으며 유적과 유물들을 옛 모습대로 복구하는 정성을 기울여 왔다고 한다.

이처럼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역사에 대해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이와 같이 모든 유적지와 문화재의 상태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이곳 관리원들은 명부전, 청풍루의 지속적인 지붕보수는 물론 정방산성 성곽 보수, 성불사 주변의 석축과 사방공사 보수, 나무심기와 관리 등을 지속적으로 신경 쓰고 있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과학자들과 전문가를 동원해 사찰의 옛 건축물들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과학기술적인 방안들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보존 관리에 적용하고 있다고도 한다.

   
▲ 김일성 주석이 정방산을 방문해 이곳 목란꽃을 북측의 공식 국화로 지정한 것을 설명한 기념비.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성불사의 역사를 기록한 ‘성불사 기적비’에 대해 설명하는 성불사 주지 법성 스님.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제 밤에 울어야 할 닭이 대낮에 운다”고 할 정도로 깊은 산중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정방산은 행정적으로 황해북도 황주군과 봉산군 경계에 있으며 정방산이라는 명칭은 봉우리들이 서로 잇닿아 정방형을 이루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산 높이는 481m이며 둘레는 12km인데 그 둘레를 따라 돌성(정방산성)이 남한산성처럼 축조된 것으로 보아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군사적 용도의 산으로 적극 활용한 것으로 보였다.

스님의 말에 의하면, 이곳 정방산이 옛날에는 얼마나 숲이 울창했던지 “제 밤에 울어야 할 닭이 대낮에 운다”고 할 정도로 우거졌다고 한다. 옛날에는 호랑이들이 인근 지역 사람들에게 자주 출현했는가하면 현재도 각종 맹수들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맹수들 외에도 산중에는 노루, 오소리, 너구리, 다람쥐, 꿩, 매, 전갈 같은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딱따구리를 비롯한 귀한 조류들도 많다고 한다.

숲이 우거지고 물이 맑아 경치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역사 유적들이 많아 명승지로 분류된 곳이다 보니 전국에서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내가 봐도 병풍처럼 둘러선 절벽과 사방에 솟아오른 봉우리들과 2단 폭포 등이 서로 운치 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주민들은 마치 이 산을 남부지역 평야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여기고 있다고 한다.

특히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인해 기묘하게 생긴 봉우리들과 해발 100m 이상의 기암절벽들은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갖가지 꽃들과 울창한 수림이 한데 어울려 장관을 이루었다. 기암절벽들은 서로가 그 키를 자랑하듯 솟아나 있는데 그 성분은 대부분 규암과 결정편암으로 구성돼 있다고 한다. 또한 이곳 절경이 워낙 아름다워 떠나지 못하고 결국 바위로 굳어졌다는 거북형제봉과 처녀총각바위, 낙타바위 등 갖가지 전설들을 안고 있는 기암절벽들도 많았다. 내가 보기에도 봉우리들과 능선을 따라 쭉 둘러막힌 모양이 정방향을 이룬 듯 보여 실제로 이 산 이름을 왜 정방산으로 부르는지 알 수 있을 듯했다.

또한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비롯해 참나무, 밤나무를 비롯해 여러 가지 과일나무들과 목란, 진달래 등 560여종의 식물들이 살고 있다고 하니 국립수목원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여겨졌다. 정방산의 양 기슭을 따라 돌배나무, 살구나무, 벗나무들이 꽉 들어찼고 안내원과 스님의 말에 의하며 꽃피는 춘삼월 계절이 오면 온 골짜기가 과일꽃 향기로 넘친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노송 같은 소나무는 기본이고 참나무, 단풍나무, 물푸레나무, 다릅나무, 박달나무, 산살구나무, 돌배나무, 복숭아나무 같은 키나무, 목란꽃나무, 진달래, 철쭉나무, 싸리나무, 개암나무, 분지나무 등이 산속 여러 곳에 군락으로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정방산의 동쪽 기슭으로는 입석천이라고 부르는 냇가가 흐르고 서쪽 기슭으로는 사리원에서 황주 사이에는 도로가 훤하게 뚫려 지나는데 사리원까지는 약 8㎞ 정도의 거리라고 한다,

