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설립한 광법사를 가다  
     
북미간의 대립 정국이 다른 어느 때보다 팽팽하던 시기에 방북한 필자는 방북 사흘째 되던 날에 평양 광법사를 찾았다. 그러나 마치 시국을 비웃는 듯 거리에서 마주치는 평양시민들의 일상과 시내 풍경들은 보란 듯이 평온했고 얄미울 정도로 태평스러웠다. 광법사는 고구려와 신라의 불교 전래는 물론 우리나라 삼국시대 불교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아도(阿道) 스님에 의해 설립된 유서 깊은 사찰이라 그런지 출발 전부터 몹시 기대감이 밀려왔다. 필자의 광법사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 전에 대성산 정상 등반과 대성산성, 소문봉, 남문 등을 돌아본 후 잠깐 광법사를 둘러본 적은 있었으나 오늘처럼 일부러 세밀하게 참관하지는 않았다.

이날 필자의 일정에는 미국에서 나와 함께 방북한 두 내외가 함께 했으며 북측에서는 안내원 없이 김 국장과 김 참사가 직접 안내하며 동행해주는 덕분에 차량을 편리하게 제공받을 수 있었다. 마침 역사지식에 해박한 김일성대학 출신의 참사가 광법사를 향하는 차안에서 대성산성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원래 우리 고구려 조상들이 남하해서 자리 잡은 곳은 대동강변 평양성이 아니라 바로 이곳 대성산 자락입니다. 여기서 무려 1백 50년을 보냈기 때문에 옛날에는 대성산에만도 절간이 무려 열 개가 넘게 있었습니다. 그동안 천년 세월이 흐르면서 모두 사라지고 그중에서 가장 유서 깊은 광법사만 복원한 것입니다.”

우리 조상 고구려인들이 평양성에서 지낸 기간보다 이곳 대성산성안에서 훨씬 더 오랜 기간을 거주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이 부근이 살기도 좋을 뿐 아니라 지리적 여건도 좋고 경치도 좋아서 그랬을 것이다. 지도를 보면 평양에서 동북쪽으로 8㎞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성산은 백두산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내려오던 묘향산맥이 묘향산에 이르면서 갑자기 남쪽으로 방향이 틀어지며 계속 내려오다가 대동강을 만나면서 멈춰 선 지점이다.

대성산  국사봉 기슭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광법사는 평양 팔경의 하나인 대성산의 자연경치와 함께 우리나라 옛 고찰들의 건축미와 불교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적지로 자리매김했다. 일반 인민들과 방문객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광법사를 찾아오려면 평양지하철 광복역이나 건국역에서 출발하는 혁신선 라인을 타고 락원역에서 하차하면 된다. 역에서 내리면 곧바로 광법사는 물론 조선중앙동물원과 대성산성, 유원지, 혁명열사릉 등을 손쉽게 찾아 갈 수 있다. 대성산은 비록 해발 2백 70미터 정도의 낮은 산이지만 주위가 논밭으로 구성된 벌방지대라서 유난히 우뚝 솟아 보였다. 또한 대성산은 특급 국립묘지인 혁명열사릉이 자리잡고 있는 까닭에 성지처럼 여기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평양시민들이 손쉽게 나들이 할 수 있는 인기 관광명소로 소문나 있었다.

서울 남산(南山) 정도의 높이와 산세를 지니고 있는 듯한 대성산 자락의 광법사는 마치 아기가 엄마 품에 안기듯 완만하고 평온한 지형에 자리 잡았으며 사방이 온통 꽃과 각종 나무들을 비롯해 희귀한 식물들로 우거져 있어 그야말로 낙원과 극락이 따로 없을 정도의 명당 터로 보였다. 절이 있어 산이 더 아름답고, 산이 있어 절이 더 빛난다고 누가 그랬던가? 이곳의 절간과 산의 조화는 고즈넉한 한 폭의 그림 자체였으며 모든 전경이 청아하고 풋풋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승용차가 사찰 앞마당에 도착하자 주지 스님과 샛노란 개나리 색 조선옷(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 안내원을 비롯한 절간 식구들이 벌써 우르르 마중 나와 따뜻하게 영접해주었다. 지난번 방문 시에 만났던 진달래색 한복을 곱게 입은 여성 해설사도 함께 해 반가움을 더 했다. 그동안 워낙 국내외 방문객들과 손님들을 자주 맞았던 경험 때문인지 절간 식구들이 일행을 영접하는 표정과 예절은 매우 자연스럽고 격조 있어 보였다.

