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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노동자, 민주노조로 민주주의 다지다” 동일방직 ‘똥물사건 ’ 40년, 이총각 전 지부장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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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21  13:4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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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일 '동일방직 똥물사건' 40년을 맞아 지난 2일 인천 남동구 간석동 '청솔의 집'에서 이총각 전 동일방직 지부장을 만났다. [사진-조천현]

1960~70년대 수출만이 살길이라던 박정희 정권. 당시 산업역군은 남성을 지칭했다. 하지만 가난의 굴레에서 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의 터를 닦은 이들은 바로 ‘공순이’라고 불리던 여성 노동자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1일은 박정희 군사정부를 무너뜨리는 기폭제였던 소위 동일방직 ‘똥물사건’이 발생한 지 꼭 40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동일방직 세 번째 여성 지부장으로 40년째 복직을 기다리며, 노동자의 맏언니로 활동하는 이총각 전 지부장을 지난 2일 인천 남동구 간석동 ‘청솔의 집’에서 <통일뉴스>가 만났다.

“관찰, 판단, 실천의 정신으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인천 ‘동양방적’을 이어받은 ‘동일방직’은 솜에서 실을 뽑아 면포를 만들고 기타 화학섬유 제품을 만드는 회사였다. 대부분의 생산직 노동자는 여성이었다. 솜뭉치가 실로 만들어지는 방적과는 25~26도의 열기 속에서 노동자들은 솜먼지로 숨쉬기 힘든 상황에서 일했다. 실로 옷감을 짜는 직포과는 수 천대의 방직기들이 쏟아내는 소음으로 귀는 찢어질 듯했다.

이총각 전 지부장은 “우리 엄마는 새우젓 장사하고 아버지는 돈 버는 거를 잘 몰랐다. 하루 세끼도 못 먹었다”며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일하면 돈을 많이 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66년 공장에 들어갔다”고 회고했다.

   
▲ 이총각 전 지부장. [사진-조천현]

하지만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되겠다는 생각은 바뀌었다. 가톨릭 신자로 공장 언니들의 권유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지오세)에 들어간 이총각은 ‘관찰, 판단, 실천’이라는 ‘지오세’의 정신에 빠져들었다. 생활 나눔에 이어 노동이 무엇이고 노동법은 어떤 것이며, 노동조합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도시산업선교회’와 연대하면서 1972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가 치러진 지 꼭 24년 만에 한국 최초로 동일방직 노동조합 여성 지부장이 탄생했다. 어용노조가 아닌 민주노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주길자 지부장에 이어 이영숙 씨가 두 번째 여성 지부장에 선출됐다. 하지만 남성 노동자의 탄압이 이 무렵 시작됐다.

“남자들이 ‘저년들 저거 1년도 못해서 손들고 나올 것’이라고 무시했다. 그런데 주길자 지부장이 3년을 잘했다. 임금인상하고 근무조건 개선시키니까 두 번째 여성 지부장 선출은 문제가 없었다”고 이총각 전 지부장은 말했다.

그런데 두 번째 여성 지부장 선출 이후 남성 노동자와 회사는 물론, 박정희 정권 차원에서 문제시했다는 것. “여성들이 3년을 잘 하니까 여기저기서 지부장이 나왔다. 회사 차원에서 여성 지부장이 나오는 걸 차단해야겠다고 생각했나 보더라. 게다가 노사 간의 문제가 아니라 중앙정보부가 깊숙이 개입했다. 그리고 이영숙 지부장이 선출되고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나체시위’와 ‘똥물사건’..“이총각, 나는 절대 포기 못해”

1976년 7월 23일 남성 노동자들은 일방적으로 대의원대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이영숙 집행부를 없애고 다시 어용노조를 만들려고 획책했다. 이날 경찰은 이영숙 지부장, 이총각 총무 등을 연행했다. 그러자 파업이 불법화되던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파업을 단행했다. 7월 25일 경찰이 강제해산을 하자, 여성 노동자들은 웃통을 벗었다. ‘나체시위’였다.

“그들의 투쟁 결과 3일 만에 유치장에서 나왔다. 공장에 들어가 보니 작업복이 노동조합 사무실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운동화, 모자, 옷 심지어 생리대까지…. 보자마자 대성통곡을 했다. 그러면서 사람이 오기가 생겼다. 이총각이 나는 절대로 포기 안 한다.”

이영숙 지부장의 사퇴로 이총각 총무는 1977년부터 지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1978년 2월 21일. 새로운 지부장을 선출하기 위한 대의원 선거 당일이었다. 회사 측과 상급노조인 한국노총 섬유노조는 이총각 집행부를 와해시키려고 온갖 공작을 벌이던 때, 오전 6시 교대시간부터 투표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 이총각 전 지부장은 40년 전 '똥물사건'을 겪고 "나는 이를 갈았다"고 말했다. [사진-조천현]

오전 5시 50분경, 투표장으로 향하는 여성 노동자들을 향해 회사 측 노조원 5~6명이 방호 수통에 똥을 담아 달려들었다. 이들은 여성 노동자들의 얼굴과 옷에 닥치는 대로 똥을 발랐다. 도망가는 여성 노동자를 뒤따라가 똥을 뒤집어씌웠다. 야만의 시작이었다.

민주노조를 사수하려던 여성 노동자의 노력은 실패했다. ‘무찌르자 산업선교, 물러가라 이총각, 때려잡자 조화순’이라 적힌 플래카드가 공장에 내걸렸다. 이총각 지부장을 중심으로 여성 노동자들은 3월 10일 국무총리가 참석하는 장충체육관으로 향했다.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서울 명동성당, 인천 답동성당 등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단식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결국, 이총각 지부장을 포함한 124명의 여성 노동자가 해고됐다. 1980년대 초까지 복직 투쟁을 벌였지만 40년째 이들은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똥물까지 뒤집어쓰면서도 민주노조를 지키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총각 전 지부장은 “노동조합을 알게 되니까 세상이 내 것 같았다. 가난의 현주소를 알고, 나도 한 인간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고, 말할 자유, 일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똥물사건을 겪고 이를 갈았다”고 말했다.