   
▲ 계곡에서 내려온 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정방산 호수.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정방산 호수 정원들은 볼수록 풍치가 고급스러웠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정방산 호수의 작은 수문보(댐) 앞에선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만수대창작사 소속 여성 화가들이 화폭에 그림을 담기에 여념이 없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만수대창작사 소속 남성 화가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정방산 자연폭포와 인공폭포 기능
     
정방산 울창한 수림 속에는 여러 전설을 담고 있는 약수터들도 많았으며 작은 규모의 인공연못과 자연 연못들도 눈에 띄었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산성 안에는 모두 4곳의 연못과 7곳의 우물이 있다고 한다. 또한 정방산의 상징적인 장소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폭포였다. 정방리 정방폭포는 무려 지상 100여 미터의 높이에서 폭포수가 쏟아지는데 물줄기와 함께 희뿌연 물안개가 마치 분무기로 뿌리듯 사뿐히 내리고 있었다.

폭포수가 낙하하는 과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미세한 물방울들이 공중으로부터 마치 억만 구슬이 되어 사뿐히 떨어지는 듯 신비함마저 보여 그 광경은 볼수록 장관이었다. 여느 일반 폭포와는 달리 우뚝 솟은 바위 정상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라 그런지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물줄기의 길이는 정확히 84미터나 된다고 하며 폭포가 낙하하는 지점을 가보니 바위가 뚫려 작은 못을 이루고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이곳에 물이 고갈될 때는 인공폭포 형식으로 가동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물론 폭포가 가동되기 위해서는 막대한 전력이 소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가뭄이 닥치거나 담당자들이 볼 때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이 오면 강력한 펌프를 가동해 정상 높이까지 물을 끌어올려 폭포수를 선보일 수 있다고 하니 그 정성과 배려심이 대단해보였다. 안내원과 스님은 “인민들의 휴식처를 보다 더 아름답게 가꾸고 해내외 관광객들의 방문하면 큰 만족을 줄 수 있도록 위대한 장군님께서 만들어 주신 선물이 바로 이 폭포수입니다”라며 폭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또한 워낙 정방산의 공기와 풍치가 좋다보니 최근 정방산 일대에는 이런 맑은 공기와 풍경을 기반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풍치요법’을 하는 곳도 생겨났다고 한다. 이른바 ‘사리원 정방산 기후요양지’가 풍치요법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정방산의 산림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떤 환자든지 마음이 평온해지며 안정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봄, 여름, 가을의 경치 외에도 겨울에도 산 정상을 가득 뒤덮은 백설의 절경이 아주 볼만하다고 했다. 멀리 사리원시 북부 지역의 겨울 풍경을 뒤로 하면 마치 정방산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형국인데 그런 풍경들이 볼수록 장관이라고 한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이 산을 빗대어 속담에도 인용할 정도로 오랜 세월을 백성들과 친근하게 지내 온 산이었다. 두 가지 속담을 소개하자면 첫째, 아무리 여러 모양으로 변해도 결국은 똑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비유하는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정방산’이라는 속담이 있는가 하면, 누구든지 쉽게 잘 속아 넘어갈 만큼 이야기를 잘 꾸며대거나 허풍을 잘 떠는 사람에게 ‘정방산도 돌려 꾸민다’라는 이야기가 속담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 정방폭포 모습. 바위 정상에서 낙하하는 폭포수는 인공폭포 기능도 갖추고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정방폭포 낙하 지점에는 오랜 세월 패인 바위 못이 형성돼 있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각 시대마다 외세의 침략을 막아준 유서깊은 정방산성
       
안내원에 말에 의하면, 과거에는 황해남도 재령과 연결되어 있는 이곳 정방산을 ‘천성산(千聖山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무려 30리길에 달하는 정방형 형태의 산맥으로 둘러싸여있는 능선을 따라 돌덩이로만 성을 축조했으니 만리장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이곳에 쏟아 부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1231년 몽골침략을 시작으로 1361년에 홍두족, 1592년 임진왜란, 1636년 청나라와의 전쟁 등 중요한 위기 때마다 적군들을 방어하였으며 이런 산세를 활용해 왜적이나 오랑캐들을 물리치고자 했던 조상들의 지혜가 새삼 놀랍게 느껴졌다.