▲ 대성산성에 올라 기념비 옆에 선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나들이 나온 평양 고등중학교 학생들과 남문앞에서 함께 한 필자. 대성산성 성벽과 더불어 이곳 남문도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광법사를 알리는 인근의 도로 표지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광법사 맞은 편 언덕에서 바라본 광법사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사찰 경내에 진입하기 위해 일주문을 통과한 후 그 다음 문인 천왕문 앞에 선 필자일행.[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광법사 일주문인 해탈문에서 대웅전 방향을 바라본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필자 일행을 영접하기 위해 광법사 주지 스님이 미리 나와 기다리는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진달래빛 조선옷(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 해설사.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도착하자마자 부처님 전에 예를 올리다
     
나와 동행한 국장이 스님 일행에게 필자를 소개하자 양측은 서로 악수를 나누며 정감 있는 인사를 나눴으며 그때부터 절간을 떠날 때 까지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사찰 참관이 이루어졌다. 스님의 안내로 절간의 대문격인 해탈문을 거쳐 천왕문을 통과하여 대웅전 앞마당에 들어서자 마치 구중궁궐을 들어가는 듯했으며 다른 여느 사찰과는 다르게 유서 깊은 절이라는 것이 금새 느껴졌다. 눈앞에 펼쳐진 여러 전각과 석탑은 옛 영화를 보여주는 듯 서로 조화를 이루며 풍치를 더욱 돋워 주는듯했다. 대웅전 앞 마당에 도착한 필자는 일행과 함께 의논해 우선 대웅전안으로 들어가 부처님 앞에 예를 올리기로 합의하였다.

“스님, 제가 아무리 기독교 목사라 해도 멀리 미국에서 힘들게 찾아왔으니 부처님께 예를 갖추고 싶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제 평생에 기독교 목사 선생이 부처님 전에 예를 올리는 건 생전 처음 봅니다. 불단에 예를 올리고 나시면 목사 선생을 위해 제가 직접 부처님께 예불을 올려드리겠습니다. 통일을 위해 애쓰시는 목사 선생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조국의 통일이 하루빨리 이뤄지도록 기원을 올리겠습니다.”

대웅전 밖에서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탱화를 배경으로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삼불상이 모셔져 있었으며 화려한 단청과 어울려 대웅전 안팎이 모두 고색창연하게 보였다. 필자가 구두를 벗고 대웅전에서 들어가려고 하자 스님은 물론 북측 당국자들도 새삼 놀라는 표정으로 멀뚱히 쳐다보았다.

“정말 괜찮습니까? 목사 선생님이 부처님께 무릎 꿇으시면 하느님이 벌주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어서 그렇지 하나님은 그런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통일대업은 남과 북이 따로 없고 기독교, 불교가 따로 없습니다.”

“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스님과 필자의 대화 내용이 우스꽝스러웠던지 신성한 대웅전 입구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주변의 모든 일행들이 배꼽을 잡으며 한 바탕 즐겁게 웃었다. 법당에 들어가 삼존불이 모셔진 불상 앞에 향을 피우고 허리를 숙여 절을 올린 후 제단 앞 방석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스님의 목탁소리와 염불에 맞춰 남북의 자주적인 평화통일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스님의 염불소리는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 제법 그럴듯하게 청아하고 구성졌다.

삼배를 올리는 동안 북측 국장과 참사는 문지방 앞에서 멀뚱히 지켜만 볼 뿐 법당 안에 들어와 절을 올리지는 않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북에서는 스님 외에는 일반인들이 절간에서 큰절을 하거나 삼배를 올리지 않는다는 답변을 해 북측 불교계의 규칙을 새롭게 알게 해주었다. 신자든, 비신자든 조불련 소속의 공식 스님 외에 일반 인민들이 법당 안에 들어와 삼배를 올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듯했다.
 

