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의식세계는 일종의 착각이거나 하나의 가상적인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현실이다 (융)


 아름다운 여인들
 - 휘트먼 

 앉아 있는 여인이 있는가 하면
 예제로 움직이는 여인도 있다.
 혹은 늙고 혹은 젊고.
 젊은 여인들은 과시 아름답지만
 나이 먹은 여인에게는 댈 수 없구나.


 최근에 종로3가 인근 전철역에서 할아버지들과 젊은 여자들이 싸우는 모습을 몇 번 목격했다. 옆에 멈춰 서서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할아버지들은 대체로 ‘왜, 사람을 미느냐?’였고, 젊은 여자들은 ‘그렇다고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 있느냐?’였다. 아마 젊은 여자들이 바쁘게 길을 가다 할아버지들을 밀쳤나 보다.

 전에는 할아버지들이 젊은 남녀 모두를 상대로 싸웠다면 이제는 젊은 여자들과 싸우는 것 같다. 할아버지들이 젊은 남자들과의 싸움에서 패한 걸까?   

 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원형상(原形象)’을 갖고 있다. ‘산신령’을 생각하면 된다. 신령스러운 모습의 할아버지, 할머니. 오랫동안 인류가 경험한 노인들. 그들은 지혜와 사랑이 그득한 모습의 상(象)으로 우리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왔다.

 어릴 적 우리는 이런 ‘노인(노현자老賢者)’을 경험했다. 유아시절에 보았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얼마나 성스러웠던가! 하지만 산업사회가 되면서 노인들은 점점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탑골 공원에서 어슬렁거리거나 폐휴지를 줍는 초라한 늙은이로 전락했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서까지 ‘신령스러운 노인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럼, 우리 마음속의 ‘신령스러운 노인들’이 진짜일까? 눈에 보이는 ‘초라한 노인들’이 진짜일까?

 이 두 ‘노인상(老人象)’의 갈등이 할아버지들과 젊은 여자들의 싸움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우리는 어느 노인상에 손을 들어줘야 할까?

 심층심리학자 융은 말한다. ‘의식세계는 일종의 착각이거나 하나의 가상적인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현실이다’ 그는 우리 눈에 보이는 노인상이 가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도 노래한다. ‘젊은 여인들은 과시 아름답지만/나이 먹은 여인에게는 댈 수 없구나.’
 
 나는 ‘나이 먹은 여인’이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운지를 처절하게 경험한 적이 있다. 십여 년 전 어느 날, 아내와 시외의 텃밭에 갔다가 어느 마트에 들렀다. 아내는 마트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피곤해서 마트 바깥의 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런데 내 몸이 갑자기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앞이 희미해졌다. 혀가 굳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젊은 여인이나 중년 여인들)을 돌아보며 핸드폰 좀 빌려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내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텃밭에서 일하느라 내 작업복엔 흙탕물 자국이 여기저기 있었다. 그들의 눈에 나는 영락없는 병든 노숙자였나 보다.

 그들은 아예 나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아, 이러다 죽겠구나!’ 나는 주머니 속에서 500원짜리 동전을 찾아내 손에 쥐고는 어지러워 걷지는 못하고 앉은 채로 기어서 공중전화부스로 갔다. 한 아이가 전화를 막 끝내고 동전들을 손에 든 채 돌아서고 있었다. 나는 앉은 채 그 애를 붙잡고 내 손의 500원짜리 동전을 보여주며 100원짜리 동전들과 바꾸자고 했다. 그는 우물거리는 나를 보고는 후닥닥 도망을 갔다.

 ‘아!’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신음했다. 그때 한 할머니가 100원짜리 동전 몇 개를 들고 공중전화부스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할머니에게 간신히 기어가 500원짜리 동전을 보여주며 100원짜리 동전들과 바꿔달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선선히 500원짜리 동전을 받고는 100원짜리 동전들을 주셨다. 기어이 다섯 개 다 주시려는 것을 너무나 고마워 그 와중에도 세 개만 받았다. 앉은 채로 간신히 번호를 꼭꼭 누르며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그 할머니는 오랜 삶의 경험으로 나의 형편을 한 눈에 알아보았나 보다. 그 순간 그 할머니는 ‘신령스러운 노인’이 된 것이다.

 ‘젊은 여인들은 과시 아름답지만/나이 먹은 여인에게는 댈 수 없구나.’ 휘트먼 시인은 어떻게 나이 많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알았을까?

 원시시대의 사냥꾼은 사냥을 할 때 ‘태초의 사냥꾼’을 흉내 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이면서 동시에 ‘태초의 인간(신神)’으로 살았던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이리도 황량한 것은 우리가 ‘나(자아自我)’로만 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안에는 수많은 ‘원형상(신神)’이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원형상의 화신(化身)이 되지 못하고 ‘세상 속의 인간(속물俗物)’으로만 산다. 

 할아버지들과 젊은 여자들의 싸움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원형상(노현자(老賢者)’을 되살려내라는 이 시대의 울부짖음이 아닐까?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 생각하는(더 나은 것을 꿈꾸는) 존재’이니까.

(편집자 착오로 원고를 이틀 늦게 게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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