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민족자주문제와 통일문제에 천착해 온 노중선 <통일뉴스> 상임고문의 ‘역대 국회와 통일문제 논의’를 연재한다. 필자는 제헌국회에서부터 20대 국회에 이르는 역대 국회에서 통일문제와 관련한 논의들을 ‘민족화해와 자주통일’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아울러 필자는 향후 국회가 평화통일과 민족자주 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의를 거쳐 민족화해시대에서 분단 극복을 위해 자기 역할에 적극 나설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 연재는 매주 금요일에 다음과 같은 순서로 게재된다. / 편집자 주

1) 제헌국회에서의 통일논의(1948.5~1950.5)
2) 제2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1950.6~1954.5)
3) 제3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1954.6~1958.5)
4) 제4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1958.6~1960.8)
5) 제5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1960.8~1961.5)
6) 제6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1963.12~1967.6)
7) 제7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1967.7~1971.6)
8) 제8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1971.7~1972.10)
9) 제9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1973.3~1979.3)
10) 제10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1979.3~1980.10)
11) 제11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1981.4~1985.4)
12) 제12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1985.4~1988.4)
13) 제13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1988.4~1992.5)
14) 제14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1992.5~1996.5)
15) 제15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1996.5~2000.5)
16) 제16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2000.5~2004.5)
17) 제17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2004.5~2008.5)
18) 제18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2005.8~2012.5)
19) 제19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2012.5~2016.5)
20) 제20대 국회에서의 통일논의(2016.5~ )

 

<연재를 시작하며>

갈라져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한 핏줄의 민족구성원들이 다함께 살고자하는 절절한 자기 의지와는 다르게 견디어온 분단 70여년! 그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당사자로서의 우리민족 구성원들에게는 온갖 크고 작은 고통들로 점철된 불행한 민족사이기도 하다.

그 같은 민족 분단의 장기화는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 정의와 도덕은 물론 보편적 논리와 상식조차 외면당하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각 부문에서의 실세들에 의해 오직 물리적 힘과 파렴치한 억지논리가 통용되기도 하고 그와 같은 왜곡된 구조에 의해 온 사회의 구석구석이 지배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한반도 분단의 장기화 문제를 원천적으로 극복해야할 시점에 이르러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 각 부문에서의 적폐청산 문제로 매우 소란스러운 것에서도 확인되고 있는 것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민족분단 70년에서 비롯되고 있는 분단 적폐의 청산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되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일촉즉발의 전쟁위기가 상시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분단 상황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곧 평화적 자주통일문제가 더는 미룰 수 없는 절박한 민족 생존의 문제로 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어떤 패권적 외세라고 하더라도 동북아평화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우리 민족의 평화통일 문제를 외면한 채 더 이상 한반도 분단을 지속시켜갈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반도 통일과 평화 정착문제가 한반도 안팎으로 거역할 수 없는 도도한 대세라고 해서 그것이 마치 매섭게 추웠던 겨울이 가면 새싹이 돋아나는 따뜻한 봄날이 오듯이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전리품 같은 것은 아니다.

70년 넘게 분단으로 말미암아 적폐 되어온 질곡들이 단순한 절차와 형식의 변화만으로 하루아침에 그냥 해소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분단 장기화에 관한 각 부문에서의 회고와 반성 그리고 그에 따른 끊임없는 노력과 구체적인 실천을 전제로 한 과제들이 모색이 되어야 하고 그와 같은 결과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그동안 분단이 장기화될 수밖에 없었던 분단 구조들에 대한 관찰이 요구된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낡은 관행과 게으른 타성을 박차 버릴만한 결단이 필요하고 70년 분단 현실에 대한 구체적이고 냉철한 자기성찰에 의한 실천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처럼 분단 시기 지난날들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한 것은 근래『민중의 세계사』를 쓴 크리스 하먼(Chris Harman)이 이 책의 결론 부분 맨 마지막에서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미래를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책을 쓴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그 일환으로 이 글에서는 ‘민족화해와 자주통일’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분단 정권 수립 이후 70년에 이른 지금까지 제헌국회에서부터 20대 국회에 이르는 역대 국회에서 통일문제와 관련한 논의들이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이어져서 자기 역할을 해 왔는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평화적 자주통일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다수 대중의 열망임은 아무도 변명하거나 거역할 수 없는 민의다. 그렇다면 분단적폐의 청산이라는 시대적 과제의 실천을 위해서라도 ‘민의의 대변’ 기관인 국회가 앞장서서 평화통일과 민족자주 문제를 진지하면서도 활기차게 토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민족화해시대의 국회가 분단 극복을 위해 집중해야할 과제와 실천 방안을 도출해 낼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 필자 주

                   

1. 제헌국회에서의 통일논의 (1948.5~1950.5)