▲ 광법사 대웅전 앞마당 모습. 8각 5층 석탑은 고구려 사찰의 전통적인 사찰 배치 양식에 따른 것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스님의 안내로 대웅전에 들어가기 직전의 필자 일행.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불상 앞에 분향하는 필자와 일행.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광법사 스님이 즉흥적으로 집전하는 조국통일 기원 예불 의식에 동참한 필자와 일행.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고구려식 불상들은 재질과 색상이 획일화 되었다
     
필자가 예불을 드리면서 바라보니 불단에 모셔진 삼불상은 북측의 다른 절들보다는 약간 밝은 빛을 띤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북측의 다른 불상들과 크게 차이는 없었다. 재정적인 이유 때문에 거의 대부분 가금을 사용했는지 금불상처럼 찬란히 빛나는 환한 색을 띤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청동 빛도 아닌 매우 칙칙한 금색을 띠고 있었다. 복원 당시 원래의 고구려 불상의 특징을 살리는 방향으로 개금불사를 조성한 듯 보였으나 아무래도 남측 불상에 익숙한 필자로서는 마냥 어색하기만 했다.

대웅전 금당 내부를 둘러보니 전면 중앙에 높은 불단을 세우고 그 위에 투박한 연좌대를 설치해 석가모니 주존불을 중심으로 삼존불을 모셨다. 남측도 보통 주존불 좌우에는 입시불을 함께 두어 삼존불을 모시는데 이곳도 그러했다. 가장 한가운데는 석가모니불을 모셨으며 오른쪽에는 인간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 왼쪽에는 인간을 극락세계로 이끌어준다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었다. 주존불 위 천장에는 닫집으로 장식되어 신비감을 더해주었으며 뒷면 벽에는 커다란 후불탱화가 높이 걸려 있어 장엄미를 더했다. 마치 필자가 남측의 궁궐들을 관람할 때 보았던 임금님의 정전(正殿)과 같은 양식이었다.

인간을 제도하는 부처님을 이 세상 제왕과 같은 반열에 둔다는 의미로 조선왕조를 비롯한 그 이전 왕조시대에는 사찰의 금당만큼은 궁궐의 건축 양식을 허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궁궐 외에는 아무리 고관대작의 집이라 해도 둥근 기둥으로 집을 짓거나 닫집이나 단청을 할 수 없지만 절간의 대웅전 금당은 허용했던 것이다. 일반 사찰에는 보통 대웅전(금당) 외에도 관음전, 극락전, 지장전, 칠성전, 산신각, 조사당 등 많은 전각이 있어 각기 다른 불상이나 보살상이 모셔져 있거나, 불화 또는 조사나 선사들의 그림이 걸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북측의 대웅전에는 삼존불의 배치가 약간 남측과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남측에는 주존불로 석가모니불, 오른쪽에는 아미타불, 왼쪽에는 보현보살상을 모시는 규례가 있는 반면 광법사는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모셨다.

필자가 불교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헷갈렸던 부분이 절간에는 웬 부처님의 종류가 그리도 많고 다양하냐는 거였다. 부처의 종류가 다양할 뿐 아니라 포지션과 역할도 다양한 것처럼 보였다. 남측 절간을 보면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무량수전이나 극락전은 아미타불, 미륵전은 미륵불을 각각 주존불로 모시고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된다. 그리고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지장전은 지장보살을, 칠성각에는 칠성님을, 산신각은 산신을, 조사당은 역대 조사상을 모시고 있으나 북측에는 사찰을 복원할 때 꼭 필요한 중요한 전각 외에는 나머지 전각들을 대부분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동안 남측은 대웅전과 전각, 불상 등 과거의 유물을 복원함에 있어 거의 전부를 새 것으로 교체하다시피 하는 것과는 달리 그래도 북측의 사찰들은 지붕과 기둥 등의 건물형태와 석탑 등을 비롯해 문살, 단청, 벽화 등의 모습과 배치가 나름대로 원래의 고색을 유지하고 있어 정취가 느껴졌다.