돌로 축조된 산성의 규모가 정방산 입구부터 산마루에 이르기까지 30리 길이가 되다보니 어디에 서있든지 여기저기 육안으로 성을 바라 볼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처음으로 축성된 이 산성은 현재도 북측 서해안 일대에서 남북으로 통하는 기본 통로를 막기 때문에 황해도 지방의 으뜸가는 요새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험한 산세를 이용해 축조된 이 정방산성이 과연 임진왜란 시기와 병자호란 시기에 의병부대들의 근거지가 될만해보였다. 특히 황주와 봉산 일대에서 활약하던 의병부대의 주 근거지로도 활용됐다는 것으로 보아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방경계의 중요 요충지역이 되는 이곳 산성의 정확한 수치를 보면 정방산성 내부의 넓이가 약 2㎢ 규모라고 한다. 이 성은 고려시대에 처음 쌓은 이후, 조선시대 정묘호란 이후 다시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산성 안에 있는 연못들과 우물들로 인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이 있을 때마다 당시 재령평야 주민들과 아군들의 도피처가 되었다고 한다.

비록 조선후기 이후에는 제대로 보수하지 않아 원상태에서 많이 훼손되었으나 동서남북에 세워진 문루는 아직도 매우 운치 있어 보였다. 또한 활과 총을 쏘거나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도록 쌓은 작은 성벽인 ‘타첩(陀堞)’이나 ‘사혈(射穴)’이 각각 1,336개소가 있다고 하니 당시 그 규모를 짐작케 했다. 특히 포진지에서 대포를 쏘는 구멍인 ‘포혈(砲穴)’도 4,800개소나 된다고 하니 당시 치열한 격전이 어느 정도였는지도 상상할 수 있었으며, 산성의 외부로 돌출시켜 적을 향해 사격할 수 있게 쌓은 성벽인 ‘치성(雉城)’도 아직도 7곳이 남아 있었다.

그뿐 아니라 성안에는 무기 창고터, 식량 창고터는 물론 당시 정방산성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책임자였던 성장(城將)을 기념하는 비석도 서 있었다. 당시 성장은 김성업 장군이었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879년 숭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필자 일행이 정방산성 초입에서 보았던 남문은 한국전쟁 때 불에 탄 것을 1968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 정방산 산맥과 능선을 따라 30리 길이로 축조된 산성 전경. 중간지점에 성 입구인 남문이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정방산성 남문의 뒷편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정방산성 남문의 정면 모습. 우측에 국보유적 표지비가 보인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고풍스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경내 건축물들
       
산성 내부를 두루 참관하고 필자 일행을 태운 차량이 둥근 무지개 아치형의 남문을 통과해 성 밖으로 빠져나오니 얼마 멀지 않은 거리 골짜기 좌편에 성불사가 나타났다. 산줄기가 흘러내려 분지를 이룬 형세의 천성봉 기슭에 자리 잡은 유서깊은 성불사는 국보 문화유물 제87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사리원시 정방역에서 서북쪽으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정방산성 남문과 성불사가 위치해 있는 연고로 소학교, 고등중학교 각급 학생들은 물론 대학생들과 군인들, 외국의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당도하니 이미 사리원 지역 초등학교 학생들과 고증중학교 학생들이 소풍을 와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숲속은 시끌벅적했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초등학생들과 중학생정도의 학생들은 우리 일행을 보며 손을 흔들며 신기한 듯 반가워했다.