임기 2년의 제헌국회는 미군정 법령에 의한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38도선 이남지역만의 총선거(주1)에 의해 구성되었다. 이는 당시 남북협상을 지지 성원하는 광범한 대중들의 통일독립국가 건설 의지를 반영하는 정당들은 물론 여러 사회단체들의 이남 지역만의 단독선거 반대(주2)와 불참 속에서 진행되었다. 다만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선ㆍ단정 세력이 미군정 당국의 엄호와 지원 속에서 선거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5월 31일 제헌국회가 개원되어 의장으로 이승만을 선출하였고, 7월 1일에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였다. 이어서 제헌국회는 7월 12일 대통령제 헌법(안)을 통과시켜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 및 정부조직법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7월 20일에는 제헌국회에서 정부통령을 선출하여 7월 24일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의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8월 15일 분단 정권으로서의 대한민국을 수립 선포한 뒤 제헌국회는 분단 정권의 안정적 지속을 위한 기초 작업과 그와 관련된 법안들을 결의하였다.
 
먼저 8월 25일 <한미군사협정(잠정안)>을 성립시켰고, 11월 6일 전문 5개조와 부칙으로 된 국가보안법(안)을 제출하여 11월 16일 제헌국회에서는 이에 대한 찬반 토론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공산당들이 ‘망족망국의 도배들아, 국가를 망치고 민족을 망치는 무리들아, 이 국가보안법을 폐기하라’는 등 나날이「삐라」를 뿌리는 이때, 이 법을 폐기하는 것은 공산당을 고무케 하는 것이므로 이 법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찬성 발언과 “국가보안법은 식민지정책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므로 본 법안을 폐기하자”, “이 법을 악용하여 자기의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을 강압할 염려가 있고 본법을 제정하여도 실효가 없을 것이므로 폐기하자”는 반대 발언 등 격렬한 토론이 이어졌다. 그러나 재석 122인중 가37, 부69로 국가보안법(안)은 부결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11월 19일 이 법안을 다시 국회에 회부하여 국가보안법을 의결하였다. 이어서 바로 다음날인 11월 20일에는 “미군의 남한 주둔의 필요를 인정함을 결의한다”는 내용의 <미군주둔 요청에 관한 결의안>도 가결하였다.

그런가하면 1949년 2월 7일 김병회 의원이 <남북화평통일에 관한 결의안>을 발의하였는데 그 결의안의 내용은 “①민족적 애국진영을 총 단결하여 민족역량을 집결하도록 노력할 것 ②남북화평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유엔 결의에 의한 한국 내 주둔 외군의 즉시 철퇴를 실천하도록 유엔 신한국위원단에 요청할 것”(주3)이었다.
 
그러나 국회 심의 과정에서 노일환 의원은, 해방된 첫째 조건은 평화적인 통일을 해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한 뒤 해방 후 약소국가의 현실을 되돌아 볼 때 네덜란드 점령하의 인도네시아, 프랑스 점령하의 월남, 중국의 장개석 정권은 모두 자주성을 몰각하고 외세에 의존한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면서 “… 해방 이후에 약소국가의 현실이나 우리나라의 역사가 역사적 사실로 봐서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야말로 외군의 철퇴로부터 올 수 있고 이 외군의 철퇴로만이 우리의 남북통일이 평화적으로 될 수 있는 것…”(주4)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서용길 의원은 “남북화평통일은 우리 민족의 지상명령”이라면서 “…왜적의 무장해제를 위해 북에 소군과 남에 미군이 진주한 것을 우리 민족으로서는 천사적 진객으로 환영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과업은 왜군 무장 해제하는데 있는 것이매 그 일이 완료했으면 의당 철퇴하여야 하였을 것이다.
 
“… 4년이라는 시일을 외군이 주둔해 있으므로 해서 산업은 전폐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일언으로 말하면 한반도의 주인인 한민족은 엄연한 국제공약에 의한 완전 자주독립이 공약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희생을 한 것이다…”(주5) 이처럼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의 전제 조건으로 이 땅에서의 외국 군대 철수를 주장하였지만 부결되고 말았다. 
 
그리고 1949년 5월 체포 구속된 이문원ㆍ최태규ㆍ이구수 의원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 국회의원은 그가 개인이기 이전에 국민이 선출해준 대변자라는 사실과 함께 국회의원의 불체포 특권의 헌법정신에 비추어 회기 중에 그들이 국민의 대변자로서 그들의 권리를 정당히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의미에서 본 건을 제안한다”며 <국회의원 석방 요구에 관한 결의안>을 5월 23일 김용현 의원 외 49명이 제안하였다.
 