▲ 대웅전 내부모습. 한통속이 된 2층 높이의 높다란 천장 아래 닫집이 설치되었고 그  아래 삼불상이 모셔져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후불탱화를 배경으로 삼불상이 모셔져 있다. 조화와 촛대, 향로 등이 매우 빈약해 보여 약간 민망스러웠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정 중앙에 모셔진 주존불 위에 그려진 석가모니 부처님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부처님 이마에 박힌 송과선(백호)은 남측 사찰과 동일했으나 머리 한 가운데 세모 모양의 빨간 표시는 매우 생경스러웠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삼불상 중 우측에는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사를 모셨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삼불상 중 좌측에는 극락세계로 인도한다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후불탱화 외에도 대웅전 한쪽 벽면에 별도로 모셔진 탱화. 양옆에 촛대가 비치됐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동갑나기 주지 스님을 만나니 동류감이 형성되다
      
즉흥 예불을 마치고 대웅전을 나온 필자는 스님과 안내원,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2시간 동안 경내를 구석구석 돌며 역사적 배경과 그에 따른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더 나아가 스님과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저런 개인사 이야기까지 나누다보니 서로 호랑이띠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보다는 한참 더 연장자로 알고 있었는데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한층 더 친근해지고 정감 넘치는 사이가 된 듯했다. 동갑이라 이유 하나만으로 동류감마저 느껴지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목사 선생과 절간에 중이 친구를 하면 모두가 이상하게 보겠지만 그 상징성이 커서 보기가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저와 동무가 되시는 겁니다.”

“아. 좋습니다. 그럼 계속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원래 광법사는 서기 392년 고구려 광개토왕 시기에 목재로 건조되었으나 1953년 조국해방전쟁시기(6.25전쟁)에 미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훼손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전후 복구시기였던 1950년대 원래대로 목재형식을 본 떠서 콘크리트로 지었다가 1989년 김일성 수령님의 가르침에 의해 지금의 모습대로 다시 복원된 것입니다.”

“아, 그렇다면 전쟁 시기에 도대체 어느 정도나 파괴된 것이고 미군이 어떤 식으로 파괴했다는 것입니까?”

스님 답변을 듣는 중 해설사를 힐끔 쳐다보자 이번에는 해설사가 답변을 낚아채듯 중간에 말을 이어갔다. 해설사는 광법사를 초토화시킨 가해자가 미군이라는 구체적인 근거를 달달 외우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광법사는 조선 말기까지 중창과 중건을 거듭하며 평화롭게 내려오던 중 전쟁 기간인 1952년 7월 11일부터 8월 29일까지 무려 세 차례에 걸쳐 미국 극동사령부 공군비행단이 대대적인 평양 소개작전(疎開作戰)을 벌이면서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쏟아 붓는 바람에 모두 불에 타버리거나 파괴된 것입니다.”

미국은 정전협정 당일에도 어떻게 하든 북측의 모든 주요시설물들을 하나라도 더 파괴하려고 협정 효력이 발생하기 2분전까지 미 본토의 공군력까지 총동원해 원산과 평양을 쑥대밭을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그 후 전후 복구를 마무리하면서 미제의 야만적인 폭격으로 무참히 파괴된 폐허 속에서 우리 민족문화유산을 귀중히 여기시는 수령님께서 1989년 11월 친히 광법사를 찾으시고 절이 파괴된 것을 못내 가슴 아파하시며 복구 개건할 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며 파괴되기 전까지 존재하던 리조시기의 건축형식을 그대로 살려 원상대로 본격적으로 복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해설사는 6하 원칙에 의한 역사적 사실들을 줄줄 외우며 쉬지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길래 저토록 줄줄 나올 수 있는지 사뭇 궁금했다.

“고구려 시대의 건축양식과 기법에 의해 목재와 콘크리트를 적절하게 혼용하는 방식의 공법으로 1989년부터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1990년 12월까지 개건사업을 모두 끝마쳤으며 공화국으로부터 국보유적 제164호로 지정돼 우리나라 국보사찰이 되었습니다.”

