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방안이 결코 대한민국을 부인하거나 말살하는 데 있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것을 육성하고 혁신하고 진실로 민주화하는 데 있음을 확신한다. 민주주의 승리에 의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 이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다.”

1956년 11월 10일 창당한 ‘진보당’이 내세운 통일정책이다. 한국전쟁을 겪은 뒤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북진통일’의 구호로 매카시즘이 광기를 부리던 당시 ‘평화통일’은 금기어였다. 1958년 2월 25일, 결국 ‘평화통일’을 내세운 ‘진보당’은 불법정당으로 낙인찍히고 해산됐다. 그리고 올해는 ‘진보당 강제해산 사건’이 발생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 1957년 10월호 <중앙정치>. 조봉암 진보당 중앙위원장이 '평화통일에의 길'이라는 주제로 기고를 했다. [사진출처-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평화통일’을 강령으로 내세운 ‘진보당’

한국사회의 정당 역사는 해방과 함께 시작됐다. 하지만 분단과 한국전쟁은 이름의 차이만 있을 뿐, ‘반공’을 국시로 삼는 우파정당이 주를 이뤘다. 그런데 여기에 반기를 든 정당이 출현했다. 바로 ‘진보당’이다.

해방 이후 중앙 정치 무대에 나선 대표적인 혁신계 인물인 조봉암은, 모든 계급의 고통과 부담을 덜어주고, 사회적 연대와 민족적 이익을 위해 정권교체를 추구하고자 하는 이들과 함께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을 창당했다.

진보당의 출발은 조봉암의 정치 인생과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 정권은 정부수립 초기 최대 정적이던 한민당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했다. 하지만 정치적, 정책적 노선이 달랐던 조봉암은 1년이 채 안 돼 사퇴, 이승만 정부에 대한 도전을 시작했다.

조봉암은 1952년 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79만 표를 얻었다. 이승만의 5백만 표보다 적은 득표였지만, 조봉암을 중심으로 한 혁신계의 도전은 이승만 정권에게 부담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봉암을 바라보던 시각은 민주당도 이승만 정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과 민주당의 배제 속에서 조봉암, 서상일 등 혁신계는 1955년 5월 통합을 약속하고 그해 12월 ‘진보당 창당 준비위원회’를 꾸렸다. 그리고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 출마한 조봉암은 216만여 표로 낙선했지만, 504만여 표를 얻은 이승만 다음으로 많은 표를 얻어, ‘진보당’ 창당을 통한 정치 성공 가능성을 내다봤다.

그래서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이 공식 창당했다. 조봉암 중앙위원장, 김달호.박기출 부위원장, 윤길중 간사장, 조규희 선전부장, 김기철 통일문제연구위원회 위원장, 신창균 재정위원장 등이 전면에 나섰다. 

조봉암은 창당대회에서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일을 없애고 또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서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일이 없는 이상적인 복지사회를 만들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공죄(功罪)’, ‘자본주의의 위기’, ‘자본주의의 수정과 변혁’, ‘후진국가의 새로운 방향’, ‘제2의 산업혁명과 20세기적 사회혁명’, ‘6.25사변의 교훈’, ‘현 한국정부의 본질’ 등의 정세를 토대로 당의 성격과 임무를 강령에 담았다.

“양단된 우리 국토의 합일과 양분된 우리 민족의 통일은 우리 민족 전체의 가장 열렬한 염원이고 숙망이다. 우리는 유엔 및 미국을 비롯한 민주우방과의 긴밀한 협조하에 우리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을 민주적이고 평화적으로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 외교의 진용과 방법을 쇄신 개편하는 한편, 국내 건설을 촉진 제고함으로써 국력을 배양 강화할 것인바, 이는 크레므린의 새로운 경제적 공세에 대하여 가장 효과적인 방위책이 될 뿐 아니라 실로 우리 조국의 민주적 통일을 쟁취하기 위한 가장 적확한 방법일 수도 있는 것이다.”

[강령]

1. 우리는 원자력혁명이 재래할 새로운 시대의 출현에 대응하여 사상과 제도의 선구적 창도자로서 세계평화와 인류복지의 달성을 기한다.

2. 우리는 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여 책임있는 혁신정치의 실현을 기한다.

3. 우리는 생산분배의 합리적 계획으로 민족자본의 육성과 농민, 노동자 모든 문화인 및 봉급생활자의 생활권을 확보하여 조국의 부흥번영을 기한다.

4. 우리는 안으로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추진하고 밖으로 민주우방과 긴밀히 제휴하여 민주세력이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평화적 방식에 의한 조국통일의 실현을 기한다.

5. 우리는 교육체제를 혁신하여 점진적으로 국가보장제를 수립하고 민족적 새문화의 창조로서 세계문화에의 기여를 기한다.