산맥의 흐름을 살펴보면 황해도 곡산의 개련산에서 출발해 서남쪽으로 천자산과 서흥 북쪽에 있는 발은산에 이르러 갈라진 자비령이 멈춘 산이 바로 정방산이라고 한다. 주소상으로 황해북도 사리원시 성문동에 위치한 성불사(成佛寺)는 정방산 주봉인 천성봉 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참으로 그 위치가 명당 중에 명당으로 보였다.

절간 경내를 들어서자 5층 석탑을 중심으로 응진전을 비롯해 극락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 채의 목조 건축물들이 고풍스런 자태로 우리 일행을 포근하게 반겨주는 듯했으며 성불사의 역사를 길이 전하려고 세워진 불사사적비가 경내에 있었다. 성불사 전각의 배치는 마당을 중심으로 전각이 주로 네 방향으로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성불사의 창건과 중건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니 ‘조선불교통사’에 그 내력이 좀 더 상세히 나와 있었다. 여기저기 근거 있는 사료들을 찾아 종합해보면 성불사는 898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1375년에 나옹화상이 중창을 했는데 그 당시에는 이곳 성불사외에도 부속 암자들 경내에 15기의 석탑을 새로 조성했다고 한다. 그 후 1407년 태종 7년에 들어서 자은종(慈恩宗)의 사찰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1530년 중종 25년에 웅진전을 중수한 것으로 나온다. ‘성불사사적비(보존유적 제1127호)’에는 25개의 말사를 둔 본산으로 1000여명의 스님이 수행 정진하던 해서지방의 종찰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1569년 선조 2년에 설숭(雪崇) 스님이 다시 중수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지고, 1650년 효종 1년에 대웅선사와 언택선사가 극락전을 보수하였다고 전해진다. 1684년 숙종 10년에는 도행선사가 丈六(장륙) 탱화를 만들었고, 귀민(歸民)선사는 400근짜리 대종을 주조하였다고 전해지며 1709년 숙종 35년에는 필형(弼浻)선사 등이 갑계(甲契)를 만들어 시왕상을 조성하였고 2년 뒤에 명부전을 세워 봉안하였고 전해진다.

이어서 1727년 영조 3년에는 재현(載玄)선사가 사적비를 건립하였고, 1751년 영조 27년에는 찬훈(贊訓)대사가 사찰을 수리하였고 그후 1924년 주지스님 보담(寶潭)이 또 한 번 중수했다고 전해졌다. 그 후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지닌 성불사는 일제 강점기를 맞아 “조선사찰 31본사” 중 하나로서 황해도 일대의 36개소의 말사를 관장하던 본산이었다고도 한다.

주지스님 법성의 해설에 의하면 그 후 성불사 건축물들은 6.25 전쟁을 당해 미군의 소이탄 공격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전쟁 당시 조선 불교계는 비단 성불사뿐 아니라 남과 북에 산재한 수많은 사찰과 문화재들이 전쟁으로 소실됐으며 많은 승려들이 피살되거나 실종되는 비운을 겪었다. 사찰들은 대부분 산 속에 있었기 때문에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빨치산들과 국방경비대, 경찰등의 치열한 접전을 벌일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며 6.25전쟁 중에는 양측의 공방전으로 대부분의 사찰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정도였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성불사는 그 후 전후 복구시기인 1955년에 이르러서야 철저한 고증을 거쳐 먼저 대웅전과 응진전이 재건되기 시작했고 복구 이후에도 지금까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개건공사를 거쳐 오늘의 모습으로 변모 된 것이라고 한다. 기념비에는 붉은 글씨로 국보유적 제87호로 지정되었음이 기록되어 있었다. (계속)

   
▲ 정방산 정상 부근 바위에서 내려다 본 성불사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성불사 인근에 조성된 작은 인공 연못.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성불사 입구 일주문 광경.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성불사 경내 석탑 앞에 선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해방 전인 1930년대에 촬영한 성불사 석탑. 탑은 그대로이나 전각들은 현재와 다른 모습이다. 돌을 4각형으로 다듬어 5층으로 쌓았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1930년대에 촬영한 성불사 전경. 6.25 전쟁으로 소실되기 전이라 오늘날의 전각 배치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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