스미소니안 미술관에 소장된 사진으로 판명된 광법사의 친일 성향
     
한편 이 절이 창건된 정확한 유래에 대한 해설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고구려 24대 광개토왕(374-412)시기에 아홉 개의 큰 절간을 평양에 창건할 때 지은 절중에 하나였다는 근거는 ‘삼국사기 제 18권 고구려본기 제6 광개토왕’ 부분에 기인한다고 했다. 필자는 북측과 남측의 역사인식에 대한 차이점과 공유점을 좀 더 파악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료 내용들에 대해 조목조목 질문하고 답변을 얻어냈다. 결론을 보면 대부분 남과 북의 역사인식이 비슷했으나 북측은 모든 우리나라 역사의 주체를 고구려를 중심에 두고 있었다는 점이 특이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이 되던 해 중국 전진(前秦)의 아도(阿道)라는 승려와 순도(順道라는 승려가 20년 차이로 방문하면서 그들에 의해 불교가 고구려에 전래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들로 인해 평양 인근에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이 세워졌고 이어서 평양에 아홉 개의 사찰이 집중적으로 창건되며 고구려 불교가 흥왕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는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372년 보다 20년이나 뒤늦은 392년에 아도화상에 의해 광법사가 창건된 것입니다. 그 후 세월의 흐름에 따라 평양의 모든 구사(九寺)들이 흔적도 없이 역사 속에 사라졌다가 우리 공화국 정부의 노력으로 점차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필자가 평양을 출발하기 전 부터 광법사에 대한 사전 자료를 구하기 위해 오래된 영상자료와 문서들을 물색하던 중 해방 전 일제 강점기에 찍은 광법사 사진 자료 여섯 장을 미국의 수도 워싱톤에 있는 스미소니언 미술관에서 입수하게 됐다. 세계 최고의 박물관과 미술관등을 소유하고 있는 미국 스미소니언 미술관(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측의 도움으로 상태가 매우 양호한 여섯 장의 광법사 흑백사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사진 내용들을 자세히 보면 천왕문에 세운 사천왕 사진과 당간지주 사진을 비롯해 대웅전 앞마당  전경 사진 등이었다. 특히 대웅전과 5층 석탑이 나오는 장면을 보면 지금에 비해 석탑이 매우 작고 초라해 임시로 세운 석탑 수준임을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매우 중요한  역사적 단서를 제공해주는 또 다른 사진 중에는 대웅전 금당 내부사진이다. 필자는 6장중에서 이 사진을 가장 의미 있게 생각한다.

대웅전 금당 내부 사진에는 지금의 대웅전 내부처럼 동일하게 삼불상을 모셨는데 필자가 불상 앞에 놓여진 위패(位牌)처럼 생긴 두 개의 패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안타깝고 씁쓸한 마음이 들어 괴로웠다. 왜냐하면 그 두 개의 패는 왕이나 왕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는 이른바 ‘어수비(御壽牌)’였는데 불상 좌우에 놓여진 어수비에 적인 내용으로 보니 아마 고종이나 순종 시절에 찍은 사진임을 알 수 있었다. 좌측 어수비는 일본천황을 위해서, 우측 어수비에는 천황의 아내인 황후를 위해 세운 것으로 보아 이 사진의 장면은 광법사가 일제 강점기   일제가 추구하던 황민화 정책을 광법사가 그대로 따르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종교계 중에서도 천주교와 더불어서 불교계가 황민화운동(皇民化運動)에 좀 더 앞장섰다는 증거 중에 하나 일 수 있었다. 필자가 삼불상 앞 좌우에 각각 놓여진 어수비들을 판독해보니 좌측에는 ‘今上天皇陛下聖壽萬歲(금상천황폐하성수만세)’라는 열 글자가 적혀 있었고, 우측에는 ‘皇后陛下聖身書年(황후폐하성신서년)’이라는 여덟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 사진을 찍을 당시 생존해 있던 천황(일왕) 부부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수비에 적힌 일왕부부가 제국주의 시대를 통치했던 세 명의 일왕 중에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정확히 예단할 수는 없었다.