진보당이 강령에서 밝힌 ‘평화통일론’을 당시로써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리고 이는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이 2위에 오를 수 있는 기반이기도 했다. 진보당의 첫 번째 정책 항목이 ‘통일문제’였다는 점에서도 그만큼 평화통일이 진보당의 중요한 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진보당은 통일문제 정책에서 “원수폭의 발전으로 인한 세계대세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희구하는 방향으로 도도히 흘러가고 있다”며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이상 동족상잔의 피를 흘릴 수 없다. 우리는 오직 피흘리지 않는 통일만을 원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유엔을 통한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조국통일의 구체적 방안을 책정”해, “민주주의 승리에 의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 이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라고 설명했다. 독재에 맞선 민주주의 성취가 바로 평화통일을 담보한다는 의미이다.

‘반공’이 국시이고, ‘북진통일’이 대세였던 당시 ‘평화통일’ 주창은 ‘빨갱이’로 낙인찍힐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음에도, 진보당은 ‘평화통일’만이 민족이 살길임을 간파한 것이다.

실제로 유성환 신한민주당 의원이 1986년 10월 14일 제 131회 정기국회 본회의에서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는 발언으로 회기중 구속되는 이른바 '통일 국시' ​사건이 한참 후에 발생한 것을 보더라도 진보당은 시대를 한참 앞서간 셈이다.

물론, 한국전쟁의 책임은 북한에 있고, 북한의 반성과 책임규명만이 평화통일의 선행조건임을 내걸어, 맹목적인 북한의 평화통일론 추종이라는 일각의 주장과 다름을 증명했다.

‘반민주’, 진보당 해산으로 ‘평화통일’을 압살하다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국민의 지지를 받는데 위협을 받던 이승만 정권은 본격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1958년 1월 12일 치안국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불법이며 당수인 조봉암이 간첩 박정호와 접선했다는 혐의로 수사에 들어갔다. 박기출 부위원장, 윤길중 간사장, 조규희 선전부장 등 진보당 간부들이 체포됐고, 조봉암이 자진 출두했다.

하지만 간첩 접선 혐의는 사실무근으로 밝혀지자, 당국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의 위법성과 이중간첩 양명산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간첩사건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이는 진보당을 압살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공작에 기인한 것이었다.

▲ 1959년 2월 진보당 사건 대법원 파결 당시 모습. 왼쪽 한복을 입은 사람이 조봉암 진보당 중앙위원장이다. [사진출처-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냉전에 편승해 장기집권의 길로 간 이승만은 평화통일론을 용납할 수 없었다. 여기에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이 민주당과의 야당 연합전선 실패에도 불구하고 유효득표수 28%를 얻어 이승만 독재정권의 강력한 대항마로 떠올랐다. “조봉암은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라고 이승만이 말할 정도였다.

이승만 정권은 ‘진보당 사건’을 일으킨 지 한 달 만에 진보당을 간첩집단으로 낙인찍고 해산시켰다. 

1958년 2월 25일, 공보실은 “대한민국의 국법과 유엔의 결의에 위반되는 통일방안을 주장하고 있”으며 “진보당 간부들은 북한괴뢰집단이 밀파한 간첩과 밀사와 파괴공작들과 항상 접선하여 왔”고 “공산당 비밀당원과 공산당 방조자들을 의회의원에 당선시켜 가지고 그들을 통하여 대한민국을 파괴하려고 기도하여 왔다”는 이유로 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렸다.

“민주주의 승리에 의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려던 진보당은 반공을 국시로 북진통일을 내세운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결국 문을 닫았다. 그리고 조봉암은 이듬해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2011년, 진보당은 간첩집단이 아니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조봉암이 간첩이 아님도 증명됐다.

대법원은 2011년 1월 20일 “진보당의 통일정책인 평화통일론이 북한의 위장 평화통일론에 부수하는 것으로 인정되지 아니하고 이를 인정할 다른 아무런 증거도 없어 그 결성이 북한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당시 우리 사회의 주도적인 통일론이었던 북진통일론에 배치된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정을 들어 곧바로 진보당의 통일정책이 헌법에 위배된다거나 또는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주창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무력통일을 꾀하던 이승만 독재정권은 시민들의 힘으로 무너졌지만, 진보당은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자신들의 목표로 다시 일어서게 된 셈이다. 그리고 다시 ‘조국의 평화통일’은 과업으로 남았다.

‘진보당 강제해산 사건 60년’은 과거가 아닌 오늘에 주는 의미가 깊다. 진보당의 통일정책은 지금도 유효하다.

“오늘날에 있어서의 남한의 소위 무력통일론도 이미 불가능하고 또 불필요한 것이다. 평화적 통일에의 길은 오직 하나, 남북한에 있어서 평화통일을 저해하고 있는 요소를 견제하고 민주주의적 진보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뿐이다. 민주주의 승리에 의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 이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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