“동일방직 때문에 신세 조졌다”던 엄마의 말에도, 이총각 지부장은 강단이 있었다. 동대문에서 유인물을 뿌리다가 잡혔던 일화.

정보과 형사가 이총각을 끌어냈다. “보아하니 천생 여자로 생겼구만. 왜 이렇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해! 너 고향이 어디야”라고 묻는 형사에게 이총각은 “황해북도 연백”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형사가 “순 이년 이북 빨갱이 년이구만”이라고 비아냥댔다.

이총각은 “내가 왜 빨갱이냐! 이북이 고향인 사람이 나뿐이겠냐!”라고 쏘아붙였다. 김대중을 아느냐는 형사에게 모른다고 답하자, 형사는 이총각의 뺨을 때리고 정강이를 걷어찼다. “왜 때리냐! 말로 해라! 내가 고향이 이북이라는 거, 김대중이를 모른다는 게 잘못이냐!”고 따졌다.

1979년 3월 새벽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 관련 참고인으로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을 당시 중정 요원에게 칫솔을 사달라고도 하거나, 조사 뒤 돌아갈 때 차비를 달라고 하는 등 이총각 전 지부장은 “강하면 부러진다고 약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온 것이 아닐까”라고 자신을 돌아봤다.

“세상에 태어나서 여자는 결혼해서 가정을 가져야 한다는 게 의무 같은데, 그러나 정말 내가 해야 하는 일, 살아야 하는 삶, 가야 하는 길을 누가 뭐래도 묵묵하게 갔을 때, 이것이 정말 나를 의미 있게 해주고, 자유롭게 해주고, 그 길을 통해 조금이라도 기쁨 있는 삶이라면 그것 또한 포기하지 않고 가야 할 삶이 아니냐.”

   
▲ 이날 인터뷰에는 이계환 <통일뉴스> 대표가 함께했다. [사진-조천현]

“노동자는 삶자체가 노동화되어야.. 통일운동에 나서라”

1947년생 일흔두 살, 노동운동의 맏언니 이총각 전 지부장은 지금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아쉬움이 많다고 지적했다. “나는 노동조합을 알면서 지금까지 살아오게 됐다. 노동조합을 통해서 내 인생관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었는데, 왜 오늘의 노동조합은 발전이 안 되느냐”고 아쉬워했다.

“노동자의 역할이 따로 있느냐. 노동을 하면 다 노동자이다. 한번 노동자, 노동조합 간부는 영원한 노동자 아닌가. 노동자는 따로 운동한다는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가 노동화 되어야 한다. 노동자답게 살아야 한다. 노동자의 역할은 따로 있지 않다. 삶 자체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서 현재의 노동운동을 향해 죽비소리를 냈다.

이총각 전 지부장은 노동자가 통일 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통일은 노동자다, 아니다 하고 구분해서 해야 할 일은 아니다”라면서도 “독재정권이 분단된 조국에 있으니까 건뜻하면 빨갱이다 뭐다 해서 사람을 죽이고 감옥 보내고 병신 만드는데, 노동자들이 이걸 끊어내야 하지 않느냐”고 강조했다.

그리고 “우리가 자주적으로 힘을 합쳐서 빨리 통일이 됐을 때, 노동자의 삶도 훨씬 더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다. 우리가 자주독립해서 강대국들이 정말 더 이상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노동자의 큰 역할”이라며 “나도 통일 운동에 적극적이지 않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겠다”고 힘을 줬다.

동일방직사건 40년, 여성해방.민주주의 높은 평가.. 재조명 필요

‘동일방직 똥물사건’, ‘동일방직 민주노조 사수투쟁’, ‘동일방직 복직투쟁’ 등 다양한 이름으로 평가받는 ‘동일방직사건’ 40년. 오늘을 사는 노동자들도 모르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일로 치부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40년 전 ‘동일방직사건’은 오늘의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토대였다. 1978년 2월 21일 ‘동일방직사건’은 1979년 ‘YH사건’에 영향을 줬다. 이는 ‘부마항쟁’으로 이어졌고 박정희 정권을 몰락시켰다. 전두환 정권에 맞선 1986년 인천 5.3투쟁, 1987년 민주화운동 등의 뿌리는 ‘동일방직사건’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이총각 전 지부장은 동일방직 공장 부지의 보존을 희망했다. [사진-조천현]

그뿐이랴.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는 ‘동일방직사건’이 천대받던 여성이 노동을 통해 세상을 자각하고 세상의 중심에 진입하는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남성 노동자들은 그녀들이 보여준 지식 그 자체에 대한 열망과 애정, 여기서 열리는 더 근본적인 여성해방의 가능성을 두려워했기에, 한편으로 시기심이 발동하고 짜증나고 신경질이 나서 그것을 절대로 보이지 않게 확실하게 가려야 했기에 똥칠을 했던 것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간직하고, 민주주의의 토대였던 동일방직 공장은 현재 인천에 물류창고로만 남아있다. 이마저도 상업.주거용도로 바뀔 것으로 알려졌다. 40년 전 천대받던 여성이 민주노조를 사수하고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던 역사가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민주노조를 지키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공장 부지를 시민사회가 인수해서 시민들을 위한 공원을 만들든지 역사현장으로 만들어서 공장의 일부를 남긴다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이총각 전 지부장은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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