다만 필자가 예측하기로는 메이지(明治) 시기인 1867년–1912년에 재위했던 무츠히토(祐宮 睦仁)라는 제국주의 초대 일왕이나, 다이쇼(大正) 시기인 1912년–1926년에 재위했던 요시히토(明宮 嘉仁) 일왕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요시히토 시대는 히로히토 황태자가 직접 섭정을 했고 그 이후 쇼와(昭和)시기인 1926년–1989년에는 황태자였던 히로히토(迪宮 裕仁)가 즉위해 63년 동안 통치했기 때문에 5년의 섭정기간 까지 포함해 거의 70년 가까이 재위했기 때문에 이 어수비의 주인공은 히로히토 부부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나는 해설사에게 이 사실을 언급했다.

“혹시 일제치하의 광법사에 대해 알고 계신 내용이 있습니까? 제가 미국에서 해방 전 흑백사진을 입수해서 확인해 보니 일본 천황 부부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어수비를 대웅전 금당에 모신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저희는 가지고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일제치하에는 불교나 천주교가 가장 먼저 친일행각에 앞장서지 않았습니까? 물론 기독교도 마찬가지였으나 불교는 더 심하지 않았습니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으니 리해는 합니다만... 그런데 그런 귀한 자료를 어디서 구했습니까? 저희에게도 좀 주십시오.”

필자는 다음 방문시에 사진을 더 현상해서 전해주기로 하였다. 아무튼 이 어수비의 주인공이 일본 제국 체제의 마지막 천황인 히로히토이든 초대 천황 무추히토이든 간에 1600년의 유서 깊은 광법사라는 정통성이 무색할 정도로 당시 조선의 사찰들에서 유행처럼 사용하던 ‘大皇帝陛下萬萬歲(대황제폐하만만세)’나 ‘天皇陛下萬萬歲(천황폐하만만세)’라는 찬양 문구들이 이곳 광법사에서도 자행됐다는 사실이 매우 유감스러웠다. 일제에 순복하며 종교로서의 권위와 정체성을 무너뜨린 후 민족의 자주성을 처절하게 내동댕이치며 친일성향에 기저를 둔 광법사였으나 역지사지의 교훈으로 볼 때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 일제시대 미국인이 찍은 평양 광법사 대웅전 모습. 5층 석탑의 규모가 지금에 비해 매우 빈약해 보인다. [사진출처: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사진제공: 최재영 목사]
▲ 일제시대 미국인이 찍은 평양 광법사 대웅전 내부 모습. 일본천황 부부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어수비가 좌우에 놓여져있다. [사진출처: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사진제공: 최재영 목사]
▲ 일제시대 미국인이 찍은 평양 광법사의 전각 내부 모습. [사진출처: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사진제공: 최재영 목사]

역사적 배경에 대한 해설을 들으니 시간가는 줄 모르다
        
참관을 하면서 제일 먼저 와 닿는 것은 총부지 면적이 2만 8400여㎡ 달하는 넓은 부지에 조성된 경내의 시설물과 건축물들이 근래에 축조된 것이라서 그런지 고졸한 맛은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필자 일행은 대웅전 앞마당 한 가운데 5층 돌탑 주위를 맴 돌며 대화를 이어갔다. 대화라기보다 필자의 질문에 대한 스님과 해설사의 연속적인 답변이었다. 여성 해설사는 정치적 의미의 발언도 서슴치 않으면서 열띤 해설들을 이어갔다.
 
“력사적으로 볼 때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427년경(장수왕 재위 15년)보다 훨씬 이전에 건립된 우리 광법사는 원래 14채의 건물을 소유하고 있었던 웅장한 사찰이었습니다. 그런데 1700년도에 불타 버린 것을 1727년에 재건하였으며, 이어서 1760년에 다시 개건 보수작업을 통해 새롭게 꾸몄다는 것이 역사자료에 드러났지 않습니까? 그 후 전쟁시기였던 1952년 7월 미군의 폭격으로 흔적도 없이 파괴된 것을 김일성 수령님이 수차 현지 지도를 하시며 원상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으며 이 사업을 받드신 김정일 장군님도 조속히 완공하도록 수차례 현지 지도해주시어서 마침내 지난 91년 2월에 모든 개건공사를 마치고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까지 이곳을 찾는 인파들이 매일 그칠 날이 없을 정도이며 저희들은 광법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슬기와 용감성을 전하는 애국주의 교양에 적극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복원 공사 중에 3개의 옛날 비(碑)들을 다시 찾아냈는데 이 비에는 광법사 건물의 역사는 물론 대성산성을 지키며 싸운 고구려시대 선조들의 투쟁 이야기가 전설처럼 적혀있다고 했다.