그렇지만 곽상훈 의원은 “국가 자체를 부인한 모의에 가담한 의원의 석방에 동의할 수 없다”, 주기용ㆍ김준연 의원은 “국회의원 중에 정부를 부인하고 5.10선거를 부인한 혐의를 받은 자가 있다는 것은 자살행위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 혐의의 사실여부를 단시일 내에 밝히는 것이 국회나 그 자신을 위하는 길이므로 석방요구를 반대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원홍ㆍ김수선 의원은 “친정부 세력은 무슨 일을 해도 상관이 없고 국가 민족을 위해 정부를 비판하는 자만 처벌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며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총 투표수 184표 가운데 가88, 부95, 기권 1로 부결되었다.(주6)

이와 같이 제헌국회는 자주독립과 평화적 통일을 위한 대책과 논의들은 철저하게 외면하여 부결시켰고, 민족분단을 설정하여 이를 고착화 시키는 결의들을 채택하여 분단정권의 기초를 다지는 역할을 충실하게 진행하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어떻게든 민족분열만은 막아보려 남북협상론을 제기하는 등 소수 소장파 의원들의 처절한 노력도 없지는 않았다. 제헌국회가 분단정권 수립에 이어 국회 활동이 시작된 직후인 1948년 10월 박종남 등 46명의 의원들이 <외국군철퇴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1949년 3월에는 국회의원 63명의 명의로 <외국철수와 평화통일결의안>을 상정한 바도 있는데 그 같은 연장선상에서 국가보안법 제정을 반대하고 남북협상론을 전개했던 김약수ㆍ노일환ㆍ이문원 등 소장파 의원들은 ①외국군대를 완전히 철퇴케 할 것 ②남북의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 ③남북 정당 사회단체 대표로서 남북정치회의를 개최할 것 ④남북정치회의는 일반, 평등, 직접, 비밀의 4원칙에 입각한 선거규칙을 작성하여 최고입법기관을 구성할 것 ⑤최고입법기관은 헌법을 제정하고 통일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⑥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할 것 ⑦조국방위군을 재편성할 것 등 ‘남북평화통일방안 7원칙’(주7)을 제시하기도 했다.
 
물론 이 같은 결의나 제안들은 부결되거나 이른바 1949년 6월 ‘국회프락치 사건’(주8)으로 형사 입건되어 투옥되는 등 수난을 당해야 했지만 제헌국회에서부터 20대 국회에 이르는 오늘까지도 역대 국회에서 미군철수 문제를 제기했던 것은 제헌국회에서의 그것이 처음이면서 유일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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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당시 미군정청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5월 7일~10일 까지 4일간 체포 ‧ 구금된 자가 5,425명, 살상된 자가 35명이나 되었고 또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조사 자료에서 보더라도 5월 10일~14일까지 투표를 거부한 이유로 부상당한 자가 137명, 살해된 자가 128명이나 되었고 했다. 그리고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조차 “자유스런 분위기 속의 선거는 아니었다”라고 인정해야 했다. (고영민『해방정국의 증언』(사계절, 1987.4), 192쪽)

2. 1947년 11월 소련이 제기한 ‘미소양군 철수안’을 유엔이 부결시킨 뒤 남북한 인구비례에 의한 자유선거를 의결하고 유엔조선임시위원단 구성하였다. 그리고 유엔소총회의 결의를 통해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이 이남 지역에서의 단독선거를 위한 활동이 시작됨과 동시에 단선 단정반대운동은 전개되었다. 당시 명망 있는 애국 인사들과 그들이 소속된 여러 단체들은 성명과 선언문을 통해 단독 선거를 반대하였다. 뿐만 아니라 2.7노동자총파업 투쟁을 비롯해서 ‘남조선 단선단정반대투쟁 총파업위원회’의 총파업 투쟁, ‘제주 4.3항쟁’ 그리고 전국적으로 각 학교 학생의 동맹 휴학 등 단선 단정 반대운동은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이어졌다

3. 제2회, 國會定期會議速記錄, (1949.2.7.) 18쪽

4. 위 자료 12쪽

5. 위 자료 14쪽

6.『國會史』제1권(제헌국회ㆍ제2대국회ㆍ제3대국회), 1971년, 140~142쪽

7. ‘국회프락치사건 판결’ ‘월간 다리’(1972년 4월호) 192쪽

8. 이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바 있는 제헌의원 서용길은 이 사건이 “제헌의원 12인이 희생당한 엄청난 조작극”으로써 ‘부산 임시수도 때 대한민국 법원에서 백지화된 사건’이라고 했다(『民族統一』(민족통일촉진회, 1989년1.2호) 52쪽)

 

고려대학교 노동교육과정 수료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간사 겸 연구원
고려대학교 노동교육원 강사 역임
평화통일연구회 상임연구원
사월혁명회 상임의장
통일뉴스 상임고문(현)

저서
『民族과 統一』(사계절 출판사, 1985)
『4·19와 통일논의』(사계절 출판사, 1989)
『現段階 統一方案』(공저, 한백사)
『남북한 통일정책과 통일운동 50년』(사계절 출판사, 1996)
『남북대화 백서 - 남북교류의 갈등과 성과』(한울아카데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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