“우리 절의 천왕문 서쪽에는 1727년에 세운 ‘광법사사적비’와 1758년에 세운 ‘중수단청비’와 1638년에 세운 ‘광법사시왕개소상비’가 남아 있는데, 이 비들은 복원사업을 진행하던 중에 폭격으로 폐허간 된 땅속에서 다시 발굴 된 것 들입니다. 우선 사적비에는 ‘광법사는 대성산에 있던 십여 개의 사찰 중 규모가 가장 컸다는 문구도 있습니다. 또한 사적비에는 본래 우리 절간에는 보광전 뿐 아니라 명부전·약사전·시왕전·법뢰각·천왕문·조계문·진여문 등 여러 전각들이 있었음도 적혀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력사적으로 여러 차례의 전쟁과 화재 등의 재해를 입어 다시 복구되기를 반복하며 결국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필자는 비문에 적혀 있는 16개의 전각들과 시설물들을 현재 원래대로 모두 복원한 상태인지를 물었다.

“사적비문에는 보광전, 명부전, 칠성당, 삼일암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오는데 사적비 뒷면에 음각 글씨에 의하면 중층 대웅전, 동서 선승당, 동서 상실, 약사전, 십왕전, 판전, 법뢰각, 천왕문, 조계문, 그리고 종을 매달았던 진여문 등으로 조성되었고, 그중 일부가 근세기까지 남아서 전해 내려오다가 전쟁 때 미제의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된 것입니다. 그 후 수령님에 의해 해탈문, 천왕문, 대웅전, 동승당, 서승당, 8각 5층탑을 우선적으로 복원되었고 이어서 당간지주와 옛 련못을 원상태로 복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전각들은 아직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복원하지 못하였습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원래 16개의 모든 축조물중에서 현재 연못과 당간지주를 포함해 8곳만 만 복원된 것이다. 또한 개건공사를 마친 후 북측 조불련은 초대 주지스님에 안순창 스님을 임명하는 것을 비롯해 모두 여섯 명의 승려들이 직접 기거하며 이 절을 지켰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2000년대 중 후반까지 주지 스님이 수덕 스님에서 광선 스님으로, 다시 법봉 스님(현 조불련 심상진 위원장) 등으로 연이어 바뀌면서 항상 여섯 명의 승려체제가 계속 이어졌는데 현재는 금암 스님, 혜명 스님 등 모두 세 분의 스님만이 절을 지킨다고 했다.

현재 외부인들을 접견하는 스님들은 불당을 청소하고 불전(佛展)을 관리하는 부전스님 역할도 겸임하는 등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듯 했다. 절간 식구들과 함께 스님들은 삭발과 가사장삼을 입은 채 문화재를 보존하는 임무에 충실하는 듯했고 간혹 방문하는 북측의 불자들과 국내외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일을 하거나 절간의 문화재 시설물을 통해 역사 교육와 사회주의 교양사업을 하는 역할에 치중하고 있었다. 특히 남측의 불교계 인사들이 방문해 다양한 행사들을 치룰 때는 조불련 측에서 재정적, 인적 지원이 총동원되어 준비하기 때문에 큰 걱정은 안한다고 한다. 필자는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세워진 사찰이다 보니 여러가지 궁금한 것들을 더 물었다.

“제가 알기로는 중국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불도를 전하던 포교승이었던 순도(順道)가 전진(前秦)이라는 나라의 국왕인 부견(符堅)의 사신을 따라 고구려에 들어와 불상과 경문을 전하면서 최초로 고구려에 불교를 전래한 인물로 기록이 되었는데 그후 순도의 뒤를 따라 2년 후인 374년에 아도(阿道)라는 승려가 불도를 전하기 위해 고구려에 들어 왔지 않습니까?  결국 이 광법사를 직접 아도선사가 창건했다는 말은 사실인가요?”

“그렇습니다. 순도 스님이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고구려로 왔을 때 고구려의 소수림왕과 신하들이 모두 나와 그를 귀인으로 맞이하며 대대적으로 환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왕은 375년에 고구려 최초의 사찰인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해 순도를 머물게 해 고구려에 포교를 하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불란사(伊弗蘭寺)라는 절을 창건해 아도스님을 머물게 해 고구려가 불교를 완전히 수용하여 백성들에게 보급하는 정책을 본격적으로 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두 스님으로 인해 전진과 고구려가 평화적 관계를 맺고, 불도를 호국사상으로 삼았으며 결과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을 전후해 신라와 백제 등 삼국이 모두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는 큰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 스님의 안내로 광법사의 대표적인 문화재인 광법사기적비와 광법사십왕개소상비, 중수단청비를 둘러보는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음각체 한자로 적힌 광법사사적비문을 한글로 알기 쉽게 적은 해설문 비석.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경내를 구석구석 안내하며  친절하게 해설하는 스님과 필자 일행.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대웅전 8각 5층 석탑에 대한 유래를 듣는 필자.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 스님과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경내를 참관하는 필자 일행과 북측 일행들. [사진제공 - 최재영 목사]

나옹선사, 김시습, 동봉선사 등의 관련 유물도 보관 중인 광법사
     
경내에 세워진 대부분의 전각들이나 석탑을 보면 복원공사를 한지 30년이 안됐기 때문에 아직 현대의 석공과 목공들의 체취가 가시지 않은 것 같아 고풍스런 맛은 느낄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경스러움은 천년 세월의 신비를 간직한 당간지주와 탑비들이 존재하기에 거뜬히 무마 되었다. 특히 이곳 광법사에는 고려말기 고승인 나옹선사(懶翁禪師)의 행적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소문나 있길래 해설사에게 자세히 물었다.

“우리 광법사에는 고려 말기의 나옹선사의 행적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원래 나옹선사가 원나라 연경(燕京)으로 건너가 고승들을 찾아 가르침을 받고 인도의 지공선사(地空禪師)의 법을 이어 받지 않습니까? 나옹이 우리 절에 머물 때 원나라 황제가 ‘금자화엄경첩’과 ‘금강저서’를 보내온 이야기 말고 우리 절과 관련한 일화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매우 소문난 문인인 김시습이 여기 머물렀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매월당 김시습은 생동감 있고 심오한 문장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지 않았습니까?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된 후 지체 없이 여행을 떠났다는데 그 첫 방문지가 바로 관서지방이었습니다. 림진강을 거쳐 개성을 들려 고려왕조의 흔적을 둘러본 매월당은 이어서 평양과 안주지방을 두루 거치며 민족의 시원과 고구려의 기개를 돌아봅니다. 이어 묘향산으로 들어가 깨달음의 시간 속에서 여름을 보내며 사상의 기틀을 다듬고, 늦여름에는 북쪽 여행이 여의치 않게되자 발길을 돌려 안주와 숙천을 거쳐 평양으로 다시 돌아와 이곳 광법사에 머물며 자신이 유람하면서 적은 시를 정리해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선조임금 시기에는 동봉선사(東峯禪師)도 이 절에 머물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이야기에 대해 알려줄 수 있습니까?”

“아 동봉대사 이야기는 여기 사적비문 내용에도 잠깐 나옵니다. “나옹선사가 남긴 자취, 사람도 오래되고 물건도 오래되어 기이하지 않은 게 아니건만,  뛰어난 우리 동봉대사 스승 쫓아 자취 남겼도다”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나옹선사가 지공화상으로부터 불법을 전수받고 이 절에 머물렀고, 그 후 동봉선사도 이곳에 오래 머물며 시를 짓고 노닐었다는 기록도 있고 여러 일화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절에는 나옹화상과 매월당 등의 유물 